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진한(辰韓)

진한(辰韓) 또는 진한(秦韓) 이라고도 한다.



[사진 경주 입실리 출토 세형동검 진한시대의 유물인 세형동검, 동과, 동모. 경주 입실리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후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한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으로 오자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주고 서로 불러 무리를 이루었는데, 진나라 말과 유사하여 간혹 진한(秦韓)이라 했다고 한다. 열두 개의 작은 나라가 있는데 모두 1만호씩이고 각기 나라라 일컬었다."

 또 최치원은 말했다.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들이 피신해 온 곳이다. 때문에 탁수(琢 水)의 이름을 취해 살고 있는 읍과 마을을 사탁(沙琢), 점탁(漸) 등으로 불렀다. 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을 도로 발음하기 때문에 지금은 때때로 사량(梁)이라 쓰고, 양(梁) 역시 '도'로 읽는다." 

 신라는 전성기에 서울이 17만 8936호였고,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金入宅)-부유하고 윤택한 큰집이 있었다. 그것은 남택, 북택, 오비소택, 본피택, 양택, 지상택, 재매정택, 북유택, 남유택, 대택, 빈지택, 장사택, 상앵택, 하앵택, 수망택, 천택, 양상택, 한기택, 비혈택, 판적택, 별교택, 아남택, 금양종택, 곡수택, 유야택, 사하택, 사량택, 정상택, 이남택, 사내곡택, 지택, 사상택, 임상택, 청룡사, 교남택, 항질택, 누상택, 이상택, 명남택, 정하택 등이다.

[삼국유사/김원중]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변한과 백제

남부여라고도 하며 곧 사비성이다.





 신라시조 혁거세가 자리에 오른지 19년 임오년에 변한( 卞韓)사람이 나라를 바쳐 투항했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

 '후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한은 남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진한은 동쪽에 있다."

 최치원이 말했다.

 "변한은 백제(百濟)다."

 '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다. 에 의하면, 온조가 일어난 것은 홍가( 鴻嘉)-서한 성제 유경의 연호다. 4년 갑진년(기원전 17년)이었으니, 혁거세나 동명왕의 세대보다 40여년 뒤의 일이 된다.

 '당서'에서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라고 말한 까닭은 온조왕의 계통이 동명왕에게서 나왔기 때문일 뿐이다. 간혹 어떤 사람이 낙랑 땅에서 나와 변한에 나라를 세워 마한 등과 대치한 적이 있었다고 한 것은 온조 이전에 있었던 일로, 도읍이 낙랑의 북쪽에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이는 구룡산(九龍山) 역시 변나산(卞那山)으로 불렀다는 이유로 함부로 고구려를 변한이라 하는데, 이는 아마도 잘못된 것이다. 마땅히 옛 현인(최치원)의 견해가 옳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땅에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한 것이다. 백제 전성기에 15만 2300호였다.

[삼국유사/김원중]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