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물은 인체의 세포 내외핵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성분으로 성인 인체의 약 55~65%를 차지한다. 수분은 우리 몸에서 많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며, 체내에 저장될 수 없고 매일 배설되기 때문에 생명유지에 음식물보다 더 필수적인 영양소이다. 체내 수분의 10%를 손실하면 위험한 상태가 되고, 20~22%를 손실하면 사망한다. 정상 체중의 성인은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도 약 70일을 살 수 있지만, 수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보통의 기후에서 10일 내에 생명을 잃는다.




"수분(물)은 다음과 같은 기능을 한다."


물의 기능(효능)


-영양소를 용해시켜 각 조직으로 운반하며, 체내 대사과정에서 생성된 노폐물을 운반하여 소변, 피부, 호흡을 통해 배설시키는 것을 돕는다.

-피부에서의 증발을 통해 체온을 유지하고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세포 내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화학작용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

-체내에서 분비되는 각종 분비물(예: 소화액)의 주성분이다.

-음식물이 소화, 흡수되는 데 필수적이다.


건강한 사람은 수분의 섭취량과 배설량 간에 균형을 이룬다. 수분의 섭취는 물, 음식 속에 포함된 수분, 음식물 산화 시 생성되는 수분으로 인하며, 배설은 소변이나 대변 중의 수분, 호흡이나 피부를 통한 수분의 증발로 이루어진다. 건강한 성인은 1일 평균 1,200~1,500mL의 소변을 배설한다. 수분 요구량은 여러 영향 요인에 따라 달라지므로 쉽게 정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성인에게는 매일 6~8잔(1,500~2,000mL)의 수분섭취가 권장된다.


이와같이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물,

좋은 물의 기본 조건은 어떻게 될까?


좋은 물의 기본 조건


1. 질병의 유발인자와 미생물이 없는 물

2. 무색, 무취, 무미(味)

3. 물 분자의 크기가 작아 몸에 흡수가 잘 되는 물

4. 육각형의 분자 구조를 가진 물

5. 청량감이 좋은 물




"그렇다면 물은 언제, 얼마나 마시면 좋을까?"


하루에 마셔야할 물의 양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한

일일 물 섭취 권장량은?


물섭취 권장량=체중 x 30mL


성인 남성 하루 2.3리터


성인 여성 하루 1.9리터


유아 하루 1.2리터


영아 하루 0.8리터




"물은 언제 마시면 보다 좋을까?"


-기상직후: 체내 신진대사 촉진, 혈액순환 강화에 도움

-식사 30분 전: 과식 예방, 체내 염분 조절에 도움

-일과 중 수시로: 피로회복, 흡연 욕구 억제 등

-취침 30분 전: 적절한 수분상태 유지로 숙면 도움

-운동 시: 근육신경 회복과 혈전 및 갈증 예방


[출처: SK매직샵, SK매직 공식 렌탈샵]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양반 삼형제/ⓒ울산매일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축복할 만한 일이며 온 가족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엄격하기 짝이 없던 유학자들도 아이, 그중에서도 특히 손자가 탄생했을 때에는 체면과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기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러한 사실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1796년 3월에 쓴 다음과 같은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초사흘에 관가의 하인이 돌아오면서 기쁜 소식을 가져왔더구나. "응애응애" 하는 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다. 인간의 즐거운 일이 이것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게다. 육순의 늙은이가 이제부터 엿을 물고 구슬을 희롱할 뿐 달리 무엇을 구하겠느냐?...

오늘이 바로 내 손자의 삼칠일이로구나. 이백여 명의 관속(官屬)들에게 아침에 국과 밥을 먹였더니 좋아하며 떠들썩하게 축하해 주더구나. 그제서야 나도 경술년에 순조(純祖) 임금께서 막 태어나셨을 때 산해진미로 기쁨에 넘쳐 즐거워하면서 억조창생을 고무케 하시던 성심(聖心)을 가늠하겠더라. 다 쓰지 못한다.


아이의 탄생을 전하는 편지를 읽고서 박지원이 "응애응애" 하고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편지에 가득하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가 아이의 탄생을 얼마만큼 기다려 왔고, 또 그것을 어느 정도 기뻐하고 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박지원은 얼마나 기뻤던지, 아이가 태어나 21일째 되던 삼칠일에 200여 명이나 되는 관속들에게 밥을 먹이고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박지원과 같이 아이의 탄생을 크게 축하해야 하는 경사로 여겼기 때문에 갓 태어난 손자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재산을 분배하는 일도 허다하였다.


?... 장손에게 명문(明文)을 성급(成給)해 주는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오늘은 네가 태어난 지 7일이 되어 너를 대립(大立)이라 이름 지으니 종사(宗祀)가 이로부터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에 내가 매우 기쁠 뿐만 아니라 이는 가문의 적지 않은 경사이다.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전래된 사내종 권막(權莫)의 다섯째 소생 계집종 끝지와 온계(溫溪) 집 앞 우물가의 밭[井田] 10마지기를 영영 별급(別給)한다. ...


위 문서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이황(李滉, 1501~1570)이 1559년 6월에 그의 맏조카 이완(李完)이 아들을 낳자 7일 만에 재산을 분배하면서 작성해 준 것이다. 이호아은 손자가 태어난 일이 가문의 경사라고 말하면서 손수 이름을 '대립'이라 지어주고, 말 그대로 문전옥답인 집 앞 우물가의 밭과 이를 경작할 수 있는 계집종을 특별히 분배해 주고 있다.

온 가족의 관심은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고 축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이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성장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박지원이 위의 손자를 얻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60세로, 경상도 안의현감에 재임 중이었다. 그는 마음 같아서는 곧장 서울로 달려가서 손자를 안아 보고 싶었을 것이나 그럴 수가 없었다. 관찰사나 국와의 허락 없이 임지(臨地)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자가 어떻게 생겼을지 더욱 궁금해지고, 또 누구를 닮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집으로부터 아이의 소식이 담긴 편지가 어서 오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나 오는 편지에는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잔뜩 화가 난 박지원은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손자의 용모에 대해 직접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다.


네 첫 번째 편지에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미목(眉目)이 밝고 수려하다 하고, 두 번째 편지에서는 점점 충실해져서 그 사람 꼴을 갖춤이 자못 초초(艸艸)하지 않다고 하더니, 종간(宗侃)의 편지에도 골상이 비범하다고 했더구나. 대저 이마는 넓고 솟았으며, 정수리는 평평하고 둥근지, 어째서 하나하나 적어 보이지 않는 게냐? 답답하구나.


박지원은 아이를 키우는 데 대해서도 일일이 관심을 기울이고 지시하였다. 어느 아이든지 조금 자라서 걸어다니게 되면 그때부터 말썽꾸러기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비록 어리지만 이때에 기본적인 성격이 형성되기 때문에 누가 어떻게 돌보느냐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차례 제사에 날씨가 아직 더워 방구들이 찌는 듯하니, 아이들도 조양(調養)하기가 몹시 어려운데, 하물며 모든 게 입에 들어갈 물건임에야 어떻겠느냐? 반드시 모름지기 경고(京橋)의 어린 계집종을 빌려 정성껏 바깥채에서 돌보게 하고, 안채 쪽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귀봉(貴奉)이의 술주정은 요즘은 심하지 않으냐? 그 사람은 술만 취하면 망령된 사람이다. 절대로 아이를 안게 해서는 안 된다.


날씨가 더운데다가 제사를 지내느라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 안이 찌는 듯할 것이니 아이를 기르는데 유의해야 하며, 또 모든 물건을 입에 넣을 나이이므로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기를 당부하고 있다. 또 계집종을 빌려 바깥채에서 아이를 돌보게 하고 안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며, 술주정이 심한 귀봉이에게 아이를 안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소한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박지원의 모습을 통하여 조선시대 양반들이 후손의 성장과 교육에 얼마나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생후 1년을 무사히 넘기면 돌잔치를 크게 열었다. 이때 온 가족이 모여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돌이 된 것을 축하하고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를 점치기도 하였다. '돌잡이'가 그것인데, 돌상 앞에 필묵, 옥환(玉環), 인장 등을 늘어놓고 아이가 무엇을 잡는지를 보아 장래 어떠한 인물이 될 것인가를 판단하였다. 아이가 필묵을 잡으면 문인이 되어 문명을 널리 떨칠 것이고, 옥환을 집으면 덕성을 갖춘 인물로 성장할 것이며, 인장을 만지면 관리가 되어 이름을 날릴 것이라 전망하였다. 아이가 무엇을 잡든지 아이에 대한 가족들의 기대가 반영된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김홍도, 초도호연(初度弧宴)/ⓒ국립중앙박물관

색동옷을 입은 아이가 돌잡이를 하는 모습 


조선시대에는 돌잔치에서 책을 써 주는 풍속이 있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아이가 덕성을 갖춘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정성을 담아 아들이나 손자에게 손수 책을 필사해 주었다. 또 돌잔치에 초대된 유명한 하객에게 한두 글자씩을 써 달라고 부탁해서 '천자문'을 제작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돌잔치는 한 아이가 태어나서 무사히 한 해를 넘긴 것을 축하하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이 아이와 유명한 하객이 일종의 연망(聯網)을 맺는 자리였는데, 이때 하객들이 한 글자씩 써서 만들어 준 '천자문'이 바로 그 증표였던 것이다.

실제로 아이에게 '효경(孝經)'이나 '동몽선습(童蒙先習)'과 같은 책을 제작해 주는 사례를 충청도 서산에 세거했던 경주김씨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김노응(金魯應), 1757~1824)은 아들 김도희(金道喜)가 1784년에 돌을 맞이하자 인륜에 밝은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직접 

'효경'을 써 주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아들 김도희가 이제는 아버지가 되어서 자신의 아들 김상준(金商濬)이 돌을 맞이하자 어린 나이부터 오륜을 엄중히 체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몽선습'을 써 주었다. 이는 그가 이 책의 끝에 쓴 다음과 같은 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내아이가 태어난 날에 책을 써서 내려 주는 것은 동방의 풍속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제 삼복더위를 당하여 '동몽선습' 한 책을 땀 흘려 가며 쓰노니, 네 아버지의 애태우는 마음을 생각하고 오륜(五倫)이 가장 엄중함을 체득하고 끊임없이 전진하여 그치지 말며 쉼 없이 부지런하여 더함이 있도록 하라.


돌에 별급문서를 작성해 주는 경우도 많았다. 전라도 부안현에 세거하던 부안김씨 김명열(金命說, 1613~?)은 60세가 다 되도록 친손자를 얻지 못하자 자손이 끊어질까 근심하였다. 그러던 중 둘째 아들 김문(金璊)이 마침 사내아이를 낳으니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어느덧 한 해를 무사히 넘겨 돌을 맞이하자 기뻐서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돌을 맞은 손자에게 써 준 아래의 별급문서에 자세히 쓰여 있다.


나이가 육십이 되었는데도 친손자를 얻지 못하여 슬하가 무료할 뿐만 아니라 후사가 끊어지지 않을까 항상 크게 근심하여 왔다. 막내아들 문(璊)이 비로소 아들을 낳아 이름을 수종(壽宗)이라 하였다. 태어난지 겨우 한 돌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눈썹이 뚜렷한데다 살결이 백옥(白玉)과 눈처럼 뽀얘서 사랑스러우며 용모가 준수하여 장차 크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만일 맏아들 번(璠)이 끝내 자식을 낳지 못하면 당연히 봉사손(奉祀孫)이 될 것이니 그 경사스럽고 다행함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 경사나 즐거움이 있을 때 특별히 재산을 분배하는 것은 관례이다. 다행히 이와 같이 손자를 얻었으니 어찌 별급이 없을 수 있겠는가.


'김수종 별급문기'

전라도 부안에 살던 김명열이 1672년에 손자 김수종의 돌을 맞이하여 약간의 재산을 나누어 주고서 작성한 문서이다. 손자를 얻은 기쁨이 절절히 표현되어 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전 사람들이 타고 다니던 기구로는 수레와 가마가 있었다. 수레와 가마를 구분하는 기준은 바퀴의 유무이다. 바퀴가 있는 것은 수레라 하고 바퀴가 없는 것은 가마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수레는 널리 쓰이지 못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소가 끄는 수레가 보이기는 하지만 그 후로는 수레가 널리 사용되었던 흔적을 찾기 어렵다. 18세기에 박제가(朴齊家)가 '북학의(北學議)'에서 수레의 좋은 점을 열거하며 수레를 사용하자고 열렬히 주장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레의 사용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


무용총 우거도-중국 길림성 집안현 소재 고구려 무용총 벽화 中/ⓒ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렇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운송수단이 발달하려면 그에 맞추어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19세기 초 영국에서 돌을 잘게 부수어 도로를 포장하는 매커덤공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도로의 포장에 커다란 진전이 없었다. 유럽에서도 16세기 후반에 초보적인 형태의 사륜마차가 나타났고, 여럿이 함께 타는 합승마차는 17세기에 가서야 등장했던 것도 도로 포장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도로사정은 땅의 자연적인 상태가 도로에 적합한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평탄한 땅이 넓게 펼쳐져 있으면 수레가 통행하기 쉬웠다. 하지만 한반도 지형은 산이 많고 그에 다라 골짜기도 많아서 바퀴 달린 수레가 통행하기 어려웠다. 우리나라의 고대 전투에서 전차(戰車; Chariot)전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기마전투가 발달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개개인이 들고 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상품을 파는 보부상(褓負商)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것도 수레의 사용이 어려워 물자 운송이 대량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람의 힘만으로 물건을 운반할 수 없을 때에는 소나 말의 등에 물건을 실어 운반할 수는 있으나, 바퀴 달린 수레에 소나 말을 매어 운반하는 방법은 일반화되기 어려웠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수레가 쓰이기는 했지만 사람이 타는 승용보다는 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운송용으로 쓰였다.


그러나 적지만 승용수레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승용수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초헌(軺軒)이다. 초헌은 초거(軺車)라고도 하는데, 바퀴 하나가 달린 높다란 수레를 말한다. 즉 의자에 기다란 끌채가 좌우로 붙고, 의자 아래에는 기둥이 있고, 그 밑에 커다란 바퀴 하나가 달려 있다. 옛날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수레라 하면 말 네 마리가 끌었는데, 초(軺)는 한두 마리 말이 끄는 가볍고 작은 수레를 말했다. 그리고 헌(軒)은 높다란 집을 뜻했다. 따라서 초헌은 사람이 올라타는 부분이 높이 있는 간단한 외바퀴 수레를 말한다.


초헌/ⓒ네이버지식백과



초헌은 1440년(세종 22)에 만든 우리나라 고유의 수레이다. 그래서 중국 사신이 초헌을 보고는 신기해하여 잠시 태워 준 일도 있었다. 이 초헌은 가마와는 뚜렷이 다른 독특한 탈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나 타는 것이 아니었다. 중앙의 육조 판서, 참판이나 지방의 도 관찰사급에 해당하는 2품 이상의 관원이 타는 것이었다. 고위관원뿐 아니라 왕자나 왕의 사위인 부마도 타고 다녔다.


초헌, '기산풍속도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초헌의 기다란 끌채에는 가로로 길게 멍에목을 끼워 앞뒤로 양쪽에서 초헌을 끌고 가므로 초헌을 움직이려면 서너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격이 높은 수레로 높은 벼슬의 상징과 같은 수레였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나 형과 아우가 나란히 초헌을 타고 가는 것을 가문의 영예로 알았다. 그러나 불편한 점도 있었는데, 바퀴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바닥의 진동이 그대로 전해져서 울퉁불퉁한 길에서는 심하게 덜거덕거렸다.


좌거, 김홍도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국립중앙박물관



초헌 외에 흔히 보기는 어려웠지만 좌거(坐車)라는 수레도 있었다. 좌거는 흔히 중국에서 사용되었지만, 중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선에도 있었다. 좌거란 말 그대로 앉아서 타고 가는 수레로, 형태는 가마와 같은데 바퀴가 달려 있고 말이 끄는 것이다. 이는 1786년에 김홍도가 그린 안주목사 부임행렬 그림에 등장한다. 구체적인 모양은 유옥교자(有屋轎子)처럼 지붕과 벽체가 있고, 사면에 휘장이 둘려 있으며, 바퀴가 둘 달려 있다. 가마부분의 옆으로 뻗은 멍에목을 앞뒤로 네 사람이 잡고, 맨 뒤에서 다시 한 사람이 끌채를 잡아 균형을 유지하며 가는 가마형 수레이다. 그러나 이런 수레가 널리 사용되지는 않은 듯하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한 알의 사과 안에는 온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땅의 영양분, 햇볕, 산소, 질소, 비, 농부의 땀이 들어 있습니다.

온 우주가 서로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안에는 그럼 무엇이 들어가 있을까요?


감사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혜민스님-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지금은 자동차와 기차가 잘 포장된 도로와 철길을 달리고, 하늘에는 비행기까지 날아다니니 나라 안은 물론 세계를 돌아다니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예전에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과학기술의 발전결과가 18세기에 산업혁명으로 확산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동하는 방법으로는 그저 걷는 것 외에 말, 나귀 등의 동물을 타고 다니거나, 아니면 사람이 메거나 들어 움직이는 가마나 바퀴가 붙어 있는 수레를 이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이동수단들은 각자 특성에 따라, 경우에 따라 이용되었지만, 신분적 제약을 받기도 했다.

 

말은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용했던 보편적인 승용수단이었다. 말은 도로 사정에 관계없이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고, 기동성이 있어 먼 거리를 빠른 시간에 이동할 수 있으며, 게다가 체구가 커서 그 위에 높이 올라탄 사람은 권위를 과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도 아무나 탈 수 없었다. 지방에서는 특별한 경우 종도 말을 탈 수 있었지만 도성 안에서는 양반신분만이 탈 수 있었다. 만약 노인이나 환자가 아닌데도 일반백성이 소나 말이나 나귀를 타다가 잡히면 탔던 동물을 압수당하고 장(杖) 80대를 맞아야 했다.

 

양반은 먼 거리를 갈 때에는 대개 말을 이용했고, 만약 말이 없으면 세를 내어서라도 말을 타고 다녔다. 양반이 동구(洞口) 밖을 나서면서 말이나 가마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면 양반의 체모가 손상되는 것으로 여겼다.

 

훔쳐보기, 김홍도 《행려풍속도병》/ⓒ국립중앙박물관

 

 

 

양반의 나들이에 말과 함께 따르는 것이 종이다. 종은 말구종을 하기도 하고, 먼 거리를 갈 때에는 짐을 지고 따라나섰다. 그래서 양반이 먼 길을 가려면 육족(六足)이 필요하다고 했다. 말의 발 넷과 종의 발 둘을 합하여 이른 말이다. 말과 종은 항상 함께 따라다녀서 '노마(奴馬)'라는 합성어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말은 상당히 귀한 존재였다. 말을 관리하는 비용도 적지않게 들어 17세기에 이유태(李惟泰)가 '정훈(庭訓)'이라는 집안 살림살이 지침서에 남긴 글을 보면, 소 한 마리가 1년 동안 먹을 곡식으로 콩 한 섬을 준비해 두라고 한ㄴ 반면에, 말은 콩 두 섬에 좁쌀 열 말을 준비해 두라고 하였으니 유지비용이 소의 두 배가 넘었던 셈이다.

 

말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특별한 취급을 받아 발을 절거나 병에 걸리면 말에게 침을 놓아 주는 마의(馬醫)가 다로 있었다. 사람의 질병을 고치는 의학서적으로 '동의보감'이 있듯이 말을 치료하는 책으로 '마의보감(馬醫寶鑑)이 있을 정도였다. 좋은 말을 고르는 법, 말의 건강상태를 알아보는 법, 말을 치료하는 법 등을 수록한 말에 관한 백과사전으로 '마경(馬經)'이 있었고, 그 책의 분량이 너무 많아 이를 간단하게 요점만 추려 편찬한 '마경초(馬經抄)'가 있었으며, 이를 다시 일반백성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한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도 있었다. 말이 얼마나 특별히 취급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국립중앙박물관

 

 

말은 키를 잴 때에 말굽에서부터 등줄기에서 목덜미로 넘어가는 부분에 불룩 솟은 뼈까지의 높이를 손바닥의 폭, 핸드(hand)로 재는데, 14.5핸드 이하의 말을 포니(pony), 즉 조랑말이라 부른다. 14.5핸드는 대략 1.5미터에 해당되는데, 우리나라 말은 10핸드 내지 12핸드의 아주 작은 조랑말이었다. 사실 키가 크고 늘씬한 말은 예전에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 흔치 않았다.

 

우리나라의 조랑말은 유래가 오래되었다.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예(濊)에서는 키가 석 자밖에 안되는 과하마(果下馬)가 있었다 하는데, 말을 탄 상태로 이마를 부딪히지 않고 과일나무 아래로 지날 수 있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904년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미국의 소설가 잭 런던(J. London)은 조선의 말이 어찌나 작은지 뉴펀들랜드산 개보다 조금 커서 자신이 안고 산책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19세기 말에 고종의 행렬을 목격한 비숍(I. B. Bishop)은 고위관리들이 타고 다닌 말도 대개 조랑말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키가 큰 종마를 중국에서 수입하여 큰 말을 얻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조랑말은 비록 왜소하지만 장점도 많았다. 사료는 적게 먹으면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다니는 데는 아주 우수한 성능을 발휘했다.

 

조선시대 조랑말/ⓒ나무위키

 

 

말 외에 타고 다녔던 동물로는 나귀와 노새가 있었다. 나귀는 말보다 기동성이 떨어지고 목덜미에 가까운 허리 쪽 힘이 말보다 약해 군용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다만 짧은 거리를 가는 데는 말보다 간편한 수단으로 종종 이용되었다. 나귀는 말에 비해 체구도 작아 볼품이 없어서 말보다 훨씬 값이 쌌다. "여각(旅閣)이 망하려니 나귀만 든다"는 속담은 예전부터 나귀가 값싼 돌물이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래서 말이 부와 권세를 누리는 관리에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나귀는 검소한 선비에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관직에 오르기 전의 유생들이 나귀를 애용하였다고 한다.

 

한편 암말과 수탕나귀를 교접시켜 낳은 잡종노새나 암탕나귀와 수말을 교접시켜 낳은 버새는 2세를 낳지 못하는 동물이었다. 노새는 말보다도 훨씬 힘이 세어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데 자주 쓰였다.

 

말 외에도 소도 가끔 타고 다니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세종 때의 맹사성(孟思誠), 효종 때의 김육(金堉)이 종종 소를 타고 다녔다 하며,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풍속화에는 소를 타고 장에 가는 아낙네가 종종 등장한다.

 

말이나 나귀는 남자들만 탄 것이 아니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사대붓집 여자들이 얼굴을 너울(羅兀, 나올)로 가리고 나귀나 말을 타고 바깥나들이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여자들이 말을 타고 다니는 풍경은 18세기 풍속화에도 등장한다.

 

연소답청(年少踏靑) 《혜원풍속도첩》/ⓒ국립중앙박물관

 

 

여자들이 말을 탈 때에는 다리를 벌리고 말 등에 오르므로 속바지가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겉치마 위에 커다란 바지를 입고 말을 탔는데 그 겉바지를 말군(襪裙)이라 했다.

 

말군(襪裙) 《악학궤범》/ⓒ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여자들이 언제나 말군을 입고 말을 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세조 때 예조정랑 우계번(禹繼蕃)이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는 취한 채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말을 타고 오는 영접도감사 조숙생(趙肅生)의 처가 말군을 입지 않은 것을 보고는 기생으로 오인하여 말에서 끌어내리고는 말채찍으로 때려 실신시킨 일로 유배된 일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함께보기 : 전통적 이동(운송)수단 가마]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김치에는 각종 양념이 들어간다. 고추, 파, 마늘, 새앙, 부추 등 경우에 다라 여러 가지가 조합되어 참가되는데, 이런 양념들은 우리에게 철분, 비타민, 칼슘을 제공한다. 특히 마늘은 쌀밥을 먹을 때에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 B1의 흡수를 도와 각기병을 막아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양념들이 맛과 향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다.


파슬리, 로즈마리, 육두구, 정향 등의 향신료(香辛料)는 음식의 맛과 향을 돋우기 위해 넣는 첨가물로서, 전세계 여러 민족은 모두 자신들이 즐기는 향신료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초기에 썼던 향신료로는 마늘, 새앙, 겨자, 천초 등이 있었다. '산가요록(山家要錄, 15세기 중엽에 국왕의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가 쓴 요리서)'에는 이 밖에도 정가, 노야기, 분디나무 잎 등 다양한 향신료가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정작 가장 중요한 고추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추는 본래 감자, 옥수수처럼 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을 거쳐 아시아로 건너온 식품이다. 다라서 신대륙이 발견되고 그곳의 물산이 아이사에 전해지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나라에서 고추가 전해지기 전까지 고춧가루의 역할을 대신했던 것이 천초(川椒)가루이다. 천초는 그냥 초(椒)라고도 하며, 촉초(蜀椒)라고도 부르며, 일본에서는 산쇼(山椒)라고 부른다. 천초는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아직도 추어탕에 양념으로 쓰이고 있는데, 추어탕에 매운맛을 내는 짙은 갈색 가루가 바로 천초가루이다.


천초 껍질/ⓒ위키백과


천초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에 자생하는 초피나무 열매 껍질을 말려 가루로 만들어서 양념으로 쓰며, 쌉싸래하고 매운맛이 나는 향신료이다. 허균(許筠)이 지은 음식에 관한 책 '도문대작(屠門大嚼)(1611)에 '초시(椒豉)'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7세기에 천초로 고추장과 비슷한 형태의 장을 담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요록(要錄)'(1680년경)이라는 요리책에도 오이김치를 담글 때에 겨잣가루와 함께 천초가루를 양념으로 쓰고 있다.


초피나무/ⓒ위키백과


그러다가 고려 중기에 우리나라에 후추가 전해졌다. 중국에서는 서역에서 온 물건에 호(胡)자를 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서역에서 온 복숭아처럼 생긴 과일을 호두(胡桃)라고 했듯이 서역에서 온 초(椒)라는 뜻에서 호초(胡椒)라고 부르던 것이 지금의 후추가 되었다.


후추열매/ⓒ학국학중앙연구원


후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입맛을 돋우는 최고의 향신료로 각광받았다. 유럽의 경우 오래 묵은 고기의 누린내를 없애 주는 중요한 향신료로서, 멀리 인도에서 들여오기 때문에 값이 상당히 비싸서 알갱이 수를 세어 팔 정도였다.


후추는 우리나라에는 이인로(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에 처음 보이며, 신안 앞바다 해저에서 발견된 원나라 무역선의 물품 가운데에서도 발견된 일이 있다. 후추는 열대지방의 식물이라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으므로 값이 상당히 비쌌다. 그래서 왕의 하사품으로 등장했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는 일본 사신이 잔칫상에 후추알을 뿌리자 조선의 악공(樂工)과 기녀들이 비싼 후추알을 줍느라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던 일을 소개하고 있다.


유구국(琉球國: 현 오키나와)에서 수입해 오는 후추 값이 너무 비싸고 또 구하기도 어려워서 조선시대 15세기에는 국내에서 재배하려는 노력도 해 보았으나 우리나라 풍토에 맞지 않아 실패했다. 결국 너무 비싸서 음식의 양념으로 쓰기에는 적절치 않아 약재로 많이 쓰였다. 때로는 더운 여름날 후추알을 갈아 물에 타서 마시며 갈증을 가라앉히기도 했으니, 쌉싸래한 맛이 지금의 탄산음료를 마시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발발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 고추가 전해졌다. 고추라는 이름은 고초(苦椒)ㅇ에서 온 것으로, '매워서 열이 나는 초'라는 뜻이다. 고추는 일본에서 온 매운 식품이라는 뜻에서 왜겨자(倭芥子)라고 했고, 때로는 서양 오랑캐 남만(南蠻)에서 들여온 초라고 해서 남만초(南蠻椒), 번초(蕃椒)라고도 했으며, 매운 가지라는 뜻의 날가(辣茄)라고도 불렀는데, 실제로 고추는 멕시코 원산의 가짓과 식물이다.


고추는 아마도 1600년을 전후하여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추에 관한 기록은 1614년경에 편찬된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일종의 백과사전)에 처음 보인다. 그 측에 기록되기로는, 주막집에서 소주 안주로 고추를 놓았는데, 고추가 하도 매워서 그것을 먹고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과장된 이야기로 생각되지만, 새로운 식품 고추가 주었던 강렬한 인상이 그렇게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추를 안주로 먹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당시 기록에도 고춧가루에 관한 내용은 없으므로, 그때의 고추는 말려서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어 양념으로 쓴 것이 아니라 통째로 그대로 식품으로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1670년경에 쓴 '음식디미방'에서도 마늘김치에 고춧가루를 양념으로 쓰지 않고 천초가루를 양념으로 쓰고 있다.


고추가 가루 상태로 양념으로 쓰인 것은 1766년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 처음 보이며, 이때에는 고춧가루뿐만이 아니라 고춧가루로 고추장을 담가 먹는 만초장(蠻椒醬)도 등장한다. 이때부터 우리의 식생활은 엄청난 변화를 겼었다. 서양에서는 근대에 접어들어 일어난 식생활의 혁명으로 18세기의 감자, 포크, 개인접시를 들고 있지만, 우리나라 식생활의 혁명은 고춧가루의 사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추도 김치처럼 우리 식품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가 1980년대에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의 인상을 묻는 질문에 모든 음식이 빨간 것이 인상에 남는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채소와 소금 또는 향신료만으로 만든 김치는 단백질의 부족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예전 김치에는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한 다양한 김치가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치에 육류를 넣은 것이다. 17세기 안동장씨의 '음식디미방'(1670년경)에는 생치김치, 생치지, 생치짠지라는 이름으로 오이김치에 ㅁ라리지 않은 꿩고기, 즉 생치(生雉)를 넣어 만드는 김치가 소개되어 있다. 또 18세기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는 어육(魚肉)김치가 소개되어 있고, 19세기 빙허각(憑虛閣) 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1809)에도 어육김치와 전복김치가 등장한다. 어육김치는 대구, 북어, 민어, 조기 등의 대가리와 껍질을 모아 두었다가 김장 때에 김치에 넣는 것을 말한다. 그뿐 아니라 말린 새우살과 같은 어패류도 김치 만드는 데 활용되었다.


오이에 꿩고기를 넣어 담그는 꿩김치(생치김치)/ⓒ농촌진흥청


그런데 가장 널리 쓰인 단백질을 섭취하는 방법은 젓갈이다. 그래서 '규합총서'에서는 김치 담그는 법에 곤쟁이젓뿐 아니라 조기젓, 준치젓, 밴댕이젓, 굴젓 등 여러 가지 젓갈이 소개되어 있다. 많지는 않지만 김치에 새우젓을 쓰는 사례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19세기에 접어들어 어패류나 고기를 넣어 단백질을 공급하고 맛을 돋우는 고급 김치가 등장했고, 이때부터 젓갈이 김치에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생선은 제철에 한꺼번에 많이 잡은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장하고 조리하여 먹었다. 크기가 커서 볼품이 있는 것은 식해(食醢)를 만들어 먹었다. 생선을 소금에 절이고 좁쌀 따위의 곡물을 첨가하여 발효시켜 먹는 가자미식해, 명태식해 등 여러 가지 식해가 동해안 지방에서 특히 발달되어 있었다.


그리고 크기가 작아 식해를 만들기 적합하지 않은 새우, 멸치 등은 젓갈을 담가 먹었다. 물론 조기젓, 밴댕이젓, 굴젓 등 크기와 관계없이 삭혀서 만든 젓갈들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것들은 액젓을 만들어 먹었다.


젓갈과 액젓은 김치에 첨가되어 김치의 맛을 좋게 하였다. 어패류를 소금에 절여 오래 묵혀 발효시키면 단백질이 차츰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고유의 맛과 향기를 낸다. 2,3개월 숙성시키면 생선뼈가 물러지고 분해되어 흡수하기 쉬운 상태의 젓갈로 변하여 특유의 맛과 향기를 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젓갈은 질 좋은 단백질과 칼슘, 지방질의 공급원이 되었다.


젓갈 가운데 새우젓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조기는 2,3개월 숙성시키면 조기젓이 되고, 1년 이상 숙성시키면 조기젓국이 된다. 한반도 남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멸치도 멸치젓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예전 문헌에 멸치에 관한 기록이 많이 보이지 않으므로 조선시대에는 김치의 젓갈로 많이 쓰이지는 않았던 듯하다.


젓갈이 본격적으로 김치에 사용된 것은 고춧가루와 함께 18세기부터인 듯하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젓갈은 이미 15세기에 김치에 쓰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사례가 많이 보이지 않아 일반화되어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다가 고춧가루가 사용되면서 고춧가루가 젓갈의 산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게 되자 적극적으로 김치 조리에 이용된 듯하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냄비, 후라이팬, 머그컵 등 주방용품을 고를 때 스테인리스 재질의 종류를 잘 몰라 어려움을 겪었던 적 혹시 있으신가요??


저 역시 머그컵에 표시된 스테인리스 재질 표시를 보고 있노라니 그냥 하얀 것은 종이고 까만색은 글자로만 보일 정도로 맨붕이 오고 말았는데요,ㅠㅠ


스테인레스304, sts304, 24종, 27종, 18-10, 18-8

이게 도대체 무슨 뜻??ㅎㅎ;;


그래서 폭풍 검색을 하다 좋은 자료가 있어서 포스팅 해두고 필요할 때 볼려고 합니다.^^ 


자, 그럼 스테인리스 주방용품을 구입할 때 필요한 스테인리스 종류와 등급은 어떤 것이 있는지 한번 볼게요..


가전제품 도어에 사용된 스테인리스/SK매직샵


스텐머그컵 재질 표시(스테인레스304)


STS 18-10(스테인레스304) 이라고 표시된 숟가락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테인리스 종류는 보통 sts400계열과 sts300계열이라고 할 수있는데요, 간혹 sts200계열도 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스테인리스 분류에 따라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분야에 주로 사용되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오스테나이트(Austenite)계

※특징: sts 300계열, sts200계열로 자석에 붙지 않고, 내식성과 내열성, 저온강도가 양호하며, 부식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러한 오스테나이트계 중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은 sts304이며, 자성이 없고 내식성과 내열성, 저온강도가 양호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 주방용품과 의료제품을 비롯해 배관, 자동차 부품, 건축자재, 선박 부품 등에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몰리브덴을 첨가해 고온강를 비롯한 내식성을 강화한 sts316도 있으며 가격이 비싸 주방용품과 같은 곳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간혹 sts200도 볼 수 있는데, 자성이 없는 특성이 있지만 녹 발생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사용에 주의가 필요합니다.(주로 저급 저품질 제품에 사용됨)


2. 페라이트(Ferrite)계

※​특징: sts400계열로 자석에 붙고, 열팽창율이 낮고 내식성, 성형성, 내산화성이 양호하지만 간혹 녹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페라이트계는 sts430이 가장 많이 사용되며, 열팽창율이 낮고 성형성과 내산화성이 우수하여 가전부품, 컴퓨터 부품, 가스레인지, 싱크대, 건축 재료로도 두루 사용되고 있습다. sts430에 구리와 니오븀을 첨가한 430J1L은 내식성, 성형성, 고온 내산화성이 양호해, 주방용품 가전, 전자부품, 자동차 부품 건축자재 등에 사용됩니다. 마르텐사이트(Martensite)계에 속하는 sts410은 고강도와 가공성이 우수해 주방용 칼날과, 스푼, 포크 등의 식기에 보편적으로 사용됩니다.


위와 같이 우리 일상에서 많이 사용되는 스테인리스 스틸의 종류와 특성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지금까지의 내용이 잘 이해되셨나요?

음..아직도 쏙 와닿지 않으신다구요?


아직도 조금 애매하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스테인리스 스틸의 종류별 특성과 등급을 간략하게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① 스테인리스 스틸 종류와 특징


sts304: 자석에 붙지 않고, 녹발생이 거의 없어 주방용품, 의료용품에 주로 사용되며, 27종, 18-10, 18-8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주방용 용기로 가장 적합하고 대표적인 재질


sts316: 자석에 붙지 않고, 내식성이 sts304보다 우수하여 녹발생이 거의 없지만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수도배관, 해안시설물 등과 같은 특정시설물에 주로 사용


sts410: 자석에 붙고, 간혹 녹 발생 가능성이 있지만 강도와 가공성이 좋아 주방용 칼날, 스푼, 포크 등의 식기에 주로 사용


sts430: 자석에 붙고, 간혹 녹 발생 가능성이 있지만 성형성과 내산화성이 높고 열팽창율이 낮아 주방기기, 가전, 전자부품, 자동차 부품, 건축재료에 주로 사용되며, 24종, 18-0으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자석에 붙는 성질로 인덕션 전기렌지용 용기에도 사용됨




② 스테인리스 종류와 등급


sts200 < sts410 < sts430 < sts304 < sts316


이상으로 우리 일상에서 가장 흔히 접하게 되는 스테인리스 스틸의 종류와 특성에 대해서 알아봤는데요, 일반적인 주방용품을 고를 때는 sts304 재질의 스테인리스 제품을 고르는 것이 가장 좋고, 만약 인덕션 전기레인지 전용 용기가 필요한 경우라면 sts400 계열의 스테인리스 제품을 골라야 하겠습니다.


[내용 출처: SK매직샵]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SK매직 히트펌프 전기식 의류건조기(10kg) 렌탈 설치 후기


도로변 아파트라서 그런지 이사온지 3년 가까이 먼지 때문에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게다가 빨래는 깨끗하게 빨았는데, 까만 먼지가 쌓이는 베란다에서 말린 옷을 아이에게 입히려니.....ㅠ.ㅠ 그래서 고민고민을 하다가 이제서야 찾았네요. 신세계를.......

비용도 부담이 없고, 당연히 필요한 물건이니 머스트잇템이 따로 있을까요.....^^*

SK매직샵에서 제품 선택을 하고 경제성을 위해 제휴카드도 고르고.....설치기사님의 연락도 받고.....기다리는 것이....ㅎㅎ.....

드디어 친절한 기사님께서 깔끔하게 위치시켜주시고, 저희는 우선 빨래건조대 접어서 치우고....ㅎㅎ

건조기 정말 잘 돌아갑니다. 이불도 돌릴수 있는 10kg 싸이즈.... 이제 겨울이면 미세먼지도 많아지고 실내 공기도 탁해질텐데.......

이런 걱정은 싹 다 지워버리고 앞으로는 먼지없는 세상에서 뒹굴어보렵니다.

제가 아니고.....제 아이가.........^^*

감사합니다.



의류건조기가 우람하게 자리한 양옆에는 그동안 동고동락한 접이식 빨래건조대와 늘 모서리 구석에만 쳐박혀 있던 소화기가 좌청룡우백호처럼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다......절대로 쓸 일이 없기를.....^^*)



SK매직 히트펌프 전기식 의류건조기 건조 코스/SK매직샵



SK매직 히트펌프 전기식 의류건조기 10kg 화이트

WDR-HM10B/SK매직샵

렌탈료 월 32,900원



SK매직 히트펌프 전기식 의류건조기 10kg 실버

WDR-HM10C/SK매직샵

렌탈료 월 34,900원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우리나라의 문헌에 김치 제조법이 대강이나마 처음 기록된 것은 고려 후기에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은 '가포육영(家圃六詠)'이라는 시이다. 이규보는 여기서 순무를 여름 석 달 동안에는 장에 절여 먹고, 겨울 석 달 동안은 소금에 절여 먹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채소를 장이나 소금에 절여 발효시켜서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치를 소금에 절여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김치의 종류와 재료, 제조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요리서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으로는 15세기 중엽에 국왕의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가 쓴 '산가요록(山家要錄)'이 처음이다.


오이지/© 깊은나무-다음백과


'산가요록'에는 여러 종류의 김치가 소개되어 있다. 순무김치[청침채(菁沈菜)], 오이김치[과저(瓜菹)], 가지김치[가자저(茄子菹)], 파김치[생총침채(生蔥沈菜)]는 물론이고 토란김치[우침채(芋沈菜)], 고사리김치[침궐(沈蕨)], 마늘김치[침산(沈蒜)] 등 여러 가지 김치 담그는 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여름에 속성으로 만들어 먹는 물김치[즙저(汁菹)], 겨울에 무를 이용한 동치미[동침(凍沈)]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15세기의 김치는 지금의 김치와 사뭇 달랐다. 우선 김치의 재료를 살펴보면, 지금은 김치의 가장 일반적인 주재료인 배추가 당시에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농서(農書)나 요리서에서 채소 재배법이나 요리법을 소개할 때에도 배추는 오이, 무, 가지, 동아(冬瓜) 등에 비해 아주 소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고문헌에서 배추는 '숑(숭(崧)]', '숑채[숭채(崧菜)]' 또는 '배채[백채(白菜)]'로 기록되었는데, 16세기의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도 '숭저(崧菹)'가 보이고 '산가요록'에도 '배추김치 담그기'라는 뜻의 '침백채(沈白菜)'가 보이지만 단 한 번 등장 할 뿐이다. 이처럼 김치의 주재료로는 배추보다 오이, 가지, 순무, 동아, 파 등의 채소가 널리 쓰였다.


배추의 품종이 꾼준히 개량되어 제대로 결구가 된 품종이 생산되어 김치 재료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쯤으로 짐작된다. 1800년경에 간행된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 오늘날의 배추김치와 같은 통배추김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과 추위에 강하면서도 맛과 질감이 좋은 배추가 만들어져 본격적으로 김치의 주재료로 쓰이게 된 것은 20세기에 우장춘이 개발한 원예 1호, 원예 2호 배추부터였다.


순무/ⓒ위키백과


그리고 무도 지금과 같은 무가 아니라 순무 종류가 더 많이 쓰였다. 지금의 무는 '댓무'라고 하여 나복(蘿葍)이라고 썼다. 그러므로 나박김치라는 말은 본래는 무김치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댓나무보다는 청(菁)이라고 쓰는 '쉿무', 즉 순무가 더 많이 쓰였고, 기록에도 나복보다는 청이 훨씬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통상 김치라 하면 채소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것을 연상하지만, '산가요록'에는 과일도 김치의 주재료가 되고 있다. 즉 수박, 복숭아, 살구 등의 과일이 김채재료로 쓰인 것이다. 사실 과일과 채소는 식물학의 분류방법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즉 과학이 아니라 문화적인 분류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파파야를 익지 않아 파란 상태에서는 채소로 먹고, 노랗게 익으면 과일로 먹는다. 우리도 토마토를 굳이 채소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토마토는 과일일 뿐이다. 서양사람들은 토마토를 스파게티나 햄버거, 샌드위치의 재료로 쓰니까 채소라고 하지만, 우리는 토마토를 과일로 먹지 조리 재료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15세기의 우리 조상들은 수박, 복숭아, 살구를 채소로도 썼던 것이다. 이때의 김치는 반찬으로 과일을 조리하기 위한 것으로도 쓰였지만, 과일을 오래 저장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전기의 김치에 대한 기록에는 젓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젓갈이 김치에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그전에도 젓갈이 전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5세기 세종 때에 기록에 어린 오이에 곤쟁이젓[자하해(紫蝦醢)]을 넣은 오이김치가 보이고,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쓴 '어우야담(於于野譚)'이라는 책에서도 곤쟁이젓으로 담근 오이김치를 세상에서 '감동(感動)'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하고 있다. 흔치는 않지만 김치에 젓갈을 넣은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가요록'에는 곡물을 넣어 발효시킨 김치가 보인다. 여름에 물김치를 담글 때에 날콩이나 기울을 찧어 만든 덩어리를 가루를 내어 쓰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특별한 김치 외에는 거의 모든 김치에 고춧가루가 쓰이지만 이때는 양념 중에 고춧가루가 없다. 고추는 17세기에 도임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던 김치가 18세기에 접어들어 고춧가루가 양념으로 쓰이고 젓갈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19세기에 배추김치가 크게 확산되면서 다른 나라의 김치와 다른 독특한 김치가 만들어졌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정승모,정연식,전경목,송찬섭]


[함께보기: 초기 김치에 대한 기록]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