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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진덕여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은 즉위하자 직접 태평가(太平歌, 진덕여왕이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노래한 것은 사대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제5 '진덕왕 조'에 실려 있는데, 당나라 고종은 이것을 읽고 법민을 대부경大府卿으로 임명해 돌려보냈다고 한다.)를 짓고 비단 무늬를 짜서 사신('삼국사기'에는 진덕왕 4년에 김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을 사신으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을 시켜 당나라에 바치게 했다.

어떤 책에는 춘추공春秋公을 사신으로 삼아 가서 군사를 요청하자, 당 태종이 가상히 여겨 소정방蘇定方을 보내기로 허락했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현경(顯慶, 당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의 연호로 656년에서 661년까지 사용했다.) 이전에 춘추공은 이미 제위에 올랐고, 현경 경신년은 태종 시대가 아니라 바로 고종(高宗) 시대다. 소정방이 온 것이 현경 경신년이니 비단에 무늬를 짠 것이 군사를 청할 때가 아님은 확실하므로 진덕여왕 때가 맞다. 아마도 김흠순(金欽純)의 석방을 요청할 때였을 것이다.

당나라 황제는 이 점을 가상하게 여겨 진덕여왕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권5) 치당태평송/ⓒ한국학중앙연구원

 

위대한 당나라가 큰 왕업을 여니
높고 높은 황제의 계획 창성하여라.
전쟁이 그치니 위엄이 정해지고
문치를 닦으니 모든 임금을 잇는다.
하늘을 통솔하닌 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만물이 빛을 머금는다.
깊은 인(仁)은 해와 달을 짝할 만하고
운수가 요순 시대와 같다.
펄럭이는 깃발은 어찌 그토록 빛나며
울리는 북소리는 어찌 그리도 장엄한가.
나라 밖의 오랑캐로 명을 거스른 자는
칼날에 엎어져 죽임을 당하리라.
순수한 풍속은 어두운 곳이나 밝은 곳에 고루어리고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치네.
사계절은 옥촉(玉燭, 사계절의 기후가 조화를 이룬 것이니 태평한 시대를 말한다.)처럼 화합하고
일월과 오행(七曜, 하늘에 보이는 별 중 육안으로 관찰되고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움직이는 별을 오행과 대응시킨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과 태양 달을 합친 7개의 천체를 말하며 칠요성이라고도 한다.)은 만방을 순행한다.
산의 신령은 보필할 재보(宰輔, '시경詩經-대아大雅' 숭고崧高의 '유악강신維嶽降神:큰 산의 산신령이 내려와  생보급신生甫及申:보씨와 신씨를 낳으셨도다'를 인용한 것으로 보후甫候와 신백申伯 두 사람으로 국가의 동량 즉, 기둥과 들보가 되는 신하를 가리킨다.)를 내리시고
황제는 충성스럽고 진실된 사람을 임명하였네.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이룬 한결같은 덕이
우리 당나라 황실을 비추리라.

 
진덕왕 대에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 있어 남산 우지암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했다. 그때 몸집이 큰 호랑이가 그 자리로 달려들자 공들이 놀라 일어났다. 그러나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며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땅에 던져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아 상석에 앉았지만, 공들은 모두 김유신의 위엄에 복종했다.

 

진덕여왕 때 일화/출처 : https://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26/2009052601483_6.html


신라에는 신령스러운 땅이 네 군데 있었다. 큰일을 의논할 때마다 대신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 의논했고, 그렇게 하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졌다.
신령스러운 땅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亏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진덕왕 대에 처음으로 정월 초하룻날 아침 조례(正旦禮,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진덕왕 즉위 5년의 일이다.)를 행했고, 처음으로 시랑(侍郞)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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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500여년 동안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은 겨우 14,000여 명이었다. 따라서 한 해에 겨우 28명 정도만 문과를 통하여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문과에 합격한 후 중앙부서에 대간(臺諫,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을 함께 이르는 말로, 관리를 감찰하고 임금에게 간언을 하던 벼슬)과 같은 청요직(淸要職, 청빈함을 요구하는 중요한 관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를 아우르는 관직)이나 승지와 같은 국왕의 시종관으로 근무하게 된다면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를 배출한 가문으로서도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봉급은 의외로 적어서 그것만 가지고는 생활하기가 곤란하였다. 조선시대에 관리들에게 지급되는 녹봉은 고려시대에 비해 적었는데, 그마저도 갈수록 감소되었다고 한다.

이성원(李性源 1725~1790) 초상-조선후기 홍문관교리, 개성부유수,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관리의 녹봉내력

구분경국대전인조 25년속대전
정1품中米 14石, 糙米 48石, 田米 2石, 黃斗 23石, 小麥 10石, 紬 6匹, 正布 15匹, 楮貨 10張米 14石, 田米 2石, 黃斗 4石米 2石 8斗, 黃豆 2石 5斗
정3품
(당상)
中米 11石, 糙米 32石, 田米 2石, 黃斗 15石, 小麥 7石, 紬 4匹, 正布 13匹, 楮貨 8張米 7石, 田米 2石, 黃斗 2石米 1石 9斗, 黃豆 1石 5斗
정6품中米 5石, 糙米 18石, 田米 2石, 黃斗 9石, 小麥 4石, 紬 1匹, 正布 10匹, 楮貨 4張米 4石, 田米 1石, 黃斗 2石<米 1石 1斗, 黃豆 10斗
종9품糙米 8石, 田米 1石, 黃斗 2石, 小麥 1石, 正布 2匹, 楮貨 1張米 2石, 黃斗 1石米 10斗, 黃豆 5斗

먼저 조선 전기 관리의 녹봉내력을 파악하기 위해 <경국대전>을 살펴보면, 정1품의 관리는 중미(中米 찧거나 쓿어 속겨를 한 차례 벗긴 쌀, 현미보다 더 쓿고 백미보다는 덜 찧은 쌀), 조미(糙未 왕겨만 벗긴 쌀, 현미玄米), 전미(田米 껍질을 벗기지 않을 쌀) 등 쌀 64가마, 콩(黃斗) 23가마, 밀(小麥) 10가마, 명주(紬) 6필, 베(布) 15필, 저화(楮貨 닥나무 껍질로 만든 지폐) 10장을 받았다. 정3품 당상이나 정6품 관리들은 같은 종류의 물품들을 차등 있게 지급받았다. 그러나 종9품의 경우에는 중미와 명주는 아예 지급받지 못하였으며, 그 밖의 것들도 아주 적은 양을 지급받았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실록 등에 의하면, 흉년이 들거나 외국사신들이 자주 왕래하여 국가의 재정형편이 어렵다는 핑계로 실제로는 위 규정보다 녹봉을 적게 지급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왕조 기본법전/ⓒ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인조 25년(1647)에 지급된 녹봉을 살펴보면, 정1품의 경우 전미를 포함하여 쌀 13가마와 콩 10가마였다. <경국대전>의 규정과 비교하면 녹봉의 종류가 크게 줄어들고 양도 급격히 감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1품에게 지급되는 녹봉이 이와 같이 적었으니 그 아래의 관원들에게 지급된 것이 어땠을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더군다나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을 살펴보면 관리들의 녹봉이 더욱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정1품의 경우 겨우 쌀 2가마 8말과 콩 2가마 5말을 지급받았으며, 최하위직인 종9품은 단지 쌀 10말에 콩 5말 밖에 받지 못했다. 이 녹봉으로 고위직은 그럭저럭 살 수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하위직은 분명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 관리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데는 관리들의 적은 녹봉이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속대전(續大典, 경국대전 법령 중 시행할 법령만을 추려 편찬한 통일 법전)/ⓒ국립중앙박물관

한양의 물가가 지방보다 월등하게 높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중앙 관리들은 녹봉만으로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가계의 수입과 지출상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메워 주는 것이 타인들로부터 수수한 선물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서로의 집을 방문할 때 예의의 표시로 선물을 주었다. 심지어는 편지를 보낼 때에도 선물을 동봉하였다. 특히 요직에 있는 중앙관들은 지방의 수령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이 경우 뇌물과 선물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당시 풍조가 선물을 자유롭게 주고받았기 때문이었는지, 어떤 경우에는 선물을 받고도 또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이를 청탁하기도 했다. 1644년 정월에 영의정 김류(金瑬, 1571~1648)가 익산군수 조행립(曺行立)에게 보낸 편지에 그러한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봄날 그리운 생각에 더욱 견디기 어렵습니다. 뜻하지 않게 편지와 아울러 각종의 새해선물도 받았습니다. 더욱 옛정이 변하지 않았음을 알겠으니, 고마움이 갑절이나 됩니다. -중략- 당신 관할 지역에 살고 있는 나주부사를 역임한 김 아무개는 잘 지냅니까? 부디 내가 살아 있다고 전해 주고 또 음식이라도 보내 주어, 이 늙은이 생색이라도 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 편지 속의 별록(別錄)은 죽은 아들의 첩에 관련된 일인데, 관례를 깨서라도 세밀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김류는 조행립이 새해인사와 아울러 보낸 여러 종류의 선물을 받고서 우선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아울러 지인인 나주부사 김 아무개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해 주고 먹을거리를 보내 생색을 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부탁할 것은 죽은 아들의 첩에 관한 일이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와 같이 사적으로 은밀히 청탁하는 일은 별지(別紙)에 작성하였으며, 이를 읽어 본 후에는 뒷날 말썽이 일어나지 않도록 태우는 것이 관례였다. 김류의 경우에도 별록이 전하지 않는 것은 그런 관례 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시에 김류는 영의정에 재임 중이었으니 어느 수령이 청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수령은 비록 지방에 파견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교체되거나 승진하여 중앙의 부서로 돌아갈 관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 간찰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명절이나 절일에 중앙의 고관들에게 선물을 보내어 그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유지하려 하였다.
 
중앙관들은 박봉으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수입과 지출의 차이를 지방 수령들이나 친지들이 보내 주는 선물로 보충해 간 데 비해 지방관, 그중에서도 특히 수령은 그러한 생활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지방 관아에는 수령이 유용할 수 있는 재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관리들은 국왕에게 이를 핑계로 수령에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수령은 자신의 소관 업무만 담당했던 경관과는 달리 사법, 군사, 행정의 모든 일을 혼자서 주관해야 했기 때문에 매우 바쁜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러한 모습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쓴 간찰에 잘 나타나 있다.

동추(同推, 관원이  합동으로 죄인을 추문하는 일)하는 걸음이 아니면 창고를 돌며 조적(糶糴 관에서 쌀을 비축하고 배포하는 일)을 나누는 일로, 비록 한가한 고을이라고는 해도 장부 정리도 때에 맞추어야 하고 공문 처리하기에도 겨를이 없다. 여러 고을이 대부분 같아서, 진실로 덜하고 더한 차이가 없다. 붓을 들고 종이를 펴니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데, 미처 한 글자도 적기 전에 창 밖에서는 형방이 무릎을 꿇고 '하삷오며(爲白乎旀)'나 '저저자자(這這刺刺)' 등의 소리를 내며 읽고 있고, 개구쟁이 아이가 진한 먹에 붓을 적시고 종이 모서리를 비스듬히 잡고 있으니 나는 먹으로 돼지 모양 비슷하게 수십 개의 서명을 바쁘게 한다. 물러나 생각해 보면 앞서 가슴속에 있던 미처 쓰지 못한 한 편의 좋은 문장은 애석하게도 어느새 만 길 지리산 너머로 달아나 버렸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이 간찰에는 관아에서 관속(官屬)들이 각자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분주하고 왁자지껄한 모습과 갑자기 떠오른 좋은 시상(詩想)을 바쁜 업무에 쫓겨 놓쳐 버린 후 안타까워하는 박지원의 모습이 매우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박지원은 수령직에 있는 덕분으로 지인인 남공철과 심상규 등에게 백지 한 뭉치씩을 보내 주고, 친척과 친지에게 요전(料錢, 급료)과 제수전(祭需錢, 제사에 필요한 재료를 장만하는데 사용하는 돈) 등을 줄 수 있었으며, 또 수시로 말린 고기와 볶은 고기, 곶감과 고추장 등과 같은 반찬과 먹을거리 등을 집에 보낼 수 있었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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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경천묘 신라 제56대 경순왕 어진/ⓒ한민족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소재 신라 제56대 경순왕릉/ⓒ한민족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부는 경순왕의 성과 이름이다. 본문에서 경순왕이라고 해야 하지만 시호를 쓰지 않았다. '왕력' 편에는 경순왕이라고 되어 있다. 내용은 '삼국사기'와 비슷하다.

 

제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은 시호가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후당後唐 명종明宗 이사원李嗣源의 연호로 926년에서 930년까지 사용했다.) 2년 정해년(927년) 9월, 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하여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북 영천)에 도착했다. 경애왕은 고려 태조(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날랜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는데, 구원병이 이르기도 전인 11월 겨울에 견훤이 서울(지금의 경주다.)로 엄습해 왔다. 왕은 비빈 및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이르던 말로, 높은 벼슬 자리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과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느라 적병이 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져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과 공경대부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견훤에게 모두 엎드려 노비로 삼아 줄 것을 애원했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조정과 민간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왕궁으로 들어가 거처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왕을 찾게 했다. 왕과 왕비 및 빈첩 여러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군중(軍中)으로 끌려나왔다. 견훤은 왕에게는 자진하도록 핍박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풀어 빈첩들을 겁탈하게 했다. 그리고 왕의 족제(族弟, 성과 본이 같은 사람들 중 유복친-상복을 입을 수 있는 가까운 친척-안에 들지 않는 같은 항렬의 아우뻘 남자)인 부(傅)를 왕으로 세웠으니, 왕은 견훤에 의해 즉위하게 된 것이다. 왕은 전왕의 시신을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신하들과 통곡했다. 태조는 사신을 보내 조상했다.

 

이듬해 무자년(928년) 봄 3월에 태조가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서울 근교에 도착했다. 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태조를 영접하여 궁궐로 들어가 서로 마주하면서 마음과 예의를 다했다. 임해전(臨海殿, 월지-안압지- 서쪽에 있던 전각)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왕이 말했다.

 

"과인이 부덕하여 환란을 불러들이고 견훤이 불의를 자행하여 국가를 잃게 되었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그러고 눈물을 흘리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목메어 울었으며, 태조 역시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수십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부하 군사들이 정숙하여 추호도 법을 범한 일이 없었다. 도성 사람과 사녀들이 서로 축하하면서 말했다.

 

"지난번 견훤이 왔을 때는 이리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이 온 것은 부모를 만난 것 같다."

 

8월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비단 저고리와 말안장을 선물하고, 여러 신하와 장사(將士)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내려주었다.

 

청태(淸泰, 후당 폐제廢帝 이종가李從珂의 연호로 청태 2년 태조 18년에 해당한다.) 2년 을미년(935년) 10월에 사방의 국토가 전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고, 국력이 쇠약하고 형세가 고립되어 스스로 버틸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왕은 신하들과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신하들의 가부(可否)가 분분해지자 태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存亡)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충신과 의사(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힘써 본 뒤에 할 수 없으면 그만두어야지, 어찌 천 년의 사직을 경솔히 남에게 넘길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고립되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아 이미 보전할 수 없는 형세다. 이미 강성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수도 없는데, 나로서는 차마 무고한 백성들에게 더 이상 도탄의 괴로움을 맛보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시랑(侍郞, 신라시대 관직으로 집사부(執事部)·병부(兵部)·창부(倉部)의 차관직이다.) 김봉휴(金封休) 편에 편지를 보내어 태조에게 항복을 요청했다.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곧장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을 말한다.)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 '화엄경'을 받드는 불교 종파로서 두순杜順, 지엄智儼, 법장法藏의 순서로 계승되었다.)에 귀속해 승려가 되었는데, 이름을 범공(梵空)이라고 했다. 범공은 후에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고도 한다.

 

태조는 편지를 받아 보고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 맞이했다.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 귀순했는데, 아름다운 수레와 훌륭한 말이 30여 리를 연달아 뻗쳐 도로의 길목이 막히고 구경꾼들로 담을 이루었다. 태조는 교외로 나가 그를 맞아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고려)의 정승원政丞院이다.)을 내리고,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주었다. 경순왕은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살게 되었기 때문에, 어미와 떨어져 사는 난새에 비유하여 낙랑공주의 호칭을 신란공주(神鸞公主)로 고쳤다. 시호는 효목(孝穆)이다. 김부를 정승(政丞)에 봉하니 지위는 태자 위에 있었으며, 녹봉 1,000석을 주고 시종과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임용했다. 그리고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고 공의 식읍(食邑,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조세 수입을 독점하도록 한 고을이다.)으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와서 항복하자 태조는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접하고 산신을 보내 말했다.

 

"이제 왕이 나라를 과인에게 주셨으니 그것은 큰 것을 주신 것입니다. 바라건대 종실과 결혼하여 영원히 장인과 사위 같은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의 백부 억렴(億廉, 왕의 아버지인 각간 효종은 추봉된 신흥대왕新興大王의 아우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과 용모가 모두 아름다우니 이 사람이 아니면 내정(內政)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태조는 억렴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이 여인이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다. 우리 왕조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엮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성왕후 이씨의 본은 경주다.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俠州 지금의 경남 합천이다.)의 군수로 있을 때 태조가 이 주에 행차했다가 비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이곳을 협주군(俠州郡)이라고도 한다.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며, 3월 25일을 기일忌日로 하여 정릉(貞陵)에 장사 지냈는데,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바로 안종(安宗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욱郁으로 그의 아들이 고려 제 8대 왕인 현종이다.)이다." 이 밖에 25명의 비와 주(主) 가운데 김씨의 일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논의 역시 안종을 신라의 외손이라 했으니, 사전(史傳)이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조의 손자 경종(景宗) 주(伷)는 정승공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으니, 바로 헌승왕후(憲承王后)다. 이리하여 정승을 봉하여 상보(尙父, 아보亞父와 같은 말로 아버지에 버금간다는 의미다.)로 삼았는데, 태평흥국(太平興國, 북송 태종太宗 조경趙炅의 연호로 976년에서 984년까지 사용했다.) 3년 무인년(978년)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했다. 상보를 책봉하는 고문(誥文)에 이렇게 말했다.

 

"칙(勅)하노니, 희씨(姬氏)의 주(周)나라가 나라를 세운 처음에는 먼저 여망(呂望, 주나라의 어진 신하 강태공姜泰公으로 무왕이 상보로 정한 인물이다.)을 봉했고, 유씨(柳氏)의 한(漢)나라가 시작될 때는 먼저 소하(蕭何, 한나라 고조를 도와 승상이 되었던 공신으로 한신을 고조에게 추천한 일화가 유명하다.)를 책봉했다. 이로부터 천하가 크게 평정되고 기업(基業)이 널리 열렸다. 용도(龍圖, 용마龍馬가 가지고 나온 그림으로, 제왕 출현을 알리는 부서符瑞다.)는 30대를 세웠으며 인지(麟趾, 본래 '시경-주남'의 편명으로 한나라 왕실의 국운이 계승됨을 말한다.)는 400년을 이었으니 해와 달이 아주 밝고 천지가 평안했다. 비록 무위(無爲, 노자는 '무위이치無爲而治'라고 말하며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야지 작위나 형벌 등으로 백성들을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의 군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보좌하는 신하로 말미암아 대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8,000천 호(觀光順化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 政丞 食邑 八千戶)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살고 관직은 왕의 작위를 나누어 받았다. 그 영특한 기상은 하늘에 닿고 문장의 재능은 땅을 흔들 만하다. 풍요로움은 춘추에 있고 귀함은 봉토에 누렸으며, 가슴속에는 육도(六韜)와 삼략(三略, 병서兵書 '육도'는 강태공이 지었고 '삼략'은 황석공黃石公이 지었다고 한다.)이 들어 있고 칠종오신(七從五申, 칠종은 제갈량이 남만의 맹획을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놓아주었다는 고사로 전략의 탁월함을 비유한 것이다. 오신은 삼령오신三令五申의 준말로 군령이 엄한 것을 말한다.)을 손바닥에서 움직였다.

 

우리 태조가 처음으로 우호를 맺어 일찍부터 그 풍도를 알아 때를 가려 부마의 혼인을 맺어 안으로 큰 절의에 순응했다. 국가가 통일되고 군신이 완연히 삼한으로 합쳤으니,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고 아름다운 법은 빛나고 높았다. 상보(尙父) 도성령(都省令)의 칭호를 더하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의 칭호를 주니, 훈봉(勳封)은 과거와 같고 식읍은 이전의 것과 합쳐 모두 1만 호다. 유사는 날을 택하여 예를 갖추어 책명하고 맡은 사람은 시행하라. 개보(開寶, 북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연호로 968년에서 976년까지 사용했다.) 8년(975년) 10월 어느 날."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내의성內議省의 최고직으로 조선의 영의정에 해당한다.)겸 총한림(摠翰林) 신(臣) 핵선(翮宣)은 위와 같이 칙명을 받들어 직첩(職牒)이 도착하는 대로 받들어 시행하라. 개보 8년 10월 어느 날."

 

"시중(侍中, 문하성門下省의 최고직이다.) 서명(署名), 내봉령(內奉令, 내봉성의 최고직이다.) 서명, 군부령(軍部令) 서명, 군부령 무서(無署, 서명이 없다는 뜻), 병부령 서명, 광평시랑(廣評侍郞) 서명, 광평시랑 무서, 내봉시랑(內奉侍郞) 무서, 내봉시랑서명, 군부경(軍部卿) 서명, 병부경(兵部卿) 무서, 병무경 서명,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 상보도성령 상주국 낙랑도왕(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 尙父都省令 上柱國 樂浪都王)식읍 1만 호 김부에게 고하노니 위와 같이 칙서를 받들고 부(符)가 이르거든 받들어 시행하라.

주사(主事) 무명(無名, 이름이 없다는 뜻), 낭중(郎中) 무명, 서령사(書令史) 무명, 공목(孔目, 회계와 공문서를 맡은 아전으로 '서령사'도 마찬가지다.) 무명, 개보 8년 10월 어느 날 내림."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의 박씨(朴氏)와 석씨(昔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 김씨는 금궤에 담겨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고 혹은 금수레를 타고 내려왔다고 하니, 이는 더욱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서로 전하여 실제로 있었던 일로 여기고 있다 다만 그 처음에는 위에 있는 자가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관대했으며, 관직의 설치는 간략했고, 일을 간단하게 시행했으며,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배를 타고 조공하는 사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항상 자제들을 보내 중국 조정(宋)에 숙위(宿衛, 황제를 숙위하는 직무를 말한다.)하게 하고, 공부하게 했다. 성현의 풍토를 이어받고 거친 풍속을 고침으로써 예의의 나라가 되게 했다. 또 당나라 군사의 위엄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여 영토를 취해 군현으로 삼았으니 진실로 그 시절에는 성대했다. 그러나 불법을 숭상하면서도 그 폐단을 알지 못했고, 심지어는 여염 마을에까지 탑과 절을 즐비하게 세우고, 백성들은 달아나 승려가 되어 군사나 농민이 점점 줄어들고 나날이 쇠미해졌으니, 어찌 나라가 어지럽지 않겠으며 또 망하지 않겠는가?

 

이러할 때, 경애왕은 더욱 못되고 음탕하여 궁인 및 신하들과 포석정에 놀이를 나가 술자리를 마련하여 연회를 열면서 견훤이 쳐들어온 것을 알지 못했으니, 문밖의 한금호(韓擒虎, 수나라 노주총관盧州摠管으로 날랜 기마 500명을 이끌고 진나라 공격의 선봉에 섰으며 진나라 후주-숙보叔寶와 장려화를 사로잡았다.)와 누각 위의 장려화(張麗華, 진나라 후주의 귀비貴妃로 지혜로워 후주에게 총애를 받았다.)의 일과 차이가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투항한 것은 어쩔 수 없어서였지만 잘한 일이었다. 그때 만약 힘써 싸워 죽을 각오로 왕사(王師, 고려 태조의 군사를 뜻한다.)에게 대항하다 힘이 미치지 못하고 형세가 곤궁하게 됐다면, 반드시 그 가족은 멸망했을 것이고 무고한 백성에게 해를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궁궐 창고를 봉쇄하고 군현의 문서를 기록해 귀의했으니, 고려 조정에 공이 있고 백성들에게 덕을 크게 베푼 것이다.

 

옛날 전씨(錢氏, 오월왕 전숙錢叔으로, 자기가 다스리던 13개 주를 송나라에 바쳤다.)가 오월(吳越)을 가지고 송나라로 들어가자 소자첨(蘇子瞻,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字다. 소식은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송대의 정치가이자 대문호다.)이 그를 충신이라고 일컬었는데, 지금 신라 왕의 공덕은 그보다 더욱 크다. 우리 태조는 비빈이 아주 많아 자손도 번창했다.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자로 보위에 올랐고, 이후로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음덕이 아니겠는가?"

 

신라가 국토를 바치고 멸망한 후에 아간 신회(神會)가 외직(外職)을 그만두고 돌아와 황폐해진 도성을 보고는 서리리(黍離離)의 탄식(주나라 대부가 주나라 왕실의 몰락을 보고 탄식하여 지은 시로 '시경'의 편명이다.)이 있어 노래를 지었지만, 그 노래는 유실되어 알 수 없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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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소재 경애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55대 경애왕(景愛王, 재위 924~297, 이름은 위응魏膺, 제53대 신덕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제49대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城王后 김씨이다.)이 즉위한 동광(同光, 후당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의 연호로 923년에서 926년까지 사용했다.) 2년 갑신년(924년) 2월 19일, 황룡사에 백좌(百座, '인왕백면좌회仁王百面座會'의 줄임말로 하루에 백 자리를 베푸는 불교 설법 행사다. 신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호국 경전인 '인왕경'이 이 의례에 사용된다.)를 열어 불경을 풀이했다. 아울러 선승(禪僧) 300명에게 공양한 다음 대왕이 직접 향을 피워 불공을 올렸다.

이것이 백좌로서 선(禪)과 교(敎, 참선하는 것을 '선이라 하고 일반적인 불교를 '교'라고 한다.)가 함께 한 시초가 된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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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소재 신라 제42대 흥덕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42대 흥덕대왕(興德大王, 재위 826~836, 41대 헌덕왕 김언승의 동생)은 보력(寶歷, 당唐나라 경종敬宗 이담李湛의 재위기간 825~827년 연호) 2년 병오년(826년)에 즉위했다. 얼마 후 어떤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鸚鵡) 한 쌍을 가지고 왔는데,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자 외로운 수컷이 구슬프게 울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앞에다 거울을 달아 주었다. 앵무새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는 자기 짝으로 여겨 거울을 쪼았는데, 그것이 자기 모습인 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왕이 이를 노래로 지었다 하는데 자세하지는 않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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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사실만 기록한 이 조는 <기이> 편 전체에서 특이한 제목이다. 고운기는 그 당시 이상 징후의 상징적 표현으로 보았다.

제 40대 애장왕(哀裝王, 재위 800~809, 39대 소성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청명淸명, 즉위 후 중희重熙로 개명했다.) 말년인 무자년(808년) 8월 15일에 눈이 내렸다.

 

경북 경주시 동천동 헌덕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 41대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 38대 원성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맏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김인겸金仁謙,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다.) 원화(元和, 당唐나라 헌종憲宗 이순李純의 연호로 806년에서 820년까지 사용했다.) 13년 무술년(818년) 3월 14일에 큰눈이 왔다. 어떤 책에는 병인년으로 되어 있ㅇ으나 잘못된 것이다. 원화는 15년에서 끝나며 병인년이 없다.

 

경북 경주시 서악동 문성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45대 신무왕神武王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종태후定宗太后라고도 불리는 정계부인貞繼夫人이다.) 기미년(839년) 5월 19일에 큰눈이 내리고 8월 1일에 온 세상이 어두컴컴했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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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배반동 효공왕릉/ⓒ문화컨텐츠닷컴

제52대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 제49대 헌강왕의 서자며 어머니는 김씨고 이름은 요蟯다.) 대인 광화(光化, 당唐나라 소종昭宗 이엽李曄의 연호로 898년에서 901년까지 사용했다.) 15년 임신년(912년, 실제로는 주온朱溫의 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이다.)에 봉성사(奉聖寺) 외문(外門) 동서쪽 스물한 칸 사이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또 신덕왕(神德王) 즉위 4년 을해년(915년, 고본古本에는 천우天祐 12년이라 했는데, 정명貞明 원년으로 해야 한다.)에 영묘사(靈妙寺) 안의 행랑에 까치집이 서른네 개, 까마귀 집이 마흔 개 있었다. 또 3월에는 서리가 두 번 내렸고, 6월에는 참포(斬浦,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참포槧浦라고 했으며, 신라의 4독瀆 중에서 동독東瀆으로 중사中祀의 제전祭典에 속한다.-이병도설)의 물이 바다의 파도와 사흘 동안 다투었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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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54대 경명왕릉/경북 경주시 배동/ⓒ문화컨텐츠닷컴

제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 신덕왕神德王의 태자며 어머니는 의성왕후義成王后다.)에 사천왕사 벽화 속에 있는 개가 짖어 사흘 동안 경을 읽어 쫓아 버렸는데 반나절이 지나자 또 짖었다.

 

7년 경진년(920년) 2월에는 황룡사의 탑 그림자가 사지(舍知, 신라시대 17관등 중 16번째 등급의 벼슬) 금모(今毛)의 집 뜰에 한 달 동안이나 거꾸로 비쳤고, 또 10월에는 사천왕사에 있는 오방신(五方神, 동서남북 사방과 중앙을 수호하는 신이다.)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 속에 있는 개가 뛰쳐나와 뜰을 달리고는 다시 벽화 속으로 들어갔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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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팔국의 난 전개도/ⓒ더위키 THE WIKI

제10대 내해왕(奈解王,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이라고도 한다. 재위 196~230)이 자리에 오른지 17년 임진년(212년)에 보라국(保羅國, 지금의 나주지역)과 고자국(古自國, 지금의 고성), 사물국(史勿國, 지금의 사주泗州-사천지역) 등 여덟 나라가 힘을 합쳐 신라의 변경으로 쳐들어왔다. 왕이 태자 내음(㮈音)과 장군 일벌(一伐)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막도록 명령하자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했다.

 

이때 물계자(勿稽子)의 군공(軍功, 전쟁 등에서 얻은 군사상의 공적)이 으뜸이었지만, 태자의 미움을 사 공을 보상받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말했다.

 

"이번 전쟁의 공은 오직 자네에게만 있는데, 상이 자네에게 미치지 않은 것은 태자가 자네를 미워하는 것인데 자네는 원망스럽지 않은가?"

 

물계자가 말했다.

 

"나라의 임금이 위에 계시는데 어찌 태자를 원망하겠는가?"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왕에게 아뢰는 것이 좋겠소."

 

물계자가 말했다.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여 이름을 다투고, 자신을 드러내어 남을 덮는 것은 뜻 있는 선비가 할 일이 아니네. 마음을 가다듬고 다만 때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네."

 

10년(20년의 잘못이다.) 을미년(215년)에 골포국(骨浦國, 지금의 합포合浦) 등 세 나라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갈화(竭火, 지금의 울주다.)를 치자,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했다. 이때 물계자가 적군 수십 명을 베었으나, 사람들이 물계자의 공적을 말하지 않았다. 물계자가 아내에게 말했다.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에 임해서는 자신을 잊고 절조와 의리를 지켜 생사를 돌보지 않아야 충(忠)이라고 들었소. 무릇 보라(지금의 나주羅州지역)와 갈화의 싸움이야말로 나라의 어려움이었고 임금의 위태로움이었는데, 나는 일찍이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용기가 없었으니, 이것은 매우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오. 이미 불충으로써 임금을 섬겨 그 허물이 아버님께 미쳤으니, 어찌 효라 할 수 있겠소. 이미 충효를 잃어버렸는데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과 저자를 왕래하겠소."

 

물계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문고를 지니고 사체산(師彘山, 어디인지 자세하지 않다.)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대나무의 곧은 성질이 병임을 슬퍼하며 그것을 비유하여 노래를 짓기도 하고, 산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에 비겨서 거문고를 타고 곡조를 지으며 숨어 살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삼국유사 권 제5 피은(避隱) 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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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전에 신라인에게 불교는 상당한 거부감으로 다가왔다. 이 조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자비왕의 맏아들로 효성스럽고 겸손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 권3에는 소지마립간이라 했다. 소지왕炤知王이라고도 한다.)이 즉위한 지 10년 무진년(488년)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 그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는데 쥐가 사람의 말을 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라. 혹은 신덕왕神德王이 흥륜사興輪寺에 가서 향을 피우려고(行香-행향은 재를 베푸는 사라이 도량 안을 천천히 돌며 향을 사르는 의식이다.) 하는데, 길에서 여러 마리 쥐가 서로 꼬리를 물고 가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돌아와 점을 쳐 보니 내일 맨 먼저 우는 까마귀를 찾아가라고 하였다는데, 이 견해는 틀린 것이다."

 

왕은 기병에게 명령하여 뒤따르게 했다. 남쪽의 피촌(避村, 지금의 양피사촌壤避寺村이니 경주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렀을 때 되지 두 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기병들은 멈춰 서서 이 모습을 구경하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길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이때 한 노인이 연못에서 나와 글을 바쳤다. 그 겉봉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경북 경주시 남산동 서출지/ⓒ경주문화관광

"뜯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신라인들의 수수께끼 형식의 해학으로서 제유법의 일종이다.)"

 

사신이 와서 글을 바치니 왕이 말했다.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뜯어보지 않고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

 

일관(日官, 삼국시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하던 관리)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란 일반 백성이요, 한 사람이란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뜯어 보니 이렇게 씌어 있었다.

 

"거문고 갑(琴匣)을 쏴라."

 

왕은 궁궐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 속에서는 내전에서 분향 수도(焚修, 모든 불사를 맡아서 행하는 의식이다.)하는 승려와 비빈이 은밀히 간통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주살되었다. 이때부터 나라 풍속에 매년 정월 상해(上亥, 이달의 첫 해일亥日이다.), 상자(上子, 이달의 첫 자일子日이다.), 상오(上午, 이달의 첫 오일午日이다.)일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5일을 오기일(烏忌日, '까마귀를 꺼려 하는 날' 이란 뜻인데, 까마귀에게 찰밥으로 제사 지내는 풍속은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온다. 이 설화는 향찰을 한자어로 보는 데서 생긴 어원인 듯 하다.)로 하여 찰밥으로 제사 지냈는데, 이 풍속은 지금까지도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것을 속어로는 달도(怛忉, 양주동 박사에 의하면 우리말 '설, 슬'과 샛해 첫날을 뜻하는 '설'의 음이 상통하는 데서 온 훈차라고 한다.)라고 하는데, 또한 노인이 나와 글을 바친 그 연못의 이름을 서출지(書出池,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데 현지 사람들은 '양기못'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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