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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주자학이 도입되고 16세기에 주자학이 조선사회에 정착되면서 그 영향력은 가옥구조에도 미쳤다. 16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성리학적 질서와 윤리가 더욱 강화되면서 집의 공간 배치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큰 변화로 남녀 사이에 엄격한 내외법이 적용되고, 양반가옥에서는 여성의 유폐(幽閉)가 이루어졌다.


여자는 중문 밖을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지면서 규모가 큰 양반집에는 여자들이 사는 안채와 남자들이 사는 사랑채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안채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살고 사랑채에는 아버지와 혼인한 아들이 살았다. 뒷간도 여성 전용의 안뒷간과 남성 전용의 바깥뒷간을 다로 두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16세기부터 서서히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똬리집 평면도/ⓒ네이버


일부지역에서는 양반집의 경우 구조도 폐쇄적으로 바뀌어 'ㅁ'자 집이 늘어났다. 예전부터 서울의 중인, 양반 집에서 'ㅁ'자 집을 지었던 주된 이유는 도성 안에 집 지을 공간이 넉넉지 ㅇ낳아 좁은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방으로 확산된 'ㅁ'자 집은 그렇지 않았다. 지방의 집들은 대개 한일자 모양이나 'ㄱ'자 모양의 고패집이 일반적이었는데, 'ㄷ'자 모양으로 바뀌거나 고패집이 'ㄱ'자와 'ㄴ'자 형태로 결합된 맞고패집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공중에서 지붕을 보면 완전히 폐쇄된 'ㅁ'자 형태의 집으로 바뀌었다. 이런 집을 경기도에서는 똬리집,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에서는 뙤새집, 경상북도에서는 뜰집이라고 불렀다. 그런 집들은 중문 안쪽의 안채공간을 폐쇄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사랑방은 주인남자의 기거공간이면서 한편으로는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다. 대문을 들어선 외부손님이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중문을 들어가야 했다. 안채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중문을 열어도 바로 안채쪽이 보이지 않게 통로를 일부러 꺾어놓는다든지, 중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내외벽을 두어 안채를 가리기도 했다. 또 안채 뜰 한가운데는 사철 푸른 상록수를 심어 안채 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하기도 했다. 이렇게 안채를 가리는 풍속은 꽤나 철저해서 19세기 말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여류 지리학자 비숍(I.B Bishop)은 마을에서 어떤 집이 지붕을 고칠 경우에는 온 동네에 지붕을 고친다고 미리 알려야 했다고 전한다.


추사고택 평면도/ⓒ네이버


주인부부의 공간이 분리되면서 아들딸의 공간도 분리되었다. "남녀가 일곱살이 되면 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밥을 같이 먹지 않는다"는 '예기(禮記)'의 가르침에 따라아이들도 딸은 안채에서 키우고 아들은 사랑채에서 키웠다.

 

엄밀한 내외법과 여성의 유폐는 부부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양반집에는 부부가 기거하는 방이 안채, 사랑채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있어서 태종 때 한성부(漢城府, 조선왕조 수도(首都)의 행정구역 또는 조선왕조 수도를 관할하는 관청의 명칭)에서는 부부가 같은 방에서 자지 말고 각각 다른 방에서 자도록 나라에서 강제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17세기까지만 해도 실제 부부는 같은 방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18세기부터는 규모가 큰 양반집에서는 부부가 각각 다른 방에서 자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 때문에 며느리가 기거하는 건넌방과 젊은 아들이 기거하는 작은사랑방을 연결하는 통로를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두어 몰래 성생활을 하게 되면서도 잠은 따로 자게 하는 특이한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유별난 내외법은 차츰 일반백성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세 칸짜리 집에서도 부엌에 달린 방은 여성의 기거공간이 되고, 또 하나의 방은 남성의 작업공간이 되었다. 때로는 툇마루로 이어진 두 방 사이에 벽을 쳐서 부부의 방을 상징적으로 분리시키기도 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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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농촌의 초가지붕은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지붕형태였다. 그리고 산간지방에는 나무를 기왓조각 모양으로 잘라 지붕에 얹은 너와집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럽 산간지방에도 있었고 지붕 위의 너와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돌을 얹어 놓는 방식도 똑같았다.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학기술과 산업의 성장이 미약했던 전근대사회에서는 집을 짓는 재료를 채취하고 가공하여 운송하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으므로 집짓는 재료는 언제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집짓는 주재료가 흙, 나무, 짚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흙은 어느 곳에나 있었고, 산이 많은 지형으로 인해 나무가 풍부했으며, 벼농사를 지어 먹고 살기 때문에 가을걷이 후에 부산물로 나오는 볏짚은 지붕으로 이는 데 쓰였다. 그 밖에 돌, 벽돌이나 기와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돌은 운반과 가공에 상당한 노동력이 들어가고, 벽돌이나 기와는 제조에 여러 공정이 필요한값비싼 건축자재였으므로 제한적으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초가지붕/경주 양동마을


기와지붕은 장식성이 높고 내구성이 좋아 위엄을 갖출 필요가 있는 관아나 절, 부자들이 집을 화려하게 지을 때 쓰였다. 게다가 기와지붕은 불이 나도 곧바로 큰불로 번지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당시의 기와는 불에 구운 기와도 있었지만 진흙을 기포가 생기지 않게 단단하게 반죽하여 그늘에 말린 것이 많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더라도 기와를 만드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과 노동력이 들었다. 더구나 보온성이 좋지 않고, 여름에 비가 내리면 습기를 머금었다가 해가 비치면 습기를 내뿜어 방 안을 덥게 하므로 온습도 조절 기능은 오히려 초가집보다 떨어졌다.


조선시대 집의 지붕은 도시에서도 초가지붕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볏짚은 벼농사를 짓고 나면 손쉽게 얻을 수 있어 가장 값싼 재료였기 때문이다. 고려 때의 개경은 물론이고, 조선 전기의 한양에도 기와집보다 초가집이 훨씬 많았다. 세종 때 도성 안 가호의 1/6에 해당하는 2,400호가 불타 버린 대화재가 일어나 이를 계기로 지금의 소방서와 같은 금화도감(禁火都監)이 창설되었는데, 이때 화재가 쉽게 번졌던 것도 도성 안에 있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느넫다가 대부분이 짚으로 지붕을 얹었기 때문이다.


초가집은 화재에 약하기는 하짐난 장점이 많았다.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훌륭한 보온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 볏짚은 겉이 왁스 성분의 큐티쿨라(cuticula)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빗물이 떨어져도 미끄러져 흘러내리게 하여 두께 한 자 정도만 덮어도 지붕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짚은 속이 빈 대롱 구조로 되어 있어 뛰어난 보온성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지붕재료였다. 때로는 호박이나 박의 덩굴을 지붕에 올려 재배하기도 하여 마치 텃밭처럼 쓰이기도 하였으며, 두툼하고 둥굴게 덮인 초가지붕은 따스하고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집의 골격을 이루는 기둥, 창방, 보, 서까래, 도리에는 물론 나무를 썼다. 나무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재료는 소나무였다. 소나무는 대개 일정한 높이까지 곧게 자라고 대패가 잘 먹어 가공이 쉬우므로 최고의 건축재료였다. 그래서 모든 나무를 소나무와 잡목(雜木) 두 가지로 구분하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소나무가 배를 만들고 관청 건물을 짓는 데 요긴하게 쓰였으므로 함부로 베지 못하게 금송(禁松)정책을 펴서 특별히 관리했다. 안면도 등 몇 군데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소나무숲을 특별히 두어 재목을 조달하기도 했다.


초가집/경주 양동마을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나무가 쓰엿다. 벽은 대개 죄우의 기둥과 위아래 인방 사이에 나무막대로 세로로 중깃을 세우고 중깃 사이에 가로로 가시새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중깃과 가시새 사이에는 쪼갠 대나무나 수수깡, 또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가로세로로 얽어 골조를 만들었다. 여기에 륵에 물을 붓고 짚을 썰어 넣어 이긴 진흙반죽을 붙여서 만들었다.

흙벽은 초가지붕처럼 보온성이 좋아 훌륭한 건축재료였다. 그러나 통풍이 중요한 창고 따위의 특별한 시설물에는 흙이 아니라 나무널을 이용하여 벽체를 만들었다.


흙은 이처럼 건물의 벽체를 이루는 중요한 재료였다. 그뿐 아니라 구들 위의 바닥을 바르는 데도 쓰이고, 기와지붕을 일 때에 지붕을 이루는 널과 기와 사이를 메우는 재료로도 썼다.


담장은 싸리, 수수깡, 대 따위를 세운 바자울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추어진 집에서는 담을 쌓는 데 흙을 이용하여 토담을 만들었다. 중요한 건축물이나 부잣집의 경우에는 바닥에 장판을 하고 벽에 벽지를 발랐으나, 서민들의 집은 대개 바닥을 흙바닥 그대로 마감하고 자리를 깔고 살았다. 물론 벽은 벽지를 바르지 않은 흙벽 그대로였다.


집을 짓는 데 특징적인 것은 부재에 인위적인 가공을 많이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까래는 물론이고 가둥도 반드시 곧은 것만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기둥을 세우 ㄹ대에도 주춧돌을 매끈하게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그 위에 세울 기둥을 주춧돌의 울룩불룩한 면에 따라 깎아서 세우는 그렝이기법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


정원을 꾸미는 데도 인위적인 가공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굳이 있다면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는 정도였다. 담장도 자연경관과 충돌하지 않게 나지막하게 쌓는 것이 원칙이었다. 동양 삼국의 미의식은 각자 개성이 있어서, 중국은 정교하고 화려하며 장대한 것을 즐기고, 일본은 작은 규모로 절제되고 적막한 긴장감의 미학을 즐기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인위적인 것이 지나치게 가미되지 않은 자연스럽고 개방적이며 투박하고 활달한 것을 좋아했다. 그것이 집의 건축양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찹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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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901-7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수원 화성의 건축 보고서)'는 1974년(정조 18) 1월~1796년(정조 20) 8월까지 수원 화성의 성곽을 축조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특히 축성법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축성에 사용한 각종 장비들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당시 40근(약 24kg)의 힘으로 무려 625배나 되는 25,000근(15,000kg)의 돌을 들어올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지는 거중기는 서양의 과학 기술에 정통한 다산 정약용이 서양의 역학기술서인 '기기도설(奇器圖說)-16세기까지의 서양 기술을 최초로 중국에 소개한 책, 스위스 출신 선교사인 테렌츠(Terrenz, J.)가 지음'을 참고하여 제작하였다.

한편, 수원 화성은 원래 10년이 걸릴 것으로 계획을 수립하였지만, 정조가 팔달산에 올라 지시한 축성한 방략인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에 따라 착공 후 32개월 만인 1796년(정조 20)에 완성되었다.


보물 901-7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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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옥


 전통적으로 집의 크기는 칸(間)을 단위로 재었다. 기록으로만 남겨진 집의 크기가 종종 혼동이 되는 것은, 칸이 때로는 건물이 들어선 땅 전체의 넓이, 즉 대지 규모를 말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대지에 들어선 건물의 규모, 즉 건평을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건평의 규모에 사용되는 칸이란 본래 네 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네모꼴의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면적은 일정하지 않았는데, 공간을 이루는 부재의 길이에 따라 길이가 달라서, 한 변의 길이가 작게는 6척부터 크게는 10척까지 들쭉날쭉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 변의 길이가 7.8척 정도를 이루는 공간을 의미했다. 여기서 쓰는 척은 영조척(營造尺)으로서, 한 자의 길이는 시기에 따라 달랐으나 조선 후기에는 대략 31cm 정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한옥


 신라시대에도 그러했지만 조선시대에도 신분에 다라, 또는 관직의 고하에 따라 정해진 규모 이상의 집을 짓지 못하게 규제했다. 예컨대 세종 때에는 대군은 60칸,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 일반서인은 10칸을 넘지 못하게 규제를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는데, 민간에 또도는 말로는 양반집은 최대 99칸까지 지을 수 있다고 하여 구례 운조류(雲鳥樓)가 99칸 규모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렇지만 양반가 99칸은 뚜렷한 근거 없이 떠도는 말이었으며, 실제로 100칸이 넘는 집들도 있었다. 연산군 때 성희안의 집이 40칸 규제를 넘었고, 대군, 공주도 60칸을 넘을 수 없었다지만 인조 때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이 170칸이었고, 숙종 때 왕자 연령군(延齡君)의 혼례를 앞두고 신혼집을 미리 지어 마련했는데, 집터 2,260칸, 기와집 177칸이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부자양반의 집을 살펴보면, 주인남자가 기거하는 사랑채와 주인여자가 기거하는 안채가 따로 있고, 종과 하인이 사는 행랑채가 따로 있었다. 여기에 곡식을 보관해 두는 곳간, 농기구나 허드레 살림살이를 보관해 두는 헛간, 마소를 키우는 마구간, 외양간 등이 덧붙여졌다.


조선시대 초가집


 하지만 일반백성들의 집은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흔히 아주 소박한 집을 '초가삼간'이라고 하는데, 초가삼간이란 두 칸짜리 방 하나에 부엌이 딸린 구조이거나, 한 칸짜리 방 둘에 부엌 하나가 딸리 구조를 말한다. 때로는 여기에 마루 한 칸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그것이 대개 일반평민들의 살림집이었다.

 조건이 아주 나쁜 집으로는 토막집, 움집이라 부르는 집이 있었다. 최근의 발굴결과를 보면,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져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사라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움집이 조선시대에도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집들은 땅을 약간 파고 바닥을 다진 뒤, 그 위에 거적자리 같은 것을 깔아 냉기가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막고 나무, 솔가지, 집 따위로 지붕을 엮어 만든 집이다. 최소한의 살림도구로 살아가는 극빈층은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이런 집에서 살고 있었으며, 이런 움막집은 일제 강점기의 사진에도 보인다. 18세기에 정조가 수원에 갔을 때 그곳 집들을 묘사하면서 달팽이 껍데기 같기도 하고 게딱지 같기도 하다고 하였는데, 그런 집들이 바로 이러한 움집이었을 것이다.

움집 형태/출처: (주)천재교육


 그런데 집의 전체적인 규모는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라도 방 하나하나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대개 방은 한 칸 또는 두 칸 규모였다. 한 칸짜리 방은 대략 사방 2미터 남짓의 방이므로 사람이 누우면 누운 방향으로는 남는 공간이 별로 없었다. 물론 높은 지위와 경제력을 갖춘 계층의 집은 일반서민의 집 방보다는 방 한 칸의 넓이가 더 넓었다. 그러나 두 칸짜리 방이라 해도 현대식 주거와 비교하면 방의 넓이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중세 서양의 가옥은 서민가옥도 이렇게 작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방은 대개 거주공간이 방 하나로 이루어져 모든 가족이 하나의 방 안에 살았고, 그 공간이 개방된 상태로 부엌, 거실, 침실의 구분 없이 쓰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가옥은 서민가옥도 부엌과 방이 벽체로 나뉘어 별도의 공간을 구성했으며, 때로는 침실이 아닌 거실로 마루가 별도로 설비되어 있어서 한 채의 집은 여러 공간으로 구획되어 방 하나하나의 규모가 작았던 것이다. 방의 규모가 이렇게 작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난방 때문이었다. 서양에서는 화로, 벽난로를 두어 방 안에서 불을 때어 복사열이나 공기의 대류에 의해 방안을 따뜻하게 했다. 일본의 경우에도 거실 한가운데를 부분적으로 파서 그곳에 화로 역할을 하는 이로리를 두어 난방을 하고 물을 끓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방 밖의 부엌에서 불을 때어 방의 구들을 뜨겁게 해 간접적으로 방 안을 따뜻하게 했다.


 온돌은 방바닥을 따뜻하게 하고 적은 연료로 오랫동안 방을 따뜻하게 하는 데는 세계 어떤 문명권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효과적인 낭방법이었다. 예컨대 일본의 다다미방과 비교하더라도 한옥의 온돌은 월등히 우수한 난방방법이었다. 그러나 온돌에도 약점은 있었는데, 따뜻한 방바닥에는 벼록과 같은 벌레가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방바닥이 아닌 실내 전체를 따뜻하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웃풍이란 온돌방식의 난방이 안고 있는 약점이었다. 한옥에서 창문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아주 작고, 방문도 허리를 구부리고 드나들 정도로 작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방바닥만이 아니라 방 안 전체를 따뜻하게 하려면 방의 면적을 작게 하고 지붕의 높이도 낮추어야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집의 방 크기가 작게 된 원인이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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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43호 산수 봉화무늬 벽돌/국립중앙박물관]



충청남도 부여군 외리에서 출토된 7세기 백제 사비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총 8종류의 문양전 중 산수 산수문전은 2종류가 출토되었는데, 보물 343호  '산수 봉화무늬 벽돌'은 자연풍경을 소재로 하여 도식화된 산, 나무, 물, 바위, 구름이 잘 표현돼 있다.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의 안정된 구도와 산과 구름의 곡선적 표현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표현 기업에 원근법이 나타나는 등 백제 회화의 단면을 볼 수 있는 백제미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두 전돌이 기본적으로 자연풍경을 소재로 하고, 표현 기법 또한 유사하지만 상단의 봉황무늬와 구름의 표현 및 배치가 달라 각각 색다른 느낌을 준다.

처음 발견 당시 바닥에 깔린 상태였으며, 문양의 위와 아래가 엇갈린 채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후대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재배치한 것으로 보이며, 함께 발견된 8종류의 문양전과 함께 크기는 대체로 한 변이 29cm 정도이고, 두께가 4cm 내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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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43-3호 산 경치 도깨비무늬 벽돌/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43-3호 산 경치 도깨비무늬 벽돌(산수귀문전)은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외리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8종의 백제시대 무늬 벽돌 중 하나로써, 가운데 도깨비 모양을 중심으로 아랫쪽에 산경치를 문양으로 표현했다.

도깨비 모양은 동그랗고 부릅뜬 눈과 날카로운 송곳니, 손발톱, 불꽃무늬 갈기 등으로 무섭고 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보기에 따라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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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쇠로 만들어 절대 뚫을 수 없는 상태를 두고 '철옹성 같다'라고 부른다.

그런데, 말로만 듣던 우리나라에 철옹성이 있다는 사실.

바로 현재 북한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영변성은 철옹성이라고도 하며,

유명한 김소월의 시 '진달래'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한 곳으로 북한에서 사적 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철옹성(영변성)/출처:http://blog.daum.net/brettyu226]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위치한 성으로 철옹성은 전체 둘레가 12.5km로 본성(8km), 약산성(1km), 북성(2km), 신성(1.5km) 4개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약산성과 본성은 고구려시대에 축성되었고, 신성(1683년)과 북성(1684)은 조선 숙종때 축성되었는데, 철옹성은 고구려때 처음 쌓고 후대에 오면서 계속 보강해온 고구려식 성이다.


철옹성은 그 말처럼 거란, 몽고, 홍건적, 병자호란 등을 걸치며 수차례의 공격에도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진짜 '철옹성'이다.


[철옹성(영변성) 남문 만노문(萬努門)/출처: 민족대백과사전]


[철옹성(영변성) 남문 만노문(萬努門)/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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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훼손되기 직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들..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 붕괴사고 현장, 성벽 한쪽이 허물어져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1927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면서 이전되기 전의 모습.

 

창덕궁의 원래 위치인 보루각에 있을당시의 물시계 모습(하단부)

 

창덕궁의 원래 위치인 보루각에 있을당시의 물시계 모습(상단부)

 

1929년 건춘문 일대로 옮겨진 광화문에서 바라본 경복궁 동쪽 전경과 건춘문, 동십자각의 모습, 왼쪽 중학천의 모습과 반대편에 빽빽히 들어선 민가들이 보인다.

 

1935년 경복궁 건천궁 터에서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짓기 전 지진제를 지내는 모습, 일본의 전통 신도의 절차에 따라 제를 지내고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이 제를 올리고 있다.

 

1922년 일본 도쿄에서 살던 영친왕(이은)과 영친왕비(이방자) 일행이 일시귀국해 희정당으로 들어서는 모습

 

맨앞이 순정효황후,영친왕(이은)과 영친왕비(이방자)가 차례로 창덕궁 후원을 거닐고 있다.

 

경복궁의 자경전에 새겨진 꽃문양

 

일시 귀국한 영친왕 일행이 동경으로 다시 돌아가기전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복궁 근정전 주변의 모습, 지금과는 달리 전각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다. 

 

경복궁 자경전의 모습,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1867년 조대비를 위해 지은 전각 이후 두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고종15년(1888년) 재건되었다.

 

창덕궁 인정전 앞모습, 일제에 의해 박석들이 파헤쳐지고 있다. 대한제국 문무고관들이 황제에게 하례를 하던 상징적인 공간이 일제에 파괴되고 있다.

 

지금도 경복궁이건 창덕궁이건 조선의 궁궐을 방문을 해보면 원래의 모습과 많은 차이가 있다. 이전 사진들에서 보듯 빽빽히 들어찬 전각의 모습들은 이제 그 터만 남긴채 빈터로 남아있다. 치욕의 역사인 일제강점기 상징적인 국가의 중심 공간이던 궁궐은 그 수난을 피해가지 못한채 뜯기고 헐리고 원형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조금이나마 복원이 진행되었고, 또 진행계획이 일정부분 잡혀있다는 것이다. 비록 예전 원래의 모습을 100% 되찾기는 사실상 불가능 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원형에 가깝게 복원이 되면 웅장하고 자랑스럽던 옛 궁궐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니 복원이 끝나는 그날이 기다려진다.

복원 작업이 잘 진행돼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으로 남게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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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금 KBS 드라마 '정도전'이 인기리에 방영이 되고 있습니다.

'정도전'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던 최영 장군, 조선의 태조가 되는 이성계 장군,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삼봉 정도전 등..

이런 인물들 중에 단연 포은 정몽주 선생의 고려를 향한 충심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포은선생의 충심은 조선의 3대 국왕이 되는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한 답으로 지었다는 '단심가'로 대표되며,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라고 시작하는 시구는 우리들의 뇌리 속에 아주 강하게 남아 있어 이번 '정도전' 이라는 드라마에서 포은 선생의 고려를 향한 충심은 어떻게 그려질지 사뭇 궁금하게 만듭니다.

 

아래는 영천시에 위치하고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임고서원 입니다.

임고 서원에 가면 포은정몽주 선생과 관련된 유품 유물들도 함께 만나볼 수 있고, 옛서원의 모습과 새로 지어진 서원의 모습이 조화롭게 배치 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상세정보(영천시 문화관광)

포은 정몽주 임고서원은 고려말의 충신은 포은 정몽주(鄭夢周)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8년(1553) 부래산(浮來山)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36(1603)에 중건되었다.
인조 21년(1643) 여헌 장현광(張顯光)선생을 배향하고 정조11년(1787)에는 지봉 황보 인 선생을 추향하였으나 고종 8년(1871)서원 철폐령으로 췌철되었다. 1965년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봉향하고 있으며 1980년 보수·정화되었다. 또한 1990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기존의 서원 옆에 새로이 서원을 세워 웅장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현재는 옛서원과 새로 지은 서원이 공존하고 있다. 포은 정몽주선생은 고려충숙왕 복위6년1337)현 임고면 우항리에서 일성부원군 운관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 전법, 판도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대명국교(對明國交)에도 큰공을 세웠다.

고려 삼은의 한사람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은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4년(1392)이방원의 문객 조영규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이후 조선태종 원년(1401)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변볼거리

경주김씨지사공종택, 선원동철불좌상, 환구세덕사

 

 

 

 

[사진출처:브로드몰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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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풍루]

[아직까지 원형이 잘 남아있는 1.3km의 토성 둘레] 

[달성공원 입구]


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4m정도이며, 둘레는 약 1,300m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의 중심세력이 성장하여 초기적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경주의 월성처럼 평지에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초기 성곽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쌓았고, 성벽 윗부분에는 큰 돌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후대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조선시대 전기까지 군대의 창고가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성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지대에는 돌방무덤(석실분)이 많이 흩어져 있고, 무덤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대구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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