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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는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게 암살 당하기 전 술을 마시고 말을 거꾸로 타고 선죽교로 향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왜?




포은 정몽주는 낙마해 크게 다친 이성계를 병문안하고 정황을 살피고 귀가하던 중, 개성에 있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유명한 이방원의 '하여가'와 포은선생의 '단심가'는 바로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 삼아 정몽주와 이방원이 만났을 때 서로 주고 받았던 시조입니다.

나와 함께 대업을 이루자는 이방원과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정몽주 간에 당시 팽팽했던 대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내용이죠.



하여가 (何如歌)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 (丹心歌)- 정몽주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그가 이성계 집을 방문한 것은 이방원이 계략을 써서 그를 초청했다고도 하는데,

이때 이미 이방원은 심복부하 조영규를 시켜 쇠뭉치를 꺼내 선죽교 다리 밑에 숨었다가 정몽주가 지나갈 때 쳐서 죽여버려라 하고 지시하였고, 정몽주는 변중랑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다고 합니다.


조영규와 무사들이 나타나자 그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하여 말을 타고 이성계의 자택을 떠났지만, 돌아오면서 친구 집에 들러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라고 했다는데요, 말을 끄는 사람이 정몽주 선생이 술이 너무 취해 그러는가 하고 의아해 물으니


부모님으로 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찍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정몽주는 곧 닥쳐올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던 거죠.


포은 정몽주(1337~1392)


그 말을 이해 못한 마부는 말을 끌고 선죽교로 향했는데, 선죽교를 넘으려 할 때 멀리 숨어 있던 궁사가 정몽주를 저격하여 넘어트렸고, 순간 조영규가 이끄는 고여, 조평 등 5~6명의 괴한이 나타나 부상당하고 도망치는 정몽주를 쫓아가 철퇴와 철편으로 때려 암살했습니다.

이때 그가 조영규, 고여, 조평 등의 철퇴에 맞고 흘린 피가 개성 선죽교의 교각에 일부 묻었는데, 후일 백범일지에 의하면 1945년 이후 김구선생이 선죽교를 방문할 때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선죽교에서 정몽주가 암살을 당한 후 선죽교 돌 틈에서는 대나무가 솟아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후 이 다리는 원래 선지교라고 하였으나 다시 선죽교로 이름이 바뀌어졌고,

당시 정몽주의 나이는 향년 56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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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기대승에게 보내는 이황의 편지글 '답 기명언(答 奇明彦)'

 요즘 보내신 두 번째 글의 가르치을 받고, 먼젓번 제 편지에 말이 소략하고 그릇된 곳이 있음을 알았기에 삼가 수정하여 고친 글을 앞에 써서 괜찮은지 여쭙고, 뒤에 바로 두 번째 글을 이어서 보내니 밝혀 회답해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성과 정을 구분하는 논의는 선대의 유학자들이 자세히 밝혔으나, 오직 사단과 칠정에 대해서는 그것이 모두 정이라고만 했을 뿐, 이(理)와 기(氣)를 나누어 말한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정지운이 천명도를 만들면서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나의 뜻에도 역시 그 분별이 너무 심하여 분쟁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기에 순선(純善)과 겸기(兼氣) 등의 말로 바꾸었습니다. 그 뜻을 말씀드리자면 대체로 서로 도와서 연구하여 밝히고자 함이며, 그 말에 흠이 없었다 함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변설을 보니, 잘못을 지적하여 타일러 줌이 자세하니 깨우침이 더욱 깊습니다. 그러나 아직 미혹됨이 있기에 시험 삼아 말씀드리니 바로잡아 주시기를 청합니다.

 사단이 정이고 칠정 또한 정으로 다 같은 정인데 어찌하여 사단과 칠정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겠습니까. 보낸 편지에 이른바 자사와 맹자가 각각 주장하여 말한 것이 같지 않다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理)와 기는 본래 서로 기다려 체(體)가 되고 용(用)이 되어 진실로 이(理) 없는 기없고, 기없는 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장한 말이 이미 서로 틀리니, 또한 분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예부터 성현들이 이 두 가지를 논할 때에 어찌 꼭 혼합하여 한 가지 설로만 분별없이 말하였겠습니까. 또 성(性) 한 글자를 말씀드려도 자사는 이른바 천명의 성[天命之性]이고 맹자는 이른바 성선의 성[性善之性]입니다. 이 두 성(性) 자가 가리키는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차 이기가 부여한 가운데에 나아가 이 이(理)의 근원을 가리켜 말함이 아닙니까. 그 가리키는 바가 이(理)에 있고 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순수하고 순선하고 악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理)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성이 기를 겸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성의 본연이 아닌 것입니다.

 자사와 맹자는 도체의 온전한 것을 환히 들여다보고 이와 같이 말했는데, 그것은 기를 섞어서 성을 말하면 성의 본래 상태가 선하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후세에 정호, 정이, 장재 등의 여러 선생들이 나온 뒤에야 기질의 성[氣質之性]에 관한 논의가 있었으나 그들 또한 자사나 맹자의 말씀에 더 보태려고 한 것이지 다른 의견을 세우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리켜 말한 바가 사람이 태어난 뒤에 있는 것이니 역시 순수한 본연의 성[本然之性]으로 일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일찍이 정에 사단칠정의 구분이 있는 것은 마치 성에 본연과 기질의 다름이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을 이와 기로 나눌 수 있다면 정 또한 이와 기로 나누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부끄러워하고, 양보하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어디에서 움직이는가 하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성에서 발동하는 것이고,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은 어디에서 발하는가 하면, 외물이 사람의 형기에 접촉되어 사람의 마음속에서 움직여 나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단의 발동을 맹자가 일찍이 마음이라고 말했으니 마음은 분명 이(理)와 기의 합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켜 말한 것이 이(理)를 기준으로 한 것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성이 순수하게 마음속에 있으므로 불쌍히 여기고, 부끄러워하고, 양보하고, 잘잘못을 가리는 네 가지 마음이 그 실마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 칠정의 발동을 정자가 이르길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주자는 이르기를 "각각 마땅한 바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틀림없이 칠정은 이(理)와 기를 겸한 것입니다.(하략)

[퇴계집(退溪集) 권17, 서(書),답기명언(答奇明彦)/동양철학산책/김교빈 최종덕 김문용 전호근 김제란 김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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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도담삼봉에 있는 정도전 동상/출처: Steve46814 at ko.wikipedia.com]


 정도전(1342~1398)의 호는 삼봉(三峯). 자는 종지(宗之), 본관은 봉화로서 아버지는 정운경(鄭云敬)이고 어머니는 우연(禹淵)의 서녀(庶女)이다. 당시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362(공민왕 1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375(우왕 1)년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관리로 임명된 것에 반발하였다가 나주로 귀양갔다.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권력을 잡자 그의 천거로 요직에 등용되었다. 이듬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공신에 책봉되었다. 1391(공양왕 3)년 과전법(科田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반대파의 탄핵으로 봉화로 유배되었다가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한 뒤 중앙으로 복귀하였다. 이 해에 조준(趙浚), 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강씨의 둘째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군사와 재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조선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1396년 명나라에서 외교 문서의 내용을 문제삼아 정도전에게 명나라로 입조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거부하였다. 1397년 요동 정벌을 주도하였으나 이듬해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정도전의 삼봉집(三峯集)

위로는 음양을 조화롭게 하고 아래로는 서민을 편안하게 하며, 안으로는 백성을 밝게 다스리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진정하고 무마하는 것이니 국가의 포상과 형벌이 여기에 관련되며 천하의 정치와 명령이 여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진 삼봉집/한국학중앙연구원]


'삼봉집'은 정도전의 사상과 정치적 지향을 담고 있는 책이다. 우왕 말년에 작성된 권근(權近)의 서문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처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1397(태조 6)년에 아들 정진(鄭津)에 의해 증보 간행되었는데, 이 때까지는 서문이 중심이었다. '삼봉집'은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중간되었다. 1465(세조 11)년에 손자 정문형(鄭文炯)이 '경제문감(經濟文鑑)',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불씨잡변(佛氏雜辨)', '심기리편(心氣理篇)', '심문천답(心問天答)' 등을 추가하여 간행하였다. 이어 1481(성종 18)년에는 정문형이 시부(詩賦) 100여 수와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추가하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1791(정조 15)년에 왕명에 따라 성종대의 판본을 정리하여 다시 간행하였는데, 현재 전해지는 판본의 대부분은 정조 때 간행된 것이다.

 '삼봉집'은 모두 1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1에서 권 4까지는 각종 시문과 악장(樂章)이며, 권 5는 '불씨잡변', 권 6은 '심기리편'과 '심문천답', 권 7은 진법(陣法)과 습유(拾遺), 권 8은 부록, 권 9와 권 10은 '경제문감', 권 11과 12는 '경제문감별집', 권 13과 권 14는 '조선경국전'이다.

 이것을 다시 분류하면 대체로 시문(詩文), 경세서(經世書), 사상서(思想書), 병서(兵書), 악장(樂章) 등 다섯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삼봉집'은 고려를 대신한 조선 국가의 사상적, 법제적 기초를 닦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불교를 대신하는 성리학의 이념적 위치를 확립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불씨잡변'은 고려 말에 활발히 제기된 배불론을 집대성한 것이면서 종래의 단선적 비판을 넘어 체계적 비판을 시도한 것이다. 물론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제시된 비판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성리학의 우위를 제시한다는 정치적 목적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논리가 일방적 성향을 띠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한 체계적 비판은 성리학의 정착을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후 기존 이념에 대한 비판의 수준을 넘어 당대의 이념으로서 그 내용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한편 법제적 관점에서 보면, 15세기 조선 국가 체제 정비의 초석을 놓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조선은 태조대에 '경제육전'의 편찬을 시작으로 육전 체제에 입각한 법전의 정비를 모색하였고, 이것은 영구히 지켜 나갈 법전으로서 '경국대전'을 반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조선경국전'은 바로 법전에 입각한 국가 운영이라는 정책 지향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이는 육전의 내용 중에서도 '헌전'을 특히 강조하며 후서(後序)를 덧붙인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삼봉집'은 조선 국가의 중심 이념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과 법전 체제의 바탕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실제 조선 당대에 지성사적으로 높이 평가받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정도전이 태종과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제거되었던 사정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후대의 학인들은 정치적 측면에서 정도전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따라 '삼봉집'도 주목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까지 '삼봉집'에서 제시한 조선 국가 체제의 이념적 원리가 부정된 것은 아니었다. 1791(정조 15)년에 왕명으로 '삼봉집'이 다시 간행된 것은 주목되는 부분이다. 정조는 1785(정조 9)년에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여 법전 체제의 재정비를 도모한 바 있다. '삼봉집'의 재간행도 그러한 관심의 한 반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에서 '삼봉집'은 조선 일대에 걸쳐 국가 체제의 토대가 된 저작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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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율곡 이이(1536~1584)/네이버 두산백과]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의 대표적인 주자학자로 강원도 강릉의 외가에서 태어나 어머니 신사임당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13세에 초시에 급제하고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마친 뒤 19세가 되던 해에는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는가 하면 23세에는 당대의 노사숙유(老士宿儒)로 일컬어지던 이황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그해 겨울에는 별시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했는데 이때의 담압지가 유명한 '천도책'이다.

 이이는 비교적 젊은 시절 중앙의 정치 무대에 나간 이래 20여년 동안 이조좌랑,호조판서,부제학,대제학 등 국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아울러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 십만양병론을 주장하면서 각종 화약 무기를 개발하고 전함을 건조하여 왜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유성룡 등의 유학자들로부터 아무 일도 없는데 병력을 양성하는 것은 그자체가 화근이라고 비판을 받았지만 나중에 전쟁이 일어나자 선견지명을 가진 성은으로 찬양받기도 했다.

 

[사진 초충도/어머니 신사임당은 학문과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다./네이버 공부에미친16인의조선선비들]

 

 이이는 49세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성학집요(聖學輯要)'와 '격몽요결(擊夢要訣)'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그 외에도 정치, 경제, 교육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뛰어난 방책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어 1577년 저술한 '격몽요결'은 초학자들을 위한 성리학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데 충실한 내용과 완성도 높은 체제를 갖추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성현이 되겠다는 뜻을 세워야 한다는 입지장(立志章), 나쁜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혁구습장(革舊習章), 올바른 몸가짐을 강조한 지신장(持身章), 책을 읽4는 방법을 논의한 독서장(讀書章),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논한 사친장(事親章) 등 모두 10장으로 구성 되어 학문의 목적부터 구체적인 방법과 실천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논의하고 있어 조선시대 내내 초학자들의 필독서로 여겨졌다.

 이 책의 입지장에서 그는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성인(聖人)과 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뜻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여기에서 그의 학문관이 주자학의 정신을 철저히 이어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그는 이치는 따져 보지 않고 단지 스승의 설이라고 해서 믿고 따르는 독경주의를 비판하고 스스로 의미를 찾는 자주적인 학풍을 주장했다. 그는 이런 학풍에 입각하여 이황에게 다른 사람의 견해를 모방하는 경향이 있음을 비판하고 아울러 "주자라 할지라도 정말 이(理)와 기가 상대해서 각각 발출한다고 생각했다면 주자 또한 잘못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자주적인 학풍을 중시했다.

 또 그는 벗이었던 성혼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논쟁을 진행했는데 이는 학국철학사상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일어난 사단칠정 논쟁과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논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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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네이버]

 

 원효대사에게 깨달음을 준 유명한 일화 

 의상은 속성이 박씨로 계림부의 사람이다. 약관의 나이에 당나라에 교종이 성행한다는 말을 듣고 원효 법사와 함께 서쪽으로 유학할 뜻을 품었다. 본국의 해문 당주의 경계에 이르러 큰배를 구하여 바다를 건너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중도에 궂은비를 만나게 되었다. 결국 길가의 작은 토굴 사이에 몸을 숨겨서 바람과 비를 피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서로 보니 오래된 무덤의 해골 옆이었다. 하늘에서는 아직도 계속 비가 오고 땅은 진창이어서 조금도 나아가기 어려워서 머무르지도 나아가지도 못하여 또 연벽(무덤 속 통로에 깔려 있는 벽돌) 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밤이 아직 깊지 않았는데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괴이한 짓을 하였다.

 원효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전에 잘 때는 작은 토굴이라고 생각하여 편안하였는데 오늘 밤에 머무를 때는 귀신들이 사는 곳에 의탁했다고 생각하니 흉조가 많구나. 그러니 마음이 생겨나므로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므로 작은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겠다. 또 삼계는 오직 마음이고 만법은 오직 의식이어서(三界唯心, 萬法唯識)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원효는 마침내 뒤돌아 짐을 챙겨 본국으로 돌아갔다. 의상은 홀로 길을 가면서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총장 2년에 상선을 타고 등주 해안에 도달하였다.[송고승전(宋高僧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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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 들어선 조선왕조는 건국과 함께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워 고려 때까지의 지배적인 이념이었던 불교를 비판하는 한편 국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유교경전에 근거하여 기본법제를 정비하는 등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건설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과 권근 등을 비롯한 관학파 유학자들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정도전은 왕조의 성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로 조선을 기본적으로 유교적 윤리규범에 의해 통제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이상을 품고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제도 정비에 기여하는 한편 '불씨잡변' 등의 저술을 통해 불교를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다. 또 권근은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지향하는 조선왕조의 성립 후 당시까지의 주자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이해한 대표적인 학자로 '입학도설'이나 '오경천견록' 등의 저술로 조선 초기 주자학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권근의 글씨, 〈 해동명적〉에서, 규장각 소장, 백과사전/한국브리태니커]

 

 이들 관학파 유학자들은 조선조가 성립하는 데는 크게 공헌했지만 그런 공헌을 발판으로 중앙권력을 독점하면서 경제적으로는 대토지 소유자로서 기득권층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도덕적인 타락과 함께 권력의 남용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15세기 무렵에 이르면서 이들 대토지 소유자들은 무차별적으로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중소 지주들과의 갈등과 마찰이 극에 달했다. 이름은 물론이고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그 세력이 비대해졌다. 결국 당시 군주였던 성종은 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껴 김종직을 비롯한 중소 지주 출신 신진 유학자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로 인해 김종직을 비롯한 지방 출신 주자학자들이 중앙의 요직을 차지하고 기존의 세력과 대립하는 국면이 조성되었고 그로 인해 정치세력 또한 둘로 나뉘게 되었는데, 전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훈구파이고 후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사림파이다.

 

 사림파의 진출로 궁지에 몰린 훈구파는 연산군이 즉위하고 나자 김종직이 생전에 세조의 왕위찬탈을 빗대어 비판한 '조의제문'을 썻다는 사실을 빌미로 삼아 1498년 김일손 등을 죽이고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는 등 비이성적인 대응으로 사림파를 탄압하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무오사화이다.

 

[조광조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백과사전/한국브리태니커]

 

 이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림파 유학자들은 지방 향촌 사회를 기반으로 꾸준히 성장하였으며, 이후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자 이들은 다시 중앙의 정계로 진출하여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대표가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일군의 사림파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사헌부, 사간원 등 언론 관직을 통해 정계로 진출하여 기존의 공신들을 비판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일종의 추천제인 현량과를 통해 자기 세력을 중아으로 진출시키고, 지방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주자가 손질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군현마다 시행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급진적인 개혁은 또 다시 기득권 세력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역모를 뒤집어씌워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파 유학자들을 희생시켰다. 이 사건이 기묘사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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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사진 백과사전]

 

 퇴계 이황(李滉)은 조선 초기의 혼란기였던 연산군 시대에 좌찬성 식(埴)의 7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며, 12세때 작은 아버지에게서 '논어'를 배웠고 20세경에는 건강을 해칠정도로 성리학을 익히는데 몰두했다고 한다. 1527년(중종2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재했으며,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후에 여러 관직을 거친 후 1549년 낙향해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연산군때 태어나 중종, 인종, 명종, 선조의 5대에 걸친 정치적 격동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태어나기 3년 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네 살이 되던 해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특히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는 정암 조광조가 희생당한 중종 때의 기묘사화를 직접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마흔다섯 살 때 일어난 을사사화에는 자신의 형이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고 자신도 삭탈관직을 당했기 때문에 사화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가 권신들에 의해 좌절되는 현실을 목도하고 은둔을 결심하여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 동안 도산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강학하였는데, 그의 치열한 학문적 열정은 동시대 많은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 스스로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퇴계이황 동상/사진 백과사전]

 

 그의 학문적 축적은 저술뿐만 아니라 당시 학자들과 교환한 편지글 속에 남아 있다. 그중 정자중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주자의 글을 읽으면서 "마치 바늘이 몸을 찌르는 것처럼, 잠자다가 갑자기 확 깨는 것처럼" 절실하게 느꼈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의 주자학에 대한 치열한 탐구심을 엿볼 수 있다.

 이황의 저술 중 대표적인 것들로는 '성학십도', '계몽전의', '주자서절요'와 다량의 서간문을 들 수 있으며, 대부분 '퇴계집'에 실려있다.

 

 이런 퇴계 이황의 철학 사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기대승과의 논쟁을 통해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사단칠정' 논쟁이다. 이 사단칠정 논쟁은 한국철학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이며, 그 발단을 보면 학자 정지운이 작성한 '천명도(天命圖)'를 이황이 수정하면서 정지운이 "사단은 이(理)에서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 것이다(四端發於理 七情氣之發)"로 고치자 이에 대해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라 이황과 기대승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입장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이다.

 이 논쟁은 두 학자 간의 개인적 논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큰틀에서 보면 당시 학계에 주자학의 이기론과 심성론에 대한 두가지 다른 해석방식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논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이 논쟁을 통해 조선의 주자학은 주자학의 기본이론인 이기론과 심성론을 결합시킴으로써 중국 주자학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독자성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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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永平(후한 명제 유장劉莊의 연호) 3년 경신년(60년)- [탈해왕9년] 8월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 서리를 지나다 시림(구림鳩林 이라고도 함) 속에서 카다란 빛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하늘에서 땅까지 자줏빛 구름이 드리워지고 구름 속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에 황금 상자가 걸려 있었다. 상자 안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고 나무 밑에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고 왕이 숲으로 가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바로 일어났는데,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기 때문에 알지閼智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탈해왕9년(65년)에 시림에 닭의 신이한 변화가 있어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고 고쳐 부르고 국호로 삼았다고 한다] 알지는 향언鄕言으로 어린아이['아기' 라는 뜻으로 해석] 라는 뜻이다. 왕이 알지를 수레에 싣고 대궐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이 서로 뒤따르면서 춤을 추었다.

 왕이 길일을 가려 태자로 책봉했으나 나중에 파사왕에게 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金氏로 정했다. 알지가 세한勢漢(이병도는 알지와 동일인물로 파악함) 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가 구도俱道(혹은 구도仇刀라고도 함)를 낳고, 구도가 미추未鄒를 낳았다. 미추가 왕위에 오르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 부터 시작되었다.(삼국유사)

 

이 설화는 박·석 양씨보다 먼저 경주에 정착했으나, 정치적으로는 그후에야 비중이 커지게 된 김씨 부족이 그들의 토템인 닭과 조상을 연결시켜 만들어낸 것으로 추측된다. 근래에는 'Ar'부족, 즉 '금'(金)부족의 족장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의 7대손 미추이사금 때부터 신라 왕족에 김씨가 등장했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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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萬海,卍海) 한용운(한유천),시인]

 

 

오직 민족을 위해 살다간 민족시인, 만해 한용운의 유명한 술회 내용..

 

나는 왜 중이 되었나?

 나는 왜 중이 되었나? 내가 태어난 이 나라와 사회가 나를 중이 되지 아니치 못하게 하였던가? 또는 인간 세계의 생사병고 같은 모든 괴로움이 나를 시켜 승방에 몰아넣고서 영생과 탐욕을 속삭이게 하였던가? 대체 나는 왜 중이 되었나? 중이 되어 가지고 무엇을 하였나? 무엇을 얻었나? 그래서 인생과 사회와 시대에 대하여 어떠한 도움을 하여 왔나? 이제 중이 된 지 20년에 출가의 동기와 그동안의 파란과 현재의 심경을 생각하여 볼 때에 스스로 일맥의 감회가 가슴을 덮는 것을 깨닫게 한다.

 나의 고향은 충남 홍주였다. 지금은 세대가 변하여 고을 이름 조차 홍성으로 변하였으나, 그때 나는 어린 소년의 몸으로 선친에게서 나의 일생운명을 결정할 만한 중요한 교훈을 받았으니, 그는 국가 사회를 위하여 일신을 바치는 옛날 의인들의 행적이었다. 그래서 마냥 선친은 스스로 그러한 종류의 서책을 보시다가 무슨 감회가 계신지 조석으로 나를 불러다가 세우고 옛사람의 전기를 가르쳐 주었다. 어린 마음에도 사상에 밫나는 그분들의 기개와 사상을 숭배하는 마음이 생기어 어떻게 하면 나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 보나 하는 것을 늘 생각하여 왔다. 그러자 그해가 갑진년 전해로 무슨 조약이 체결되어 뜻있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경성을 향하야 모연든다는 말이 들리었다. 그래서 좌우간 이 모양으로 산속에 파묻힐 때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하루는 담뱃대 하나만 들고 그야말로 폐포파립(弊袍破笠)으로 표연히 집을 나와 서울이 있다는 서북 방면을 향하여 도보하기 시작하였으니, 부모에게 알린 바도 아니요, 노자도 일푼 지닌 것이 없는 몸이며, 한양을 가고나 말는지 심히 당황한 걸음이었으나 그때는 어쩐지 태연하였다. 그래서 좌우간 길 떠난 몸이매 해지기 전까지 자꾸 남들이 가르쳐 주는 서울길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날은 이미 기울고 오장의 주림이 대단하게 되자 어떤 술막집에 들어 팔베개 베고 그 하룻밤 자느라니 그제야 무모한 걸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의구가 일어났었다. 적수공권으로 어떻게 나랏일을 돕고 또한 한학의 소양 이외에 아무 교육이 없는 내가 어떻게 소지를 이루나, 그날 밤 야심토록 전전반측하며 사고 수십 회에 이를 때에 문득 나의 아홉 살 때의 일이 유연히 떠오른다. 그것은 아홉 살 때 [서상기]의 통기 1장을 보다가 이 인생이 덧없어 회의하던 일이라, 영영일야(營營日夜) 하다가 죽으면 인생에 무엇이 남나? 명예냐, 부귀냐? 그것이 모두 아쉬운 것으로 생명이 끊어짐과 동시에 모두 다가 일체 공이 되지 않느냐. 무색하고 무형한 것이 아니냐. 무엇 때움에 내가 글을 읽고 무엇 때문에 의식을 입자고 이 애를 태우는가 하는 생각으로 5,6일 밥을 아니 먹고 고로(苦勞) 하던 일이 있었다.

인생은 고적한 사상을 가지기 쉬운 것이라, 이에 나는 나의 전정을 위하여 실력을 양성하겠다는 것과 또 인생 그것에 대한 무엇을 좀 해결하여 보겠다는 불같은 마음으로 한양 가던 길을 구부리어 사찰을 찾아 보은 속리사로 갔다가, 다시 더 깊은 심산유곡의 대찰을 찾아간다고 강원도 오대산의 백담사까지 가서 그곳 동냥중, 즉 탁발승이 되어 불도를 닦기 시작하였다.

[三千里, 1930.5.1]

 

비밀(한용운)

비밀입니까, 비밀이라니요. 나에게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대하여 비밀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마는,

비밀은 야속히도 지켜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의 비밀은 눈물을 거쳐서 당신의 시각(視覺)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한숨을 거쳐서 당신의 청각(聽覺)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떨리는 가슴을 거쳐서 당신의 촉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밖의 비밀은 한 조각 붉은 마음이 되어서 당신의 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소리없는 메아리와 같아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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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朴堤上)이, "내 차라리 계림(鷄林)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倭王)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달게 죽임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에서였다.

근래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 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석가·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경제상·사회상으로 불평등·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알력·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自屈之心)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정치이념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어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이어니와 이것은 수백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경제·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아담 스미드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一点一劃)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에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함은 뉴튼·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 몇 사람의 호령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태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미국은 이러한 독재국에 비겨서는 심히 통일이 무력한 것 같고 일의 진행이 느린 듯하여도, 그 결과로 보건대 가장 큰 힘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의 효과이다. 무슨 일을 의논할 때에 처음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제 의견을 발표하여서 훤훤효효(喧喧段段)하여 귀일(歸一)할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만, 갑론을박(甲論乙駁)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의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마침내 두어 큰 진영으로 포섭되었다가, 다시 다수결의 방법으로 한 결론에 달하여 국회의 결의가 되고, 원수의 결재를 얻어 법률이 이루어지면,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국론(國論), 즉 국민의 의사의 내용은 그때 그때의 국민의 언론전으로 결정되는 것이어서, 어느 개인이나 당파의 특정한 철학적 이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특색이다. 다시 말하면 언론·투표·다수결 복종이라는 절차만 밟으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도 정책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그 헌법의 조문뿐이다. 그런데 헌법도 결코 독재국의 그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러므로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그중에서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서 된다.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이상에 말한 것으로 내 정치 이념이 대강 짐작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弘文館)·사간원(司諫院)·사헌부(司憲府)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賢人)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의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1949년 6월 2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27년부터 1933년까지, 1940년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제6대, 8대, 10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과 주석을 지냈다. 아호는 창암(昌巖)이고, 호는 백범(白凡)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2007년 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출생과 유년기(1876~1892)

김구는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에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김순영, 곽낙원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초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유년기에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5세 때 그의 집안은 강령으로로 이사하였다가 그가 7세때 해주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 먹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김구는 9세 때부터 한글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默)이 사망했다. 이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에 걸려 전신불수가 되었다. 그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한 고명한 의원을 찾아 떠돌아다녔는데 이때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였다.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여 좀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좋아졌고, 부모가 돌아오면서 그의 학업은 계속되어 17세에는 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과거시험시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분노한 그는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3개월간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관상 공부를 하였는데,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도 하였다.

동학운동(1893~1895)

1893년 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昌巖)에서 김창수(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연비(신도)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이듬해에는 조직이 급속하게 커져감에 따라 18세의 나이로 수백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4년 가을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는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차 보은에 가서 접주 첩지를 받아왔다. 같은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였다. 이후 조직내 세력싸움에서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해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이동엽일파의 기습공격으로 패하고, 몽금포로 피신하여 3개월간 잠적해 있었다. 동학군 장수로 있을때 안태훈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1895년(19세),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義旅所)를 세워 경성의 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김종한의 원조와 황해 감사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해 1894년 12월 접주 원용일의 부대 2,000여 명을 대파한 적이 있을 정도로 동학 토벌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지역 유력자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한다. 안태훈이 김구의 인품을 사랑하여 동학이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 불가침협정과 공동원조계획을 세웠다가, 동학이 패퇴하자 안태훈에게 의탁하게 된 것이다.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의 배려로 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이곳에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감화받았다. 김구는 그 뒤에도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추억하기도 하였다. 20세에는 김형진을 만나 백두산까지 기행하였으며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그와함께 청나라군의 원조를 받아 강계성의 관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몸을 숨겼다. 이후 귀향하였는데 그의 스승인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을 결정하였으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22일 안태훈은 해주군의 집사로추정되는 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검들이 산포를 모아 청계동을 습격하려던 김창수(김구)를 추적했으나 김창수는 도망하고 말았으니 자신도 김창수의 발자취를 사방으로 추적하고 있다' 고 보고하였다. 오영섭은 안태훈 자신이 청계동에서 김구를 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일어나가 신천군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한 보신적 조치로 보았다.

[편집] 국모보수사건(1895~1899)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안주에서 귀환하던 중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장연 출신이면서 경성말을 하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굳이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아 살해했다. 김구는 살인 이유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한편 자서전인 《백범일지》에는 쓰치다가 일본군 중위라고 쓰여 있으나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이다.
석달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이어 11월 법부에서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로 강도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으나, 고종은 판결을 보류하였다. 당시 국민들의 반일감정명성황후에 대한 원수를 갚아야한다는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민심을 의식한 조선 법부는 고종 황제전화로 인천감옥장에게 내린 형집행 보류지시를 근거로 사형 집행 예정일 하루전날 형 집행을 보류시켰다. 감옥 속에서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897년 강화 사람 김주경(金周卿)이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는데,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 1898년 3월 동료죄수들과 탈옥에 성공한다. 그가 탈옥하자 그 대신 부모가 붙잡혀 투옥되었다. 탈옥 후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중 그해 가을께에 공주 마곡사승려가 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이듬해인 1899년 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다. 4월 부모와 상봉하여 방랑중 5월 평양 영천암에 방장이 되어 방장으로 장발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다. 그해 가을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은아버지 김준영은 농사일을 권유하였다.

[편집] 교육계몽운동(1900~1918)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기독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2월에는 부친 탈상 후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 그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1910년 경성의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가 열릴때 신민회 대표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그해 12월 안정근을 만났다가 1911년 안악사건, 105인 사건 등으로 연루, 체포되어 이에 종신형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1912년에는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 1915년 8월 가출옥하였다. 가출옥 직전 둘째딸 화경이 죽었다. 가출옥후 그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로 갔다. 1917년 2월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주석

상해 임시정부 활동(1919~1926)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간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 직후 김구는 경의선 열차편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선박을 타고 1919년 4월 중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경무국장(警務局長) 직을 맡고 이후 내무총장을 맡았다. 1920년 공산 혁명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제3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였다.이후 임시정부가 임시정부를 새로 창조하자는 창조파와 구조만 수정하자는 개조파의 논쟁장으로 변하자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내려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킨다. 이때 레닌에게 지원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제출하지 않은 고려공산당원 김립 등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자금을 횡령했다는 주장은 공산당을 적대시하던 정적들의 모함이라는 견해도 있다. 1923년 6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렸다. 12월 상해 교민단에서 의경대를 설치할때, 고문에 추대됐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하여 불란서 조계의 숭산로 공동묘지에 장사하였다.

임시정부 국무령·국무위원 취임(1926~1929)

1924년 6월 내무총장으로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5년 이승만이 사임한 후, 박은식, 이상룡 등 잇단 사퇴와 사망 등으로 임시정부는 내각 구성에 실패하였다. 1926년 말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김존위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사양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1927년 김구를 국무령에 선출하였다. 국무령이 된 김구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제도를 고치고 주석을 맞았다. 1928년 이시영(李始榮),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광복군 조직 활동(1930~1939)

1931년 임시정부 내에 일본요인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한인애국단을 만들어 1932년 1월 8일 이봉창천황 암살 미수 및 윤봉길훙커우공원 폭탄투척을 지휘하였다. 1933년 5월 박찬익을 통해 장개석과 면담하였다. 면담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여 한국인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이듬해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다. 4월, 가흥에서 어머니와 아들 김인, 김신을 만났다.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

1935년 5월 임시정부 해소론이 나오자 임정 해소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제공 경고문을 발표했다. 10월 가흥 남호의 선상에서 열린 임정의정원 의원의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1937년 안공근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안중근의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8년 남목청에서 지청천 등과 함께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 문제로 논의하던중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다. 현익철은 즉사하고 김구는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병원에 가료후 퇴원하였으나 이후 가슴에 남아있는 총알로 인해 거동의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1940~1945)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그해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광복 직전에는 미군 특수사령부(OSS)와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1941년 6월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의 승인에 관련된 문제로 중국 외교총장과 회동하였다. 그해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는 한편 12월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1943년 7월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주석직 사임을 발표하였다가 9월 주석에 복직하였다. 1944년 4월 임시정부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출되어 취임하였다. 9월 그는 장개석을 만나서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김원봉 등 좌파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중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환국 이후

광복초기 정치활동(1945~1946)

1945년 4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8월 섬서성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였고 11월 상하이를 거쳐 임시정부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하였다. 같은해 초, 장남 김인이 중국에서 병사하였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김구는 1945년 9월 3일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 11월에 개인자격으로 임시정부 1진으로 귀국하여 죽첨정(경교장)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말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했다.

신탁통치반대운동과 임정 법통(1946~1947)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되었다. 2월 14일부터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원래 김구는 이승만이 빠른 시일내에 미국으로부터 정부수립에 대한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하에 이승만의 도미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3.1절을 전후하여 정부수립을 추진하려던 계획이 알려지고 말았다. 신문에서는 아이들 장난으로 조소하였고 이승만, 한국민주당 등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미숙한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 3월 5일3월 6일 미군정에 의해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과 함께 주한미군 사령관실로 불려가 잡아넣겠다는 협박을 받고 굴복, 계획은 불발로 끝나게 됐다. 그해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이 한독당으로 통합되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론을 말할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인 강익하가 찾아와 3백만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박사(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박사에게 얻어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 6월 11일 독립촉성중앙회 국민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될때 참석하여 이승만의 연설에 대하여 답사를 발표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부총재에 선출됐다. 1947년 미국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여러 단체간 이견이 존재하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 서울 시위를 주도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는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 김구는 6.23 반탁데모에 장군 남이가 지은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후에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라는 시를 선사하여 격려하였다.그러나 6.23 반탁시위는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1947년 11월 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11월 30일 이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시간을 회동, 자신과 이승만의 근본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성명서 발표후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 1947년 12월 장덕수가 피살되자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배희범을 체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군정청 경찰은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 간부 10여명을 연행하는 등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은 빠졌는데 그 중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이 장덕수였다. 이 점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시각에 무게를 더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할것과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가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동기라고 주장하였다.

남북협상(1948~1949)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딛쳐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발송하였다.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2월 10일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 1948년 3월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 혐의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되자, 건국실천원양성소 소원 50여 명은 혈서를 써서 군정청에 항의하였다. 1948년 4월 김구는 김규식 등과 함께 북행을 결정하고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이어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열린 '4김 회동'에 참석하였 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하였다. 1948년 5월 다시 돌아왔다. 김구의 노선변경과 함께 그를 지지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갔고 조선일보도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조선일보 사장이 직접 나서서 <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말년(1949)

1949년 1월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 같은달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같은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사망 당시 김구의 나이는 만 74세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도왜실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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