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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8(정종 3)~1031(현종 22). 고려 현종 때의 장군.

1010년과 1018년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특히 우리나라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꼽히는 구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본관은 금천(衿川).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헌복시(任軒覆試)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올라 승진을 거듭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그뒤 국자제주(國子祭酒)·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이부상서를 역임했고, 1018년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했다.





거란의 침입과 격퇴

1010년(현종 1) 거란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조정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이에 놀란 조정의 대신들이 항복을 주장했으나, 강감찬은 이를 반대하고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왕을 나주로 피신하게 했다. 왕의 피신중에 양규(楊規)가 곽주(郭州)에서 적을 무찌르고, 하공진(河拱辰)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고려는 항복의 치욕을 면하게 되었다.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현종이 친히 조회(朝會)하지 않은 것과 강동(江東) 6성을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곳곳에서 거란군을 격파했다.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는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자주(慈州 : 지금의 평안남도 자산)와 신은현(新恩縣 : 지금의 황해도 신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구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다. 침략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니 현종은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치고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현종은 그의 손을 잡고 금화팔지(金花八枝)를 머리에 꽂아주는 등 극진한 환영을 했다. 거란군을 물리친 공으로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 특진 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뒤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검교태사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特進檢校太師天水縣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죽은 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현재 그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문종(文宗)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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