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조선시대 500여년 동안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은 겨우 14,000여 명이었다. 따라서 한 해에 겨우 28명 정도만 문과를 통하여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문과에 합격한 후 중앙부서에 대간(臺諫,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을 함께 이르는 말로, 관리를 감찰하고 임금에게 간언을 하던 벼슬)과 같은 청요직(淸要職, 청빈함을 요구하는 중요한 관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를 아우르는 관직)이나 승지와 같은 국왕의 시종관으로 근무하게 된다면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를 배출한 가문으로서도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봉급은 의외로 적어서 그것만 가지고는 생활하기가 곤란하였다. 조선시대에 관리들에게 지급되는 녹봉은 고려시대에 비해 적었는데, 그마저도 갈수록 감소되었다고 한다.

이성원(李性源 1725~1790) 초상-조선후기 홍문관교리, 개성부유수,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관리의 녹봉내력

구분경국대전인조 25년속대전
정1품中米 14石, 糙米 48石, 田米 2石, 黃斗 23石, 小麥 10石, 紬 6匹, 正布 15匹, 楮貨 10張米 14石, 田米 2石, 黃斗 4石米 2石 8斗, 黃豆 2石 5斗
정3품
(당상)
中米 11石, 糙米 32石, 田米 2石, 黃斗 15石, 小麥 7石, 紬 4匹, 正布 13匹, 楮貨 8張米 7石, 田米 2石, 黃斗 2石米 1石 9斗, 黃豆 1石 5斗
정6품中米 5石, 糙米 18石, 田米 2石, 黃斗 9石, 小麥 4石, 紬 1匹, 正布 10匹, 楮貨 4張米 4石, 田米 1石, 黃斗 2石<米 1石 1斗, 黃豆 10斗
종9품糙米 8石, 田米 1石, 黃斗 2石, 小麥 1石, 正布 2匹, 楮貨 1張米 2石, 黃斗 1石米 10斗, 黃豆 5斗

먼저 조선 전기 관리의 녹봉내력을 파악하기 위해 <경국대전>을 살펴보면, 정1품의 관리는 중미(中米 찧거나 쓿어 속겨를 한 차례 벗긴 쌀, 현미보다 더 쓿고 백미보다는 덜 찧은 쌀), 조미(糙未 왕겨만 벗긴 쌀, 현미玄米), 전미(田米 껍질을 벗기지 않을 쌀) 등 쌀 64가마, 콩(黃斗) 23가마, 밀(小麥) 10가마, 명주(紬) 6필, 베(布) 15필, 저화(楮貨 닥나무 껍질로 만든 지폐) 10장을 받았다. 정3품 당상이나 정6품 관리들은 같은 종류의 물품들을 차등 있게 지급받았다. 그러나 종9품의 경우에는 중미와 명주는 아예 지급받지 못하였으며, 그 밖의 것들도 아주 적은 양을 지급받았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실록 등에 의하면, 흉년이 들거나 외국사신들이 자주 왕래하여 국가의 재정형편이 어렵다는 핑계로 실제로는 위 규정보다 녹봉을 적게 지급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왕조 기본법전/ⓒ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인조 25년(1647)에 지급된 녹봉을 살펴보면, 정1품의 경우 전미를 포함하여 쌀 13가마와 콩 10가마였다. <경국대전>의 규정과 비교하면 녹봉의 종류가 크게 줄어들고 양도 급격히 감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1품에게 지급되는 녹봉이 이와 같이 적었으니 그 아래의 관원들에게 지급된 것이 어땠을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더군다나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을 살펴보면 관리들의 녹봉이 더욱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정1품의 경우 겨우 쌀 2가마 8말과 콩 2가마 5말을 지급받았으며, 최하위직인 종9품은 단지 쌀 10말에 콩 5말 밖에 받지 못했다. 이 녹봉으로 고위직은 그럭저럭 살 수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하위직은 분명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 관리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데는 관리들의 적은 녹봉이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속대전(續大典, 경국대전 법령 중 시행할 법령만을 추려 편찬한 통일 법전)/ⓒ국립중앙박물관

한양의 물가가 지방보다 월등하게 높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중앙 관리들은 녹봉만으로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가계의 수입과 지출상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메워 주는 것이 타인들로부터 수수한 선물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서로의 집을 방문할 때 예의의 표시로 선물을 주었다. 심지어는 편지를 보낼 때에도 선물을 동봉하였다. 특히 요직에 있는 중앙관들은 지방의 수령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이 경우 뇌물과 선물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당시 풍조가 선물을 자유롭게 주고받았기 때문이었는지, 어떤 경우에는 선물을 받고도 또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이를 청탁하기도 했다. 1644년 정월에 영의정 김류(金瑬, 1571~1648)가 익산군수 조행립(曺行立)에게 보낸 편지에 그러한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봄날 그리운 생각에 더욱 견디기 어렵습니다. 뜻하지 않게 편지와 아울러 각종의 새해선물도 받았습니다. 더욱 옛정이 변하지 않았음을 알겠으니, 고마움이 갑절이나 됩니다. -중략- 당신 관할 지역에 살고 있는 나주부사를 역임한 김 아무개는 잘 지냅니까? 부디 내가 살아 있다고 전해 주고 또 음식이라도 보내 주어, 이 늙은이 생색이라도 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 편지 속의 별록(別錄)은 죽은 아들의 첩에 관련된 일인데, 관례를 깨서라도 세밀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김류는 조행립이 새해인사와 아울러 보낸 여러 종류의 선물을 받고서 우선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아울러 지인인 나주부사 김 아무개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해 주고 먹을거리를 보내 생색을 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부탁할 것은 죽은 아들의 첩에 관한 일이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와 같이 사적으로 은밀히 청탁하는 일은 별지(別紙)에 작성하였으며, 이를 읽어 본 후에는 뒷날 말썽이 일어나지 않도록 태우는 것이 관례였다. 김류의 경우에도 별록이 전하지 않는 것은 그런 관례 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시에 김류는 영의정에 재임 중이었으니 어느 수령이 청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수령은 비록 지방에 파견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교체되거나 승진하여 중앙의 부서로 돌아갈 관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 간찰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명절이나 절일에 중앙의 고관들에게 선물을 보내어 그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유지하려 하였다.
 
중앙관들은 박봉으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수입과 지출의 차이를 지방 수령들이나 친지들이 보내 주는 선물로 보충해 간 데 비해 지방관, 그중에서도 특히 수령은 그러한 생활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지방 관아에는 수령이 유용할 수 있는 재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관리들은 국왕에게 이를 핑계로 수령에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수령은 자신의 소관 업무만 담당했던 경관과는 달리 사법, 군사, 행정의 모든 일을 혼자서 주관해야 했기 때문에 매우 바쁜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러한 모습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쓴 간찰에 잘 나타나 있다.

동추(同推, 관원이  합동으로 죄인을 추문하는 일)하는 걸음이 아니면 창고를 돌며 조적(糶糴 관에서 쌀을 비축하고 배포하는 일)을 나누는 일로, 비록 한가한 고을이라고는 해도 장부 정리도 때에 맞추어야 하고 공문 처리하기에도 겨를이 없다. 여러 고을이 대부분 같아서, 진실로 덜하고 더한 차이가 없다. 붓을 들고 종이를 펴니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데, 미처 한 글자도 적기 전에 창 밖에서는 형방이 무릎을 꿇고 '하삷오며(爲白乎旀)'나 '저저자자(這這刺刺)' 등의 소리를 내며 읽고 있고, 개구쟁이 아이가 진한 먹에 붓을 적시고 종이 모서리를 비스듬히 잡고 있으니 나는 먹으로 돼지 모양 비슷하게 수십 개의 서명을 바쁘게 한다. 물러나 생각해 보면 앞서 가슴속에 있던 미처 쓰지 못한 한 편의 좋은 문장은 애석하게도 어느새 만 길 지리산 너머로 달아나 버렸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이 간찰에는 관아에서 관속(官屬)들이 각자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분주하고 왁자지껄한 모습과 갑자기 떠오른 좋은 시상(詩想)을 바쁜 업무에 쫓겨 놓쳐 버린 후 안타까워하는 박지원의 모습이 매우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박지원은 수령직에 있는 덕분으로 지인인 남공철과 심상규 등에게 백지 한 뭉치씩을 보내 주고, 친척과 친지에게 요전(料錢, 급료)과 제수전(祭需錢, 제사에 필요한 재료를 장만하는데 사용하는 돈) 등을 줄 수 있었으며, 또 수시로 말린 고기와 볶은 고기, 곶감과 고추장 등과 같은 반찬과 먹을거리 등을 집에 보낼 수 있었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