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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 복원모형]

[만월대 복원모형]

[현재 남아있는 돌계단]

[궁성터 발굴]

[궁성터 발굴]

[출토유물]

[출토유물]

7-8월 남북한이 공동 발굴조사하는 개성 만월대는 송악산(松嶽山) 남쪽 기슭에 자리한 고려시대 궁궐터다.

고려 태조 왕건은 재위 2년째인 서기 919년 정월에 개성에다 도읍을 정하고 만월대 자리에 궁궐을 창건했다. 이후 만월대는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역대 고려왕이 상시 거주하면서 정무를 보던 정궁(正宮)이었다.

동서 445m, 남북 150m의 장방형 대지를 차지한 만월대에서 정전(正殿)은 회경전(會慶殿)이라 일컬었다. 조선 광해군 때 편찬된 조선 팔도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건덕전(乾德殿)을 정전이라고 했으나, 12세기초에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된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정전은 회경전이라 했다.

나아가 고려사 희종 2년 4월 조에 수록된 기사에서도 정전을 회경전이라고 했다.

경복궁의 근정전에 해당하는 회경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이며 전면에 4개 계단을 만들고 그 좌우에는 동행각(東行閣)과 서행각(西行閣)이라는 부속 건물을 배치했다.

회경전 북쪽에는 고려왕실 보물창고인 장화전(長和殿)과 비상시에 왕이 대신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원덕전(元德殿)이란 건물이 있었다. 또 서북쪽에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건덕전, 후궁들이 거처하던 침전인 만령전(萬齡殿)이 있었다.

회경전과 건덕전 사이에는 사신 등이 바치는 물품을 받는 장령전(長齡殿)이 있었고, 나중에 집현전(集賢殿)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연영전(延英殿)도 있었다. 회경전 서쪽 인접 지점에는 왕을 위한 침전이 자리잡았고, 동쪽에는 세자가 거처하던 좌춘궁(左春宮)이 있었다.

정궁에는 13개 성문과 15개 궁문이 있었다고 기록에 보인다. 성문 중 동문인 광화문(廣化門)이, 궁문으로는 왕궁의 정남문인 승평문(昇平門)과 신봉문(神鳳門), 창합문(嗽闔門), 의봉문(儀鳳門)이 유명하다.

승평문은 정전인 회경전으로 연결되는데 이 문을 들어서면 신봉문이 있었고 그 동쪽에 세자궁으로 들어가는 춘덕문(春德門)이, 서쪽에 왕의 침전으로 들어가는 태초문(太初門)이 있었다.

신봉문 안에는 왕이 중국 천자의 조서를 받들던 창합문이 있었고, 그 안에 다시 회경전으로 통하는 전문(殿門. 혹은 회경문<會慶門>)이 있었다.

건덕전 앞에는 건덕전문과 흥례문(興禮門), 의봉문이 있었으며, 의봉문 바깥에는 격구 경기를 하던 운동장인 구정(毬庭)이 있었다고 한다.

중앙 회경전 터를 기준으로 동벽까지는 135m, 서벽까지는 230m, 승평문까지는 250m 정도이다.

출처:http://blog.yonhapnews.co.kr/ts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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