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만해(萬海,卍海) 한용운(한유천),시인]

 

 

오직 민족을 위해 살다간 민족시인, 만해 한용운의 유명한 술회 내용..

 

나는 왜 중이 되었나?

 나는 왜 중이 되었나? 내가 태어난 이 나라와 사회가 나를 중이 되지 아니치 못하게 하였던가? 또는 인간 세계의 생사병고 같은 모든 괴로움이 나를 시켜 승방에 몰아넣고서 영생과 탐욕을 속삭이게 하였던가? 대체 나는 왜 중이 되었나? 중이 되어 가지고 무엇을 하였나? 무엇을 얻었나? 그래서 인생과 사회와 시대에 대하여 어떠한 도움을 하여 왔나? 이제 중이 된 지 20년에 출가의 동기와 그동안의 파란과 현재의 심경을 생각하여 볼 때에 스스로 일맥의 감회가 가슴을 덮는 것을 깨닫게 한다.

 나의 고향은 충남 홍주였다. 지금은 세대가 변하여 고을 이름 조차 홍성으로 변하였으나, 그때 나는 어린 소년의 몸으로 선친에게서 나의 일생운명을 결정할 만한 중요한 교훈을 받았으니, 그는 국가 사회를 위하여 일신을 바치는 옛날 의인들의 행적이었다. 그래서 마냥 선친은 스스로 그러한 종류의 서책을 보시다가 무슨 감회가 계신지 조석으로 나를 불러다가 세우고 옛사람의 전기를 가르쳐 주었다. 어린 마음에도 사상에 밫나는 그분들의 기개와 사상을 숭배하는 마음이 생기어 어떻게 하면 나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 보나 하는 것을 늘 생각하여 왔다. 그러자 그해가 갑진년 전해로 무슨 조약이 체결되어 뜻있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경성을 향하야 모연든다는 말이 들리었다. 그래서 좌우간 이 모양으로 산속에 파묻힐 때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하루는 담뱃대 하나만 들고 그야말로 폐포파립(弊袍破笠)으로 표연히 집을 나와 서울이 있다는 서북 방면을 향하여 도보하기 시작하였으니, 부모에게 알린 바도 아니요, 노자도 일푼 지닌 것이 없는 몸이며, 한양을 가고나 말는지 심히 당황한 걸음이었으나 그때는 어쩐지 태연하였다. 그래서 좌우간 길 떠난 몸이매 해지기 전까지 자꾸 남들이 가르쳐 주는 서울길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날은 이미 기울고 오장의 주림이 대단하게 되자 어떤 술막집에 들어 팔베개 베고 그 하룻밤 자느라니 그제야 무모한 걸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의구가 일어났었다. 적수공권으로 어떻게 나랏일을 돕고 또한 한학의 소양 이외에 아무 교육이 없는 내가 어떻게 소지를 이루나, 그날 밤 야심토록 전전반측하며 사고 수십 회에 이를 때에 문득 나의 아홉 살 때의 일이 유연히 떠오른다. 그것은 아홉 살 때 [서상기]의 통기 1장을 보다가 이 인생이 덧없어 회의하던 일이라, 영영일야(營營日夜) 하다가 죽으면 인생에 무엇이 남나? 명예냐, 부귀냐? 그것이 모두 아쉬운 것으로 생명이 끊어짐과 동시에 모두 다가 일체 공이 되지 않느냐. 무색하고 무형한 것이 아니냐. 무엇 때움에 내가 글을 읽고 무엇 때문에 의식을 입자고 이 애를 태우는가 하는 생각으로 5,6일 밥을 아니 먹고 고로(苦勞) 하던 일이 있었다.

인생은 고적한 사상을 가지기 쉬운 것이라, 이에 나는 나의 전정을 위하여 실력을 양성하겠다는 것과 또 인생 그것에 대한 무엇을 좀 해결하여 보겠다는 불같은 마음으로 한양 가던 길을 구부리어 사찰을 찾아 보은 속리사로 갔다가, 다시 더 깊은 심산유곡의 대찰을 찾아간다고 강원도 오대산의 백담사까지 가서 그곳 동냥중, 즉 탁발승이 되어 불도를 닦기 시작하였다.

[三千里, 1930.5.1]

 

비밀(한용운)

비밀입니까, 비밀이라니요. 나에게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대하여 비밀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마는,

비밀은 야속히도 지켜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의 비밀은 눈물을 거쳐서 당신의 시각(視覺)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한숨을 거쳐서 당신의 청각(聽覺)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떨리는 가슴을 거쳐서 당신의 촉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밖의 비밀은 한 조각 붉은 마음이 되어서 당신의 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소리없는 메아리와 같아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민족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朴堤上)이, "내 차라리 계림(鷄林)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倭王)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달게 죽임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에서였다.

근래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 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석가·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경제상·사회상으로 불평등·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알력·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自屈之心)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정치이념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어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이어니와 이것은 수백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경제·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아담 스미드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一点一劃)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에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함은 뉴튼·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 몇 사람의 호령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태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미국은 이러한 독재국에 비겨서는 심히 통일이 무력한 것 같고 일의 진행이 느린 듯하여도, 그 결과로 보건대 가장 큰 힘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의 효과이다. 무슨 일을 의논할 때에 처음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제 의견을 발표하여서 훤훤효효(喧喧段段)하여 귀일(歸一)할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만, 갑론을박(甲論乙駁)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의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마침내 두어 큰 진영으로 포섭되었다가, 다시 다수결의 방법으로 한 결론에 달하여 국회의 결의가 되고, 원수의 결재를 얻어 법률이 이루어지면,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국론(國論), 즉 국민의 의사의 내용은 그때 그때의 국민의 언론전으로 결정되는 것이어서, 어느 개인이나 당파의 특정한 철학적 이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특색이다. 다시 말하면 언론·투표·다수결 복종이라는 절차만 밟으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도 정책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그 헌법의 조문뿐이다. 그런데 헌법도 결코 독재국의 그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러므로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그중에서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서 된다.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이상에 말한 것으로 내 정치 이념이 대강 짐작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弘文館)·사간원(司諫院)·사헌부(司憲府)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賢人)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의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1949년 6월 2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27년부터 1933년까지, 1940년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제6대, 8대, 10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과 주석을 지냈다. 아호는 창암(昌巖)이고, 호는 백범(白凡)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2007년 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출생과 유년기(1876~1892)

김구는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에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김순영, 곽낙원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초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유년기에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5세 때 그의 집안은 강령으로로 이사하였다가 그가 7세때 해주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 먹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김구는 9세 때부터 한글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默)이 사망했다. 이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에 걸려 전신불수가 되었다. 그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한 고명한 의원을 찾아 떠돌아다녔는데 이때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였다.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여 좀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좋아졌고, 부모가 돌아오면서 그의 학업은 계속되어 17세에는 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과거시험시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분노한 그는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3개월간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관상 공부를 하였는데,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도 하였다.

동학운동(1893~1895)

1893년 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昌巖)에서 김창수(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연비(신도)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이듬해에는 조직이 급속하게 커져감에 따라 18세의 나이로 수백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4년 가을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는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차 보은에 가서 접주 첩지를 받아왔다. 같은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였다. 이후 조직내 세력싸움에서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해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이동엽일파의 기습공격으로 패하고, 몽금포로 피신하여 3개월간 잠적해 있었다. 동학군 장수로 있을때 안태훈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1895년(19세),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義旅所)를 세워 경성의 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김종한의 원조와 황해 감사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해 1894년 12월 접주 원용일의 부대 2,000여 명을 대파한 적이 있을 정도로 동학 토벌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지역 유력자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한다. 안태훈이 김구의 인품을 사랑하여 동학이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 불가침협정과 공동원조계획을 세웠다가, 동학이 패퇴하자 안태훈에게 의탁하게 된 것이다.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의 배려로 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이곳에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감화받았다. 김구는 그 뒤에도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추억하기도 하였다. 20세에는 김형진을 만나 백두산까지 기행하였으며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그와함께 청나라군의 원조를 받아 강계성의 관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몸을 숨겼다. 이후 귀향하였는데 그의 스승인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을 결정하였으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22일 안태훈은 해주군의 집사로추정되는 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검들이 산포를 모아 청계동을 습격하려던 김창수(김구)를 추적했으나 김창수는 도망하고 말았으니 자신도 김창수의 발자취를 사방으로 추적하고 있다' 고 보고하였다. 오영섭은 안태훈 자신이 청계동에서 김구를 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일어나가 신천군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한 보신적 조치로 보았다.

[편집] 국모보수사건(1895~1899)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안주에서 귀환하던 중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장연 출신이면서 경성말을 하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굳이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아 살해했다. 김구는 살인 이유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한편 자서전인 《백범일지》에는 쓰치다가 일본군 중위라고 쓰여 있으나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이다.
석달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이어 11월 법부에서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로 강도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으나, 고종은 판결을 보류하였다. 당시 국민들의 반일감정명성황후에 대한 원수를 갚아야한다는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민심을 의식한 조선 법부는 고종 황제전화로 인천감옥장에게 내린 형집행 보류지시를 근거로 사형 집행 예정일 하루전날 형 집행을 보류시켰다. 감옥 속에서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897년 강화 사람 김주경(金周卿)이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는데,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 1898년 3월 동료죄수들과 탈옥에 성공한다. 그가 탈옥하자 그 대신 부모가 붙잡혀 투옥되었다. 탈옥 후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중 그해 가을께에 공주 마곡사승려가 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이듬해인 1899년 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다. 4월 부모와 상봉하여 방랑중 5월 평양 영천암에 방장이 되어 방장으로 장발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다. 그해 가을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은아버지 김준영은 농사일을 권유하였다.

[편집] 교육계몽운동(1900~1918)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기독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2월에는 부친 탈상 후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 그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1910년 경성의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가 열릴때 신민회 대표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그해 12월 안정근을 만났다가 1911년 안악사건, 105인 사건 등으로 연루, 체포되어 이에 종신형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1912년에는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 1915년 8월 가출옥하였다. 가출옥 직전 둘째딸 화경이 죽었다. 가출옥후 그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로 갔다. 1917년 2월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주석

상해 임시정부 활동(1919~1926)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간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 직후 김구는 경의선 열차편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선박을 타고 1919년 4월 중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경무국장(警務局長) 직을 맡고 이후 내무총장을 맡았다. 1920년 공산 혁명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제3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였다.이후 임시정부가 임시정부를 새로 창조하자는 창조파와 구조만 수정하자는 개조파의 논쟁장으로 변하자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내려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킨다. 이때 레닌에게 지원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제출하지 않은 고려공산당원 김립 등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자금을 횡령했다는 주장은 공산당을 적대시하던 정적들의 모함이라는 견해도 있다. 1923년 6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렸다. 12월 상해 교민단에서 의경대를 설치할때, 고문에 추대됐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하여 불란서 조계의 숭산로 공동묘지에 장사하였다.

임시정부 국무령·국무위원 취임(1926~1929)

1924년 6월 내무총장으로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5년 이승만이 사임한 후, 박은식, 이상룡 등 잇단 사퇴와 사망 등으로 임시정부는 내각 구성에 실패하였다. 1926년 말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김존위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사양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1927년 김구를 국무령에 선출하였다. 국무령이 된 김구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제도를 고치고 주석을 맞았다. 1928년 이시영(李始榮),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광복군 조직 활동(1930~1939)

1931년 임시정부 내에 일본요인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한인애국단을 만들어 1932년 1월 8일 이봉창천황 암살 미수 및 윤봉길훙커우공원 폭탄투척을 지휘하였다. 1933년 5월 박찬익을 통해 장개석과 면담하였다. 면담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여 한국인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이듬해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다. 4월, 가흥에서 어머니와 아들 김인, 김신을 만났다.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

1935년 5월 임시정부 해소론이 나오자 임정 해소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제공 경고문을 발표했다. 10월 가흥 남호의 선상에서 열린 임정의정원 의원의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1937년 안공근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안중근의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8년 남목청에서 지청천 등과 함께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 문제로 논의하던중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다. 현익철은 즉사하고 김구는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병원에 가료후 퇴원하였으나 이후 가슴에 남아있는 총알로 인해 거동의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1940~1945)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그해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광복 직전에는 미군 특수사령부(OSS)와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1941년 6월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의 승인에 관련된 문제로 중국 외교총장과 회동하였다. 그해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는 한편 12월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1943년 7월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주석직 사임을 발표하였다가 9월 주석에 복직하였다. 1944년 4월 임시정부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출되어 취임하였다. 9월 그는 장개석을 만나서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김원봉 등 좌파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중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환국 이후

광복초기 정치활동(1945~1946)

1945년 4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8월 섬서성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였고 11월 상하이를 거쳐 임시정부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하였다. 같은해 초, 장남 김인이 중국에서 병사하였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김구는 1945년 9월 3일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 11월에 개인자격으로 임시정부 1진으로 귀국하여 죽첨정(경교장)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말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했다.

신탁통치반대운동과 임정 법통(1946~1947)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되었다. 2월 14일부터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원래 김구는 이승만이 빠른 시일내에 미국으로부터 정부수립에 대한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하에 이승만의 도미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3.1절을 전후하여 정부수립을 추진하려던 계획이 알려지고 말았다. 신문에서는 아이들 장난으로 조소하였고 이승만, 한국민주당 등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미숙한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 3월 5일3월 6일 미군정에 의해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과 함께 주한미군 사령관실로 불려가 잡아넣겠다는 협박을 받고 굴복, 계획은 불발로 끝나게 됐다. 그해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이 한독당으로 통합되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론을 말할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인 강익하가 찾아와 3백만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박사(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박사에게 얻어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 6월 11일 독립촉성중앙회 국민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될때 참석하여 이승만의 연설에 대하여 답사를 발표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부총재에 선출됐다. 1947년 미국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여러 단체간 이견이 존재하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 서울 시위를 주도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는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 김구는 6.23 반탁데모에 장군 남이가 지은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후에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라는 시를 선사하여 격려하였다.그러나 6.23 반탁시위는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1947년 11월 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11월 30일 이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시간을 회동, 자신과 이승만의 근본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성명서 발표후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 1947년 12월 장덕수가 피살되자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배희범을 체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군정청 경찰은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 간부 10여명을 연행하는 등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은 빠졌는데 그 중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이 장덕수였다. 이 점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시각에 무게를 더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할것과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가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동기라고 주장하였다.

남북협상(1948~1949)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딛쳐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발송하였다.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2월 10일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 1948년 3월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 혐의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되자, 건국실천원양성소 소원 50여 명은 혈서를 써서 군정청에 항의하였다. 1948년 4월 김구는 김규식 등과 함께 북행을 결정하고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이어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열린 '4김 회동'에 참석하였 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하였다. 1948년 5월 다시 돌아왔다. 김구의 노선변경과 함께 그를 지지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갔고 조선일보도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조선일보 사장이 직접 나서서 <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말년(1949)

1949년 1월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 같은달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같은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사망 당시 김구의 나이는 만 74세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도왜실기》 등이 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