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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들은 철학 사상을 이해할 때 그 사상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의 입장과 일치될수록 깊이 잇는 이해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론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배해 다른 사람들은 그 사상을 배태한 지리적,역사적 배경을 객관적으로 먼저 파악해야 그 사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환경이나 현실과 독립되어 성립하는 사상은 없다는 것이다. 앞의 경우가 '안으로 부터의 접근'이라면 뒤의 경우는 '밖으로 부터의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우리는 이 두가지의 어느 측면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진 공자/네이버 지식백과]

 

 예를 들면, 우리는 불교를 이해할 때 근본불교의 교리로서 사성제나 삼법인 등 석가의 사상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불교를 낳은 인도의 자연과 사회를 파악하는 것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가령 인도의 무더운 기후는 인도에서 발생한 거의 모든 종교와 철학들이 명상을 중시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준다. 고대로부터 사제들을 비롯한 지배층은 시원한 나무 그늘이나 석굴 속에서 명상을 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이해하는 것은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와 철학들을 고찰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사진 석가모니/네이버 지식백과]

 

 따라서 어떤 철학 사상에 접근할 때, "한 발은 안에, 한 발은 밖에 두고 보라"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안에서만 본다면 우리는 주관적, 관념적으로 흘러서 그 사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또 만일 두 발을 모두 밖에 두고 본다면 우리는 그 사상의 배경만 이해할 뿐 심오한 내용까지는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김교빈 외 13인,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웅진출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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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필적/한국민족문화대백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평생 은거했던 서경덕과는 달리 25세때 부터 적극적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1530년 사간으로 재직시에 권신들의 배척을 받아 쫓겨났다가 복귀하는 등 정치적으로 여러 차례의 질곡을 겪었다. 말년에는 권신 윤원형 일파의 미움을 받아 강계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주요 저술을 남겼다.

 서경덕이 기철학을 열었다면 회재 이언적은 이(理)의 철학을 중심으로 불교와 도교로 대표되는 비주자학적 사유를 극복함으로써 조선 주자학의 이론적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당시 손숙돈과 조한보 간에 주자학의 주요 개념인 무극과 태극에 관한 편지글이 오가는 것을 보고 이른바 무극태극 논쟁을 제기하여 두 사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논쟁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이 논쟁을 통해 주자학에 대한 불교적,노장적 이해를 비판했는데, 무극과 태극은 이(理)를 지칭한 것이지 기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동시에 이(理)는 형질이 없지만 결코 무(無)는 아니라고 하여 이(理)를 무(無)로 이해하는 노장적 풍조를 경계하여 철저하게 주자학적 사유에 입각하여 무극과 태극을 설명함으로써 주자학의 순수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한편 학문 방법론에서도 조한보가 태극의 본체를 단번에 깨친다는 논의를 비판하고 거경을 중심으로 한 주자학적 학문론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그는 이(理)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묘하지만 그 실체가 깃들어 있는 곳을 찾는다면 지극히 가깝고 지극히 현실적인 곳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일상생활을 떠나서 이(理)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학문 수행 또한 일상생활을 떠나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또 이(理)의 절대성을 특별히 강조하였는데, 사람과 사물은 형질이 있지만 이(理)는 형질이 없기 때문에 이(理)는 생사와 시종도 없는 존재라고 하여 이(理)를 무시무종의 궁극적 존재자로 규정하는 등 이(理)의 실재성과 주재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주자학을 해석함으로써 훗날 같은 이(理)의 철학자인 이황으로 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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