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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율곡 이이(1536~1584)/네이버 두산백과]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의 대표적인 주자학자로 강원도 강릉의 외가에서 태어나 어머니 신사임당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13세에 초시에 급제하고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마친 뒤 19세가 되던 해에는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는가 하면 23세에는 당대의 노사숙유(老士宿儒)로 일컬어지던 이황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그해 겨울에는 별시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했는데 이때의 담압지가 유명한 '천도책'이다.

 이이는 비교적 젊은 시절 중앙의 정치 무대에 나간 이래 20여년 동안 이조좌랑,호조판서,부제학,대제학 등 국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아울러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 십만양병론을 주장하면서 각종 화약 무기를 개발하고 전함을 건조하여 왜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유성룡 등의 유학자들로부터 아무 일도 없는데 병력을 양성하는 것은 그자체가 화근이라고 비판을 받았지만 나중에 전쟁이 일어나자 선견지명을 가진 성은으로 찬양받기도 했다.

 

[사진 초충도/어머니 신사임당은 학문과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다./네이버 공부에미친16인의조선선비들]

 

 이이는 49세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성학집요(聖學輯要)'와 '격몽요결(擊夢要訣)'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그 외에도 정치, 경제, 교육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뛰어난 방책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어 1577년 저술한 '격몽요결'은 초학자들을 위한 성리학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데 충실한 내용과 완성도 높은 체제를 갖추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성현이 되겠다는 뜻을 세워야 한다는 입지장(立志章), 나쁜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혁구습장(革舊習章), 올바른 몸가짐을 강조한 지신장(持身章), 책을 읽4는 방법을 논의한 독서장(讀書章),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논한 사친장(事親章) 등 모두 10장으로 구성 되어 학문의 목적부터 구체적인 방법과 실천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논의하고 있어 조선시대 내내 초학자들의 필독서로 여겨졌다.

 이 책의 입지장에서 그는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성인(聖人)과 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뜻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여기에서 그의 학문관이 주자학의 정신을 철저히 이어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그는 이치는 따져 보지 않고 단지 스승의 설이라고 해서 믿고 따르는 독경주의를 비판하고 스스로 의미를 찾는 자주적인 학풍을 주장했다. 그는 이런 학풍에 입각하여 이황에게 다른 사람의 견해를 모방하는 경향이 있음을 비판하고 아울러 "주자라 할지라도 정말 이(理)와 기가 상대해서 각각 발출한다고 생각했다면 주자 또한 잘못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자주적인 학풍을 중시했다.

 또 그는 벗이었던 성혼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논쟁을 진행했는데 이는 학국철학사상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일어난 사단칠정 논쟁과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논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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