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조선시대에는 이혼을 이이(離異)라고 하였다. 그 밖에도 출처(出妻), 기처(棄妻)라는 말도 쓰였다. 출처는 처를 내쫓는 것이고, 기처는 처를 버린다는 뜻이다. 낱말에도 나타나듯이, 조선시대의 이혼은 부부 사이의 합의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행위였다. 아내 쪽에서 이혼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처부모를 구타한다든지, 처를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하게 구타하는 경우에 한했다. 그 경우에도 이혼의 제기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 부모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혼, 즉 아내를 내쫓기 위한 명분으로는 유교적인 가르침에 따라 칠거지악 (七去之惡)이 있었다.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경우는 첫째, 시부모에게 불손하거나 둘째,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셋째, 음행을 저지르거나 넷째, 투기를 부리거나 다섯째, 나쁜 병을 앓거나 여섯째, 말이 많거나 일곱째, 도벽이 있는 경우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삼불거(三不去)라는 예외조항이 있었다. 쫓겨나서 돌아갈 곳이 없거나, 시부모의 삼년상을 치렀거나, 가난하고 미천한 집을 부귀하게 만든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하였다. 하지만 굳이 삼불거를 이유로 들지 않더라도 칠거지악을 이유로 이혼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시부모를 구박하거나 음행을 저지른 경우에는 심각한 이혼사유가 될 수 있었지만, 그 밖의 경우에는 사소한 사유로 이혼하지는 않았다.




고려시대의 경우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재혼이 자유로웠다. 심지어 왕실에서도 그러해서 고려 초에는 문덕왕후(文德王后) 유씨가 과부가 된 상태에서 성종과 혼인하였고, 그려 말에는 순비(順妃) 허씨가 3남 4녀를 낳고 충선왕과 재혼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절을 장려한 것도 사실이어서, 3품 이상의 처가 수절하는 경우에는 작위를 내려 주는 봉작(封爵)을 하였다.

그런데 고려 말에 이르러 재가를 점차 규제하기 시작했다. 공양왕 때에 6품 이상의 처는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재가를 금지하고, 위반하면 처벌하고 봉작을 회수하도록 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로는 세 번 시집가는 삼가(三嫁)부터 규제하여 삼가를 실행(失行)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고, 이어서 삼가녀는 행실이 나쁜 여자들의 명부인 자녀안(恣女案)에 기록해 두고 그 자녀들이 관직에 진출하는 데에 제한을 두었다. 즉 세 번째 결혼 전에 낳은 자식은 관직의 품계에 제한을 두고, 세번째 결혼 후 낳은 자식은 금고(禁錮)에 처하여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법령들이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삼가녀를 자녀안에 올리고, 그 자손은 사헌부, 사간원 같은 모법이 되어야 하는 맑은 벼슬자리나, 문신과 무신의 인사를 담당하는 중요한 관서인 이조, 병조의 관리가 되지 못하게 하였다. 이어서 성종 때에는 지방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직에 쓰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이러한 조항들은 결혼 자체를 못하게 한 금지조항이 아니라 결혼해서 낳은 자식에게 불이익이 가도록 한 억제조항이었다.




그 후로 1477년(성종 8)에는 두 번 시집가는 재가(再嫁)도 규제대상이 되었다. 재가를 한 경우에는 자손들을 금고에 처하여 문과, 무과, 생원과, 진사과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여 벼슬길을 막았고, 이는 재혼 전에 낳은 자식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므로 양반가의 자식들은 출세를 하려면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먼저 사망할 경우에 어머니의 재혼을 막아야 했다.

이러한 규정이 생겨난 데에는 유고적인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여자가 홀몸이 되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은 작지 않은 문제였다. 따라서 의탁할 곳 없는 여인들이 재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일부 유학자들은 재혼을 아주 곱지 않는 눈으로 보았다. 중국의 정자(程子)는 여자들이 재혼을 하는 것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하는 일이지만, 굶어 죽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지극히 큰 일이라고 말했다.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처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완고한 사고방식은 조선의 법령에도 영향을 미쳤다. 1477년에 성종은 의정부, 육조, 사헌부, 사간원 등의 고위 관원들을 모아 놓고 재가 규제에 대한 의논을 했는데,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재가까지 규제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하였지만, 성종은 재가 규제의 편을 들어 결국 재가 규제법이 시행되었다. 몇 해 뒤에 도승지 김승경(金升卿)이 재가까지 규제하는 것은 너무 심한 듯하니 규제를 풀자고 건의했으나, 성종은 두 번 시집가도 자신에게 해가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해가 미치는 것이니, 그래도 재가하고 싶은 여인들은 그러면 그만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이 조항은 '경국대전'에 수록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재가에 대해 일반인들의 견해가 그다지 심하게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래서 16세기에 퇴계 이황(李滉)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둘째 며느리를 재가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여자들의 재혼을 심각한 도덕적 흠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족보에도 재혼한 사실을 밝히고 전남편과 후남편의 이름을 모두 족보에 올렸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