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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기대승에게 보내는 이황의 편지글 '답 기명언(答 奇明彦)'

 요즘 보내신 두 번째 글의 가르치을 받고, 먼젓번 제 편지에 말이 소략하고 그릇된 곳이 있음을 알았기에 삼가 수정하여 고친 글을 앞에 써서 괜찮은지 여쭙고, 뒤에 바로 두 번째 글을 이어서 보내니 밝혀 회답해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성과 정을 구분하는 논의는 선대의 유학자들이 자세히 밝혔으나, 오직 사단과 칠정에 대해서는 그것이 모두 정이라고만 했을 뿐, 이(理)와 기(氣)를 나누어 말한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정지운이 천명도를 만들면서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나의 뜻에도 역시 그 분별이 너무 심하여 분쟁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기에 순선(純善)과 겸기(兼氣) 등의 말로 바꾸었습니다. 그 뜻을 말씀드리자면 대체로 서로 도와서 연구하여 밝히고자 함이며, 그 말에 흠이 없었다 함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변설을 보니, 잘못을 지적하여 타일러 줌이 자세하니 깨우침이 더욱 깊습니다. 그러나 아직 미혹됨이 있기에 시험 삼아 말씀드리니 바로잡아 주시기를 청합니다.

 사단이 정이고 칠정 또한 정으로 다 같은 정인데 어찌하여 사단과 칠정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겠습니까. 보낸 편지에 이른바 자사와 맹자가 각각 주장하여 말한 것이 같지 않다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理)와 기는 본래 서로 기다려 체(體)가 되고 용(用)이 되어 진실로 이(理) 없는 기없고, 기없는 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장한 말이 이미 서로 틀리니, 또한 분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예부터 성현들이 이 두 가지를 논할 때에 어찌 꼭 혼합하여 한 가지 설로만 분별없이 말하였겠습니까. 또 성(性) 한 글자를 말씀드려도 자사는 이른바 천명의 성[天命之性]이고 맹자는 이른바 성선의 성[性善之性]입니다. 이 두 성(性) 자가 가리키는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차 이기가 부여한 가운데에 나아가 이 이(理)의 근원을 가리켜 말함이 아닙니까. 그 가리키는 바가 이(理)에 있고 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순수하고 순선하고 악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理)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성이 기를 겸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성의 본연이 아닌 것입니다.

 자사와 맹자는 도체의 온전한 것을 환히 들여다보고 이와 같이 말했는데, 그것은 기를 섞어서 성을 말하면 성의 본래 상태가 선하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후세에 정호, 정이, 장재 등의 여러 선생들이 나온 뒤에야 기질의 성[氣質之性]에 관한 논의가 있었으나 그들 또한 자사나 맹자의 말씀에 더 보태려고 한 것이지 다른 의견을 세우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리켜 말한 바가 사람이 태어난 뒤에 있는 것이니 역시 순수한 본연의 성[本然之性]으로 일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일찍이 정에 사단칠정의 구분이 있는 것은 마치 성에 본연과 기질의 다름이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을 이와 기로 나눌 수 있다면 정 또한 이와 기로 나누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부끄러워하고, 양보하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어디에서 움직이는가 하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성에서 발동하는 것이고,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은 어디에서 발하는가 하면, 외물이 사람의 형기에 접촉되어 사람의 마음속에서 움직여 나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단의 발동을 맹자가 일찍이 마음이라고 말했으니 마음은 분명 이(理)와 기의 합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켜 말한 것이 이(理)를 기준으로 한 것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성이 순수하게 마음속에 있으므로 불쌍히 여기고, 부끄러워하고, 양보하고, 잘잘못을 가리는 네 가지 마음이 그 실마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 칠정의 발동을 정자가 이르길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주자는 이르기를 "각각 마땅한 바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틀림없이 칠정은 이(理)와 기를 겸한 것입니다.(하략)

[퇴계집(退溪集) 권17, 서(書),답기명언(答奇明彦)/동양철학산책/김교빈 최종덕 김문용 전호근 김제란 김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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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율곡 이이(1536~1584)/네이버 두산백과]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의 대표적인 주자학자로 강원도 강릉의 외가에서 태어나 어머니 신사임당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13세에 초시에 급제하고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마친 뒤 19세가 되던 해에는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는가 하면 23세에는 당대의 노사숙유(老士宿儒)로 일컬어지던 이황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그해 겨울에는 별시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했는데 이때의 담압지가 유명한 '천도책'이다.

 이이는 비교적 젊은 시절 중앙의 정치 무대에 나간 이래 20여년 동안 이조좌랑,호조판서,부제학,대제학 등 국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아울러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 십만양병론을 주장하면서 각종 화약 무기를 개발하고 전함을 건조하여 왜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유성룡 등의 유학자들로부터 아무 일도 없는데 병력을 양성하는 것은 그자체가 화근이라고 비판을 받았지만 나중에 전쟁이 일어나자 선견지명을 가진 성은으로 찬양받기도 했다.

 

[사진 초충도/어머니 신사임당은 학문과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다./네이버 공부에미친16인의조선선비들]

 

 이이는 49세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성학집요(聖學輯要)'와 '격몽요결(擊夢要訣)'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그 외에도 정치, 경제, 교육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뛰어난 방책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어 1577년 저술한 '격몽요결'은 초학자들을 위한 성리학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데 충실한 내용과 완성도 높은 체제를 갖추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성현이 되겠다는 뜻을 세워야 한다는 입지장(立志章), 나쁜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혁구습장(革舊習章), 올바른 몸가짐을 강조한 지신장(持身章), 책을 읽4는 방법을 논의한 독서장(讀書章),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논한 사친장(事親章) 등 모두 10장으로 구성 되어 학문의 목적부터 구체적인 방법과 실천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논의하고 있어 조선시대 내내 초학자들의 필독서로 여겨졌다.

 이 책의 입지장에서 그는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성인(聖人)과 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뜻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여기에서 그의 학문관이 주자학의 정신을 철저히 이어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그는 이치는 따져 보지 않고 단지 스승의 설이라고 해서 믿고 따르는 독경주의를 비판하고 스스로 의미를 찾는 자주적인 학풍을 주장했다. 그는 이런 학풍에 입각하여 이황에게 다른 사람의 견해를 모방하는 경향이 있음을 비판하고 아울러 "주자라 할지라도 정말 이(理)와 기가 상대해서 각각 발출한다고 생각했다면 주자 또한 잘못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자주적인 학풍을 중시했다.

 또 그는 벗이었던 성혼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논쟁을 진행했는데 이는 학국철학사상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일어난 사단칠정 논쟁과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논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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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 들어선 조선왕조는 건국과 함께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워 고려 때까지의 지배적인 이념이었던 불교를 비판하는 한편 국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유교경전에 근거하여 기본법제를 정비하는 등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건설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과 권근 등을 비롯한 관학파 유학자들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정도전은 왕조의 성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로 조선을 기본적으로 유교적 윤리규범에 의해 통제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이상을 품고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제도 정비에 기여하는 한편 '불씨잡변' 등의 저술을 통해 불교를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다. 또 권근은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지향하는 조선왕조의 성립 후 당시까지의 주자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이해한 대표적인 학자로 '입학도설'이나 '오경천견록' 등의 저술로 조선 초기 주자학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권근의 글씨, 〈 해동명적〉에서, 규장각 소장, 백과사전/한국브리태니커]

 

 이들 관학파 유학자들은 조선조가 성립하는 데는 크게 공헌했지만 그런 공헌을 발판으로 중앙권력을 독점하면서 경제적으로는 대토지 소유자로서 기득권층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도덕적인 타락과 함께 권력의 남용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15세기 무렵에 이르면서 이들 대토지 소유자들은 무차별적으로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중소 지주들과의 갈등과 마찰이 극에 달했다. 이름은 물론이고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그 세력이 비대해졌다. 결국 당시 군주였던 성종은 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껴 김종직을 비롯한 중소 지주 출신 신진 유학자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로 인해 김종직을 비롯한 지방 출신 주자학자들이 중앙의 요직을 차지하고 기존의 세력과 대립하는 국면이 조성되었고 그로 인해 정치세력 또한 둘로 나뉘게 되었는데, 전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훈구파이고 후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사림파이다.

 

 사림파의 진출로 궁지에 몰린 훈구파는 연산군이 즉위하고 나자 김종직이 생전에 세조의 왕위찬탈을 빗대어 비판한 '조의제문'을 썻다는 사실을 빌미로 삼아 1498년 김일손 등을 죽이고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는 등 비이성적인 대응으로 사림파를 탄압하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무오사화이다.

 

[조광조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백과사전/한국브리태니커]

 

 이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림파 유학자들은 지방 향촌 사회를 기반으로 꾸준히 성장하였으며, 이후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자 이들은 다시 중앙의 정계로 진출하여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대표가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일군의 사림파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사헌부, 사간원 등 언론 관직을 통해 정계로 진출하여 기존의 공신들을 비판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일종의 추천제인 현량과를 통해 자기 세력을 중아으로 진출시키고, 지방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주자가 손질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군현마다 시행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급진적인 개혁은 또 다시 기득권 세력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역모를 뒤집어씌워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파 유학자들을 희생시켰다. 이 사건이 기묘사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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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사진 백과사전]

 

 퇴계 이황(李滉)은 조선 초기의 혼란기였던 연산군 시대에 좌찬성 식(埴)의 7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며, 12세때 작은 아버지에게서 '논어'를 배웠고 20세경에는 건강을 해칠정도로 성리학을 익히는데 몰두했다고 한다. 1527년(중종2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재했으며,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후에 여러 관직을 거친 후 1549년 낙향해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연산군때 태어나 중종, 인종, 명종, 선조의 5대에 걸친 정치적 격동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태어나기 3년 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네 살이 되던 해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특히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는 정암 조광조가 희생당한 중종 때의 기묘사화를 직접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마흔다섯 살 때 일어난 을사사화에는 자신의 형이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고 자신도 삭탈관직을 당했기 때문에 사화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가 권신들에 의해 좌절되는 현실을 목도하고 은둔을 결심하여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 동안 도산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강학하였는데, 그의 치열한 학문적 열정은 동시대 많은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 스스로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퇴계이황 동상/사진 백과사전]

 

 그의 학문적 축적은 저술뿐만 아니라 당시 학자들과 교환한 편지글 속에 남아 있다. 그중 정자중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주자의 글을 읽으면서 "마치 바늘이 몸을 찌르는 것처럼, 잠자다가 갑자기 확 깨는 것처럼" 절실하게 느꼈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의 주자학에 대한 치열한 탐구심을 엿볼 수 있다.

 이황의 저술 중 대표적인 것들로는 '성학십도', '계몽전의', '주자서절요'와 다량의 서간문을 들 수 있으며, 대부분 '퇴계집'에 실려있다.

 

 이런 퇴계 이황의 철학 사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기대승과의 논쟁을 통해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사단칠정' 논쟁이다. 이 사단칠정 논쟁은 한국철학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이며, 그 발단을 보면 학자 정지운이 작성한 '천명도(天命圖)'를 이황이 수정하면서 정지운이 "사단은 이(理)에서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 것이다(四端發於理 七情氣之發)"로 고치자 이에 대해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라 이황과 기대승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입장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이다.

 이 논쟁은 두 학자 간의 개인적 논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큰틀에서 보면 당시 학계에 주자학의 이기론과 심성론에 대한 두가지 다른 해석방식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논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이 논쟁을 통해 조선의 주자학은 주자학의 기본이론인 이기론과 심성론을 결합시킴으로써 중국 주자학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독자성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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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의 길 - 이순신 일본침략에 대비하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음력)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으나,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어려서 외가인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28세가 되던 1572년 8월 처음으로 무관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마사고로 낙방하였고, 4년 뒤인 1576년 2월 비로소 식년무과에 합격하였다. 32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북방의 말단 수비장교로 시작된 이순신의 관직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배경이나 경제적 능력이 없고, 성품이 강직하고 원칙을 중시하여 상관들로부터 잦은 모함과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순신이 정읍현감을 거쳐 1591년 2월 유성룡의 추천으로 드디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은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수군의 전력을 증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군기를 확립하고 군비를 확충하였으며, 적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거북선과 판옥선, 지자와 현자총통 등의 무기를 제작하였다. 특히 조선의 돌격전함인 거북선은 적의 월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둥근 지붕에 못이 박혀있고, 전우좌우 사방에서 대포를 쏠 수 있어서 수많은 적선 사이에서도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전선이었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하루 앞둔 1592년 4월 12일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나대용이 거북선 제작을 완료하고 거기서 지자와 현자총통의 시험 발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발발 - 조선수군 일본의 발목을 잡다.
1592년 4월 13일(음력) 마침내 이순신이 우려했던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수십만 대군의 일본군이 전쟁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조선을 일시에 침략한 것이다.

전쟁발발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만전의 준비를 한 후, 1592년 5월 4일 첫 출전을 한다. 이 출전에서 그는 옥포, 합포, 적진포 지역에서 해전을 치러 총 42척의 왜선을 격파하며 승리하였다. 이어서 6월 당포. 당항포에서, 7월 한산도, 안골포에서, 9월 부산포해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여러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하였다. 이러한 이순신 함대의 일방적인 승리는 조선 수군의 사기를 진작하였고, 결국 조선 수군은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개전 이 후 거침없이 공격해오던 일본군의 전략(수륙병진)에 큰 타격을 주어 전쟁의 방향을 전환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세계 4대 해전으로 손꼽히는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은 조선 총통과 전선의 우수성, 이순신 특유의 창의적 전술인 ‘학익진’을 사용한 전투로 해군 수장으로써 이순신의 뛰어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전투이다. 1593년 8월 15일, 이순신은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조선 수군의 잇따른 해전 승리, 의병들의 출현, 명나라 군대의 참전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일본은 강화 교섭 자체를 반대하는 조선을 배제시킨 채, 전투에 소극적인 명나라와 약 3년 9개월 동안 지루한 강화협상을 전개해 나간다. 이순신은 이 기간 동안에도 군량 확보, 병력 충원, 전함 건조, 무기 제작 및 화약 비축, 군사 훈련 등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특히 전염병과 군량미 부족이라는 악조건과 싸우며 해상 작전을 수행해나갔는데, 1594년 3월 난중일기에는 장군도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고생한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군량확보를 위해서 과거 둔전관의 경험을 살려 둔전을 경영했으며, 어로작업과 소금제작으로 수만 석의 군량을 마련하는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다.

고난의 길 - 13 VS 133 명량해전 승리로 다시 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순신은 이러한 모든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1597년 2월 삼도수군통제사 직위를 박탈당하고 죄인의 신분으로 서울로 압송되기에 이른다. 모진 형벌을 받고 사형위기에까지 몰린 이순신은 결국 여러 사람들의 구명운동으로 방면되나, 두 번째 백의종군에 처하게 된다. 더욱이 이 기간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의는 큰 슬픔을 겪게 된다.

한편 이순신의 뒤를 이어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은 1597년 7월 칠전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한다. 3년 9개월 동안 이순신이 각고의 노력으로 이룩해놓은 조선수군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패전 소식은 곧 이순신에게 전해졌고, 장군은 즉시 조선 수군 부활의 해법을 찾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한 달에 걸친 해안지역 정찰에 나선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남해지역을 직접 돌아보며 흩어졌던 장병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무기와 군량미를 모았다. 1592년 8월 3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는 교지를 받게 된다.

이순신에게는 13척의 판옥선만이 남아 있었다. 명량해전은 이러한 이순신의 함대가 수백 척의 적선과 맞서 싸운 해전이었다. 이순신은 절대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지형을 활용하는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였고,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서 함대를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결국 133척의 적선과 맞서 승리하였다. 이 승리로 조선수군은 칠전량해전의 승기를 타고 서해로 진출하려는 일본을 막아내고, 자신감을 회복하여 재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순신은 이 해전으로 셋째 아들을 잃게 된다. 패배한 일본군이 이순신의 본가가 있는 아산으로 쳐들어가 보복한 것이다.

이 후로 이순신은 고하도, 고금도로 차례로 진영을 옮기면서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1598년 2월 17일 이순신은 8000여명의 병력과 53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고금도로 진영을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 일본은 철군을 서두르게 된다.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 - 진정한 영웅 이순신 길이 살다.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는 1598년 11월 노량 앞 바다에서 퇴각하는 일본군과 마지막 해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 치열한 전장의 선상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장군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가는 중에도 아군의 동요를 염려하여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노량해전은 조선 수군의 애국심과 우수성을 떨친 마지막 해전이었으며, 조선 수군이 주도했던 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였다.

이순신은 7년의 임진왜란 기간 동안 최소 23전 이상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훌륭한 장수였다. 그러나 단지 싸움에만 능한 장수가 아니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바쳐 끝까지 백성과 나라를 사랑한 진정한 리더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오늘날에도 이순신을 가장 사랑하고 닮고 싶어 하는 영웅으로 꼽는다.

장군의 정신



정의실천

이순신 장군은 일평생 정의를 실천함에 있어, 조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관으로서 항상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였으며,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상관이나 권력자에게도 서슴없이 오류를 지적하는 직언을 하였다. 비록 이로 인해 여러 차례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늘 정의를 삶의 핵심가치로 삼고 온전히 실천하였다. 정의를 실천함에 있어 장군은 타인보다 본인에게 더 엄격하였다. 다음 글은 1593년 웅천포 해전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통선 1척을 잃은 것에 대해 장군 스스로 죄를 청하는 장계의 한 부분이다. 사실 이 통선이 전복된 원인은 부하장수들이 장군의 지휘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나 장군은 지휘관으로써 본인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통선(統船) 1척을 마침내 전복시켜 많은 죽음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이 군사 쓰는 방법이 좋지 못하고 지휘가 잘못된 때문인바, 극히 황공하여 거적자리에 엎드려 죄를 기다리나이다." -통선일척경복후대죄장(1593.4.6)

또한 장군은 해전에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부하장수들에게 골고루 주고, 이를 엄격히 평가하여 해전의 상황을 아뢰는 장계에 상세히 기록함으로 각자 공적에 따라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당시 천대받던 여러 분야의 기술자들까지도 고루 기용하고, 이들의 공을 높이 평가하였다.

"신의 군관 정사준이 묘한 법을 찾아내어 대장장이 낙안 수군 이필종, 순천 사삿집 종 안성, 피난하여 본영에 와 사는 김해 절의 종 동지, 거제 절의 종 언복 등을 데리고 정철(正鐵)을 두들겨 만들었는데 그 체제도 잘 되었고 총알 나가는 힘도 조총과 꼭 같습니다." -봉진화포장(1593.8.10)

1593년 8월 일본의 조총과 조선의 승자총통을 개량하여 정철총통을 제작을 아뢰는 장군의 장계에는 군관 정사준을 비롯하여 대장장이와 천민인 종들의 이름까지도 세세히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장군은 일평생 본인의 신념에 따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의로써 타인을 평가하기에 앞서 장군 스스로 온전히 정의를 실천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구국의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준 동시에, 장군의 업적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창의정신

창의력은 21세기의 핵심 가치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온 많은 리더들은 이미 훌륭한 창의력의 소유자들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16세기 이순신 장군 역시 뛰어난 창의력을 지닌 리더였다. 거북선을 비롯한 장군이 제작한 여러 무기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해전술, 군경영을 위한 작은 아이디어 하나까지 모두가 장군의 기발한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거북선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13년 태종 때이지만, 180년 후 임진왜란을 위해 재탄생된 거북선과는 구조나 그 성능 면에 있어 많이 다른 것이었다. 다음은 1592년 6월 2일 당포해전의 전황을 아뢰는 장계에 묘사된 거북선의 모습이다.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하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수백 척의 적선 속이라 하더라도 돌진해 들어가서 대포를 쏠 수 있게 했는데, 이번 출동에는 돌격장이 타고 왔습니다." -당포파왜병장 1592.6.14

돌격전투함 거북선은 우수한 조선의 판옥선을 기반으로 일본과의 해전에 가장 적합하도록 설계되었다. 전투 시 적진에 돌격하여 적의 진영을 무너트리고, 사방에 탑재된 포를 자유자재로 쏘아댐으로 일본함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 일본군은 이 같은 거북선을 맹선(눈먼배)이라 부르며 무척 두려워하였다.

이후로 계속되는 해전 중에도 장군은 일본의 주력무기인 조총과 조선의 승자총통을 접목하여 1593년 8월 새로운 정철총통을 제작하는 등 계속적으로 신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장군의 창의력은 전쟁기간동안 군경영의 큰 자원이 되어주었다. 7년의 전쟁기간동안 장군은 수군의 의식주를 위한 군량확보, 무기제작과 훈련 등 군경영에 필요한 모든 재원을 거의 자력으로 해결해야했다. 이를 위해 장군은 어로작업, 소금제조 및 판매, 둔전경영, 해로통행첩(선박운행증) 발행 등의 창의적인 여러 행정을 편다.

특히 과거 둔전관의 경험을 살린 둔전경영을 통해서는 군량미를 확보하는 동시에 유랑하는 백성들을 둔전 지역으로 모아 병력 충원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도 하였다. 다음 글은 이순신 장군이 둔전경영을 건의하며 그 이로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군사들의 양식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중략) 관경 경영으로 경작하든지, 혹은 민간에 주어서 소작을 시키든지, 혹은 순천. 흥양의 수비군들로 하여금 전력하여 농사짓게 하다가 사변이 생길 적에는 나가 싸우게 한다면 싸움에나 지킴에나 방해됨이 없고 군량에도 유익할 것입니다." -조진수륙전사장. 1593.9.10

창의력은 약점을 강점으로, 위기를 기회로, 무에서 유로 변화시키는 힘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창의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하여,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해내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켜냄으로 세계 역사를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되었다.


불패의 해전사

이순신 장군은 첫 해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7년의 임진왜란기간 동안 최소 23번의 해전을 치러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장수이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기록이다.

어떻게 이런 불패의 신화가 가능했을까?

철저한 준비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전쟁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한다. 해전에 알맞은 방법을 개발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적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무기를 제작한다. 화력이 우수한 조선의 지자. 현자 총통 및 판옥선과 거북선 등의 무기를 집중하여 제작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 정신으로 장군은 매 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일본군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은 사상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뛰어난 전략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꾸게 한 1592년 7월 8일의 한산도 해전은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한 해전이다. 당시 70여척의 적선이 정박해 있던 견내량은 지형이 복잡하고 좁아서 아군에게 불리한 장소였다. 장군은 이 점을 간파하고 적선을 한산도의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무방비상태의 적을 "학익진법"으로 집중 공격함으로 대승을 거둔다. 한산도 해전은 뛰어난 전략가로써의 장군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 전투였다. 장군은 항상 부하장수들과 전략과 전술을 논의하고 연구하였다. 동서양의 해전 연구가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이러한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해전술을 칭찬하며 연구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함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전략을 수립하고 난 후 이순신 장군은 실제 전투에 누구보다 용감하게 최선을 다해 참여하였다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선을 맞아 싸운 명량해전의 일화는 유명하다. 엄청난 적 앞에 조선수군의 장수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싸움을 망설이자, 장군은 부하장수들을 꾸짖으며 이들을 독려하기 위해 함대의 선두로 나아가 전투를 이끈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에 조선수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에 임하였으며 마침내 엄청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처럼 전투에서 항상 솔선수범하여 최선을 다하는 장군의 모습은 많은 부하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그들 또한 장군처럼 전투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이순신 장군은 해전에 임하기전 통찰력을 가지고 철저한 준비와 뛰어난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 전투에서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줌으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불패의 신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기록정신
기록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전해 줄뿐 아니라,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때문에 올바른 역사기록을 남긴 인물들은 후대 사람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을 하는 셈이다.

이순신 장군은 무관임에도 이러한 선물을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한 사람이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 까지 약 7년간 진중에서 직접 일기를 기록하였다. 이렇게 기록된 난중일기와 임진왜란 해전상황을 아뢰는 장계초안인 임진장초는 유성룡의 징비록, 선조실록과 함께 임진왜란 3대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사투를 넘나드는 전쟁 속에서 장수가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놀라운 기록정신을 가진 장군은 이렇게 훌륭한 기록을 남겨 주었다.

난중일기에는 진중 일기답게 전라좌수영 및 통제영의 군영생활, 여러 해전의 군사전략과 해전상황기록,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 등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장군의 감정과 생각이 담백하게 기록되어 있어 인간 이순신의 사상과 면모를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최고의 자료가 되고 있다.

매년 1권씩 작성된 7권의 난중일기는 임진장초, 장군의 편지를 모은 서간첩과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현대에도 이순신 장군의 문집은 다양하게 편집, 출판되어 장군을 연구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


나라사랑, 백성사랑

32세에 무관의 길에 들어선 이순신 장군은 국토수호 및 나라사랑에 일생을 헌신하였다. 계급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변방의 작은 관직에 있을 때에도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임진왜란 발발 이후에 는 조선 수군의 수장으로서 나라의 바다를 목숨걸고 지켜내었다.

무관으로써 장군의 나라사랑 길은 평탄치 않았다. 상관들의 모함으로 파직과 백의종군을 경험하기도 하였으며, 해전에서 연승하며 위기의 나라를 구해내는 큰 공을 세우지만, 죄인으로 몰려 처형 직전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힘든 시련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장군은 1598년 11월 퇴각하는 일본군을 맞아 노량해전 선상에서 전사하기까지 나라사랑을 굳건히 실천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굳은 나라사랑은 또한 백성사랑으로 이어진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장군은 항상 백성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였으며,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며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난중일기를 비롯한 여러 관련 기록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만일 왜선을 모두 불태워 왜적을 도망할 곳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도적이 되게 한다면 숨이 있는 우리 백성들이 살육을 당할지도 모르므로 잠시 1리쯤 물러 나와 밤을 지냈다."-견내량파왜병장, 7월17일

1592년 7월 이순신 장군은 역사적인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해전에서 대승을 거둔다. 장군은 전투 중에 적선을 모두 파괴하지 않고 한 두 척을 남겨두는데, 이는 도망할 곳 없는 적들이 우리 백성들을 살육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이후에도 일관되게 여러 차례 목격된다.

다음은 명량해전을 앞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백성들을 먼저 안전하게 피난시키는 장군의 모습이다.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띄워 보내서 피난민들에게 어서 뭍으로 올라가도록 타이르라고 하였다." -난중일기 1597.9.13

3일 후 조선수군은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선과 맞서 싸우는 명량해전을 치르게 된다.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재건, 나아가 나라의 존폐가 걸린 중요한 전투였다. 장군은 이렇게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도 백성을 먼저 생각한 것 이다. 이는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이 후로도 이순신 장군은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을 보호하고, 이들이 군의 보호 아래 어로와 농사를 통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등 한결같은 마음으로 백성을 돌보았다.

이순신 장군의 나라사랑 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장군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모든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돌보는 실천적인 나라사랑의 삶을 보여주었다.

장군의 명언 / 시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

옥포 앞 바다에서 첫 해전을 앞둔 조선 수군 장수들에게 신중하고 침착하게 전투에 임할 것을 당부하며 이른 말.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시 조선 수군의 첫 승리이자, 조선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 (옥포파왜병장, 5월 10일 기록)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사옵니다"

원균 휘하의 조선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거의 전멸하자, 선조는 “수군을 파하고 육전에 힘쓰라”는 교서를 내린다. 그러나 이순신은 수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터, 수군이 존속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 후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1척의 배를 더 추가하여, 13척의 배로 수백 척의 적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다. (이충무공행록 기록)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 큰 해전을 치러야 하는 수군의 장수들에게 굳은 정신력을 가지고 싸움에 임할 것을 당부하며 이른 말. 다음 날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은 위와 같은 결사의 정신으로 전투에 임하여, 13대 133이라는 엄청난 전투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한다.(난중일기 1597. 9.15 기록)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유언. 1598년 11월 19일 퇴각하는 적과 노량 앞바다에서 대전을 치르는 선상에서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죽음의 순간에도 아군의 동요를 염려하며 곁에 있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에게 위와 같은 말을 유언으로 남긴다.(이충무공행록 기록)


한산도가(閑山島歌) (난중일기)

閑山島月明夜 上戍樓: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憮大刀 深愁時: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何處一聲羌笛 更添愁: 어디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는 남의 애를 끓나니


한산도 야음(閑山島夜吟)

水國秋光暮(수국추광모) : 넓은 바다에 가을 햇빛 저무는데
驚寒雁陣高(경한안진고) :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하늘 높이 날아간다
憂心輾轉夜(우심전전야) : 근심스런 마음에 잠 못 자는 밤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 새벽달은 무심코 활과 칼을 비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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