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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국립중앙박물관

보물 귀형문전(鬼形文塼, 도깨비 문양 벽돌)은 충청남도 부여군 외리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8종의 백제시대 무늬 벽돌 중 하나로써, 연화대(蓮花臺, 연꽃 모양으로 만든 불상의 자리) 위에 정면으로 서 있는 도깨비 형상이 새겨져 있으며, 약간 연질로 구워진 것이 특징이다. 대각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것 처럼 몸의 크기에 비해 머리 부분이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벌거벗은 상태에서 허리에는 과대(銙帶)가 둘러져 있는데 대금구(帶金句, 띠꾸미개, 금속제 허리띠)와 대선금구(帶先金具, 띠고리의 반대쪽 끝에 달린 장식)가 잘 표현 되어 있다.

크게 부릅뜬 눈과 정면을 향해 포효하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데, 덥수룩한 수염과 양어깨에 휘날리는 갈퀴, 그리고 양손과 발도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이런 문양전의 성격이나 제작기법은 대체로 중국 남조(南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 남조시대의 유물 중 동진(東晉) 영화4년(永和四年, 348)의 명문(銘文)이 있는 중국 난징(南京) 출토 전과 신녕전와창제1호묘(新寧塼瓦廠第一號墓)의 와전(瓦塼)과 매우 깊은 관련을 보여 준다.

 

반대로 일본의 나라(奈良) 난호케사(南法華寺)에 소장되어 있는 벽전(壁塼)과 오카사(岡寺) 출토 봉황문전(白鳳時代, 1변 39㎝, 두께 8.8㎝) 등은 백제 문화와 관련되어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보여 준다.

 

[함께 보기 : 산수귀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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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618-6호 국새 제고지보(制誥之寶)/ⓒ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618-6호 국새 제고지보(制誥之寶)/ⓒ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618-6호 국새 제고지보(制誥之寶)/ⓒ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618-6호 국새 제고지보(金製制誥之寶, 금제 제고지보)는 1897년 고종에 의해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만든 국새(國璽) 10과 중 하나로 황제의 명령을 백성에게 알리는 문서나 고급 관원을 임명할 때 사용한 것으로 대한제국기 황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조선왕실의 어보가 거북이 모양의 귀뉴를 사용했던 것과 달리 중국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용모양을 한 손잡이인 용뉴와 얕은 받침인 유대, 글자가 쓰인 보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신에 쓰인 글자인 '제고(制誥)'라는 말이 '황제의 명령'을 뜻하는 것으로, 곧 이 국새는 조선왕실이 아닌 황제로 칭한 대한제국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국새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제고지보는 한일강제병합이 이뤄지고 6개월 후인 1911년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일본 궁내청으로 들어갔다가 광복 후인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이 궁내청으로 들어간 국새를 환수해 중앙행정기관이었던 총무처로 인계하였는데, 안타깝게도 6.25전쟁을 거치며 행방이 모연하게 된다. 그러다 다행히도 1954년 경남도청 금고에서 제고지보가 발견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다.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칙명지보', '대원수보'와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다.
 
크기
가로 11.1cm X 세로 11.1cm
 
[함께 보기 : 국새 칙명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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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6호 '개성 경천사 터 십층석탑(1962 지정, 開城 敬天寺址 十層石塔)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 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문화재 수난사를 대표 한다고 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로 1907년 순종의 가례에 일본 특사로 온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야키(田中光顯)가 주민들과 당시 군수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한밤중 밀반출이라는 불법 약탈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에 '대한매일신보'는 10여차례 이상의 기사와 논설로 석탑 약탈에 대한 불법성을 알리게 되고, 다행히도 '코리아 리뷰(Korea Review)'의 발행인인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의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Ernest T. Bethell)의 지속적인 기고를 통해 결국 계속되는 반환 여론을 조성하게 되었고, 1915년 11월 15일 국내로 반환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적인 문제로 재건은 보류되었고, 40여년 간 경복궁 회랑에 보관되어 오다 1962년 비로소 국보 86호로 지정되고,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재개관에 맞추어 현재의 전시실에 석탑의 불법 반출 이후 100여년 만에야 비로소 재조립 되어 웅장한 위용을 다시 드러내게 됩니다.

경천사 10층석탑 구조 설명/ⓒ기호일보

석탑의 제1층 옥신 이맛돌에 조탑명(造塔銘)이 새겨져 있으며 '지정 8년(至正八年)'이라는 기록을 통해 고려 충목왕 4년(1348년)에 석탑이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당시의 정치적 환경으로 말미암아 중국탑의 영향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이어 평면 사각형의 석탑 또는 새로운 양식으로 다각(多角) 석탑이 나타나는데, 이런 것과 달리 특수한 형태를 보이는 것이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입니다. 평면과 부재의 구조 등에서 각기 특수한 양식을 보여주고 전체의 균형이 아름다워 주목되는 탑이며, 기단 평면은 아자형(亞字形)으로 3단을 이루고 있으며, 탑신부는 1, 2, 3층이 기단과 같은 평면이지만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4층부터는 탑신이 사각형을 이루었는데 층마다 옥신(屋身, 층과 층 사이를 이루는 몸돌) 밑에는 난간을 돌리고 옥개(屋蓋) 밑에는 다포집 양식의 두공(枓栱, 전통적인 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들기 위해 기둥 위에 복잡하게 엮은 일종의 결구물) 형태를 조각하였습니다. 윗면에는 팔작지붕 형태의 모양과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으며, 기단과 탑신에는 불, 보살, 인물, 용, 천부(天部, 불상의 분류에서 여래, 보살, 명왕에 이어서 최하위에 놓여진 존상의 총칭으로, 제천부, 천이라고도 한다.) 등이 빈틈없이 조각되어 장식이 풍부하고 조각수법이 상당히 정교한데, 이런 형태의 석탑이 조선시대 초기에 다시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유례가 없는 희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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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618호 국새 칙명지보/ⓒ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618호 국새 칙명지보/ⓒ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618호 국새 칙명지보/ⓒ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681호 국새 칙명지보(國璽 勅命之寶 또는 금은제 칙명지보金銀製 勅命之寶)는 1897년 10월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고종이 서울에 있는 환구단(圜丘壇,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에 올라 대한제국이라는 국호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이후 기존의 조직과 관직, 제례 등을 황제국의 품격에 맞도록 다시 만드는 조치를 하였는데, 그 중 하나의 조치로 새롭게 만들어진 국새이다. 따라서 기존에 사용해왔던 거북이 장식을 버리고 황제를 상징하는 용의 형상을 넣어 장식하였으며, 천은(天銀, 순도가 100%인 은을 십성은十成銀 또는 천은天銀이라고 한다.)에 금을 도금하여 만들었다. 국새를 허리에 찰 수 있도록 만든 끈 장식인 인수(印綬)는 잃어버린 상태이며, 일제강점기 후 일본에 빼앗겼던 국새와 어보(御寶,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예물로 보통 왕·왕비·왕세자 등 왕실의 의례용 도장을 통칭한다.)는 해방 후 총무처에서 관리하다 625전쟁 당시 많이 잃어버리고 현재는 대원수보(大元帥寶, 군대 운영과 관련된 업무에 사용), 제고지보(制誥之寶, 고급 관원의 임명에 사용), 칙명지보(勅命之寶, 통신조서에 사용) 3개만이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크기

가로 9.2cm X 세로 9.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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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270cm 크기의 통일신라시대 유물이다.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과 함께 감산사 절터에서 수습되었으며,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제작 연대와 제작 동기를 확실히 알 수 있는데, 719년 김지성(金志誠, 652~?, 통일신라의 문신. 67세에 집사부 시랑에서 물러나고, 은퇴한 뒤 감산사를 창건하고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또한 미륵보살의 유가론을 연구하였으며, 노장사상에도 심취하였다고 한다.)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감산사를 지었으며, 미륵보살과 아미타여래를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미륵보살입상의 신체와 광배는 하나의 돌로 제작하였으며, 별도로 제작한 대좌와 결합시킨 형태로 만들었다.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보관의 중앙에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중생의 근기에 따라 변화되어 나타난다는 의미의 화불(化佛)이 있다.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살이 올라 있고 눈과 입에 미소가 어려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 불상의 목 부분에 표현되는 세 개의 주름으로 번뇌도(煩惱道), 업도(業道), 고도(苦道)를 의미함)가 뚜렷하며, 목걸이, 팔찌, 영락 장식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법의가 얇아 신체의 풍만하고 유려한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표현이 사실적이고 관능적인 모습을 한 통일신라 8세기 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함께보기: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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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은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275cm 크기의 통일신라시대 유물이다.

제작 연대가 확실한 유물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연대에 있어 기준이 되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 나발(螺髮, 불상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의 머리카락. 나계(螺髻)라고도 함)이 있고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상투처럼 우뚝 솟아오른 혹과 같은 것. 불정(佛頂)·무견정상(無見頂相)·정계라고도 함)가 크고 편평하다. 다소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미간백호상(白毫,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이라고도 함) 구멍이 있다. 법의(法衣, 세 가지 법의인 삼의(三衣), 곧 가사(袈裟)를 일컬음. 승복(僧服)•승의(僧衣)•법복(法服)이라고도 함)가 얇게 표현되어 있어 전체적인 몸의 곡선이 잘 드러나는 형태이다. 마치 물결치듯 U자 모양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이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두 다리까지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광배는 거신광, 두광, 신광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은 8세기 신라 불상의 정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1915년 경주 감산사터에서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옮긴 것이다. 광배와 대좌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 졌으며, 광배에는 719년 김지성(金志誠, 652~?, 통일신라의 문신. 67세에 집사부 시랑에서 물러나고, 은퇴한 뒤 감산사를 창건하고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또한 미륵보살의 유가론을 연구하였으며, 노장사상에도 심취하였다고 한다.)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감산사를 지었으며, 미륵보살과 아미타여래를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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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327호 '정덕십년 명석조지장보살좌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손에 보주를 들고 바위 모양의 대좌에 앉아있는 형태의 지장보살상으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제작된 지장보살상에 흔히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준다.

불상의 제작연대도 나타나 있는데, 대좌 뒷면에 음각된 8행 49자의 글귀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데, 음각 글귀 가운데 '정덕 10년 을해 3월일(正德十年乙亥三月日)'이라는 내용으로 제작 연대가 1515년임을 알 수 있다.

불상 전체를 금으로 얇게 입혀 제작했지만 일부에서 붉은 칠이 남아 있으며, 상체에 비해 결가부좌한 다리가 빈약하게 표현되어 비례상 다소 불안정한 느낌이 들게 한다.


보물 1327호 정덕십년 명석조지장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7호 정덕십년 명석조지장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7호 정덕십년 명석조지장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7호 정덕십년 명석조지장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7호 정덕십년 명석조지장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7호 정덕십년 명석조지장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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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57호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은 상층 기단 면석에 글자 크기 4cm의 탑 이름이 해서체(楷書體, 자형이 가장 똑바른 한자 서체의 한 가지)로 새겨져 있는데,끝에 태평 11년(太平十一年)의 연호 및 연대가 나타나 있다. 여기서 태평은 중국 요(遼)나라의 연호로, 1031년(고려 현종 22)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이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탑을 해체 복원하면서 탑의 내부에서 '太平十一年歲次辛未正月四日高麗國尙州界知京山府事任若木郡內巽方在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태평11년세차신미정월4일고려국상주계지경산부사임약목군내손방재정도사5층석탑조성형지기)'라 쓰여진 백지묵서(白紙墨書)의 형지기와 아울러 녹유사리병(綠釉舍利甁)·동합(銅盒) 등의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는데, 이 '조성형지기(造成形止記)'에 따르면 당시 승려 지한의 주도 아래 이 지역 향리와 백성들이 국가의 평안, 전쟁의 종식, 풍년을 발원하며 세운 탑이라고 한다.

글 문투에는 이두식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 탑 자체에 관해서는 물론이지만 이두 연구에도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탑은 원래 2층 기단에 5층의 탑신이 올라간 형태인데, 현재 5층 지붕돌은 없어졌고, 상륜부(相輪, 불탑 꼭대기에 있는,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 부분)의 장식 받침인 노반(露盤, 탑의 꼭대기에 있는 상륜의 한 부분)은 남아있다.

1층 기단에는 코끼리 눈을 본 떠 만든 무늬가 새겨져 있고, 2층 기단부터 탑신까지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1층 몸돌에는 문짝과 자물쇠 모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깨끗하면서도 아름다운 느낌을 주며, 지붕돌은 4단 받침대 추녀 밑으로 낙수홈(물을 아래로 내려보내기 위한 홈)이 있다.

보물 357호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57호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57호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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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8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강원도 회양군 장양면 장연리에서 출토된 고려시대(13~14세기) 유물로 높이 15.5cm 크기의 보살좌상이다.

보살좌상의 전체적인 형태를 보면 매우 화려하게 표현돼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화려한 보살상은 고려 후기 원나에서 전해진 라마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밀교적 성격의 동시대 불상 양식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삼면두식(三面頭飾, 삼면보관 三面寶冠이라고도 하며, 정면과 좌우측면에 꽃무늬 등의 장식을 붙인 것으로, 보살상 특유의 두부 장식의 한 형식)을 쓰고 있으며, 관의 가운데에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중생의 근기에 따라 변화되어 나타난다는 의미의 화불(化佛)이 표현돼 있다. 빗어 묶은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 온화한 미소를 띠는 얼굴표정은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을 주며, 화반형의 큰 귀고리를 하고 있다. 상의는 입지 않은채 어깨에는 천의(天衣)를 두르고 있는데, 큰 구슬로 장식된 길다란 목걸이가 상반신을 가리며, 허리에 두른 띠를 지나 세 겹의 홑잎 연꽃이 장식된 대좌까지 늘어져있다.


보물 18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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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28호 '금동약사불입상(金銅藥師佛立像)'은 8세기 후반 통일신라 시대 작품으로 높이 37cm 크기이다.

약사불은 보통 한쪽 손에 둥근 약단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약사불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여러방향에 머무르는 부처를 표현한 사방불에서 동방에 머무르는 부처로 표현된다.

둥근 약단지를 들고 있는 약사불은 갖은 질병을 고쳐주고 재난에서 벗어나도록 하며 음식과 옷을 제공하는 등 여러 고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현실세계와 가장 가까운 부처라고 할 수 있다. 부처가 되기 전 보살이었을 때는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것을 포함한 12가지 큰 소원을 지녔고, 부처가 되고 난 후에는 동방에 위치한 유리광세계를 다스리게 되었다고 한다.

보물 328호 '금동약사불입상(金銅藥師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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