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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주자학이 도입되고 16세기에 주자학이 조선사회에 정착되면서 그 영향력은 가옥구조에도 미쳤다. 16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성리학적 질서와 윤리가 더욱 강화되면서 집의 공간 배치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큰 변화로 남녀 사이에 엄격한 내외법이 적용되고, 양반가옥에서는 여성의 유폐(幽閉)가 이루어졌다.


여자는 중문 밖을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지면서 규모가 큰 양반집에는 여자들이 사는 안채와 남자들이 사는 사랑채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안채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살고 사랑채에는 아버지와 혼인한 아들이 살았다. 뒷간도 여성 전용의 안뒷간과 남성 전용의 바깥뒷간을 다로 두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16세기부터 서서히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똬리집 평면도/ⓒ네이버


일부지역에서는 양반집의 경우 구조도 폐쇄적으로 바뀌어 'ㅁ'자 집이 늘어났다. 예전부터 서울의 중인, 양반 집에서 'ㅁ'자 집을 지었던 주된 이유는 도성 안에 집 지을 공간이 넉넉지 ㅇ낳아 좁은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방으로 확산된 'ㅁ'자 집은 그렇지 않았다. 지방의 집들은 대개 한일자 모양이나 'ㄱ'자 모양의 고패집이 일반적이었는데, 'ㄷ'자 모양으로 바뀌거나 고패집이 'ㄱ'자와 'ㄴ'자 형태로 결합된 맞고패집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공중에서 지붕을 보면 완전히 폐쇄된 'ㅁ'자 형태의 집으로 바뀌었다. 이런 집을 경기도에서는 똬리집,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에서는 뙤새집, 경상북도에서는 뜰집이라고 불렀다. 그런 집들은 중문 안쪽의 안채공간을 폐쇄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사랑방은 주인남자의 기거공간이면서 한편으로는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다. 대문을 들어선 외부손님이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중문을 들어가야 했다. 안채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중문을 열어도 바로 안채쪽이 보이지 않게 통로를 일부러 꺾어놓는다든지, 중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내외벽을 두어 안채를 가리기도 했다. 또 안채 뜰 한가운데는 사철 푸른 상록수를 심어 안채 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하기도 했다. 이렇게 안채를 가리는 풍속은 꽤나 철저해서 19세기 말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여류 지리학자 비숍(I.B Bishop)은 마을에서 어떤 집이 지붕을 고칠 경우에는 온 동네에 지붕을 고친다고 미리 알려야 했다고 전한다.


추사고택 평면도/ⓒ네이버


주인부부의 공간이 분리되면서 아들딸의 공간도 분리되었다. "남녀가 일곱살이 되면 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밥을 같이 먹지 않는다"는 '예기(禮記)'의 가르침에 따라아이들도 딸은 안채에서 키우고 아들은 사랑채에서 키웠다.

 

엄밀한 내외법과 여성의 유폐는 부부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양반집에는 부부가 기거하는 방이 안채, 사랑채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있어서 태종 때 한성부(漢城府, 조선왕조 수도(首都)의 행정구역 또는 조선왕조 수도를 관할하는 관청의 명칭)에서는 부부가 같은 방에서 자지 말고 각각 다른 방에서 자도록 나라에서 강제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17세기까지만 해도 실제 부부는 같은 방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18세기부터는 규모가 큰 양반집에서는 부부가 각각 다른 방에서 자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 때문에 며느리가 기거하는 건넌방과 젊은 아들이 기거하는 작은사랑방을 연결하는 통로를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두어 몰래 성생활을 하게 되면서도 잠은 따로 자게 하는 특이한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유별난 내외법은 차츰 일반백성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세 칸짜리 집에서도 부엌에 달린 방은 여성의 기거공간이 되고, 또 하나의 방은 남성의 작업공간이 되었다. 때로는 툇마루로 이어진 두 방 사이에 벽을 쳐서 부부의 방을 상징적으로 분리시키기도 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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