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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크의 상품미학 비판

 

일찍이 인간의 감성 내지 취미를 형성해 왔던 예술의 여러 요소들이 이제는 상품판매 전략의 일환으로 모든 상품에 작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미적인 현상에 대한 논의를 순수예술에만 한정시킬 수 없게 된다. 독일의 문화 연구자인 하우크(W. F. Haug)는 '상품미학(commodity aesthetics)' 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논의했다. 그의 상품미학 비판은, 상품생산이 점차적으로 디자인이나 광고에서처럼 미적인 차원을 통합해 가는 과정에서 현대 소비 사회의 '감성적 인식'을 다루게 된다. 하우크는 사회적인 미적 가상과 그로 인한 감성의 정형화 현상을 '상품미학' 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면서, 그 현상을 경제적인 기능 연관에서 설명하고 있다.

 

상품미학의 개요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상품에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두 측면이 존재한다. 사용가치의 측면이란 외적인 대상으로서 그것이 지닌 속성을 통해 인간의 이러저러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능력을 의미하며, 교환가치의 측면이란 화폐나 혹은 여타의 목적들과 거래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상품의 이 두 측면은 마르크스가 그의 <자본론>에서 분석하듯이, "상품이 스스로를 사용가치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그 전에 자신의 교환가치를 실현해야 하며, 거꾸로 스스로를 교환가치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용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인 상품생산이 지향하는 것은 오로지 교환가치일 뿐이며, 특정한 사용가치의 생산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교환에서도 판매자의 관심은 교환 행위를 통한 현금화의 실현이다. 반면에 구매자의 목적은 상품의 사용가치이기 때문에 교환은 단지 사용가치를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모순관계' 로서, 이 같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상품을 둘러싼 '아름다운 가상' 이 출현하게 된다.

 

상품의 아름다움은 상품이 그 외관과 또 그것을 둘러싼 여러 차원에서 '미적인' 방식으로 사용가치를 약속하는 것이고, 그러한 '사용가치의 객관적인 미적 약속'을 통해서 구매가 매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교환은 사용가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용가치의 약속을 통해서 발생하며, 화폐를 가진 개인은 상품을 둘러싼 미적인 가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상품의 사용가치의 객관적인 약속'을 기초로 하여 사용가치를 보장받을 때 구매자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객관적인 사용가치의 약속만으로 구매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그와 더불어 '상품의 사용가치의 주관적인 약속'이 성립되어야만 구매가 이루어진다. 하우크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욕구를 자본의 권력 확대의 기본 축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란 살아가면서 다양한 '욕구의 충족' 을 요구하며 삶을 계획하고 나름대로의 '자기 정체성' 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상품을 둘러싼 미적 가상은 어떤 약속을 하며, 이때 약속은 하나의 '의미', 예를 들어 사랑이나 행복이나 자유 혹은 지성 등을 가리키는 의미의 방식으로 구매자에게 작용한다. 이때 상품은 이미 구매자에게 단순한 상품이 아니며, 그 주변에 상상의 나래를 펼 가상의 공간이자, 자신의 욕구 충족과 정체설 실현을 위한 주요한 매개물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상품의 사용가치의 주관적인 약속' 을 의미한다. 하우크는 이처럼 상품미학이 인간의 상징적인 미적 행위를 조직함으로써 정체성과 삶의 보람을 기리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상품미학의 문화적 효과' 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상품 주위의 미적 가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기 정체성의 실현이라고 하는 이러한 문화적 효과가 어떤 사회적인 전형을 형성하고, 우리들이 그 전형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맹목적인 소비자가 된다는 점이다. 하우크는 이를 상품미학에 의한 '감성의 정형화 효과' 라고 부른다. 더욱이 독점자본시대의 자본은 단지 교환관계의 모순을 극복하는 차원을 넘어, 계속해서 자기증식을 위해 상품의 미적 측면을 확장, 변형해 나가게 된다. 그리하여 특정한 상표(brand)에 대한 소비가 보여 주듯이, 상품은 이제 단순히 사용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기호가치' 때문에 구매되고 소비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품미학 속에서는 인간의 욕구란 진정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가상적으로만 충족될 뿐이다. 따라서 그 충족은 지속적일 수 없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이 실현되는 것도 아니기에,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의 소비에 매달리게 된다. 하우크는 이처럼 상품미학이 욕구의 가상적인 만족을 통해 끝없이 반복되는 욕구의 피드백에 사로잡히게끔 대중의 감성을 장악하는 현상을 '감성 일반의 관료체계' 라고 부른다.

 

 

상품미학과 대중문화의 연관성 및 그에 따른 미학적 판단의 필요성

상품미학에 대한 논의를 문화산업으로서의 대중문화와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상품미학은 '감성의 정형화 효과'와 '감성 일반의 관료체계' 를 통해, 문화자본과 유행 형식의 상호공존관계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말하자면, 미적인 형식이 상징적인 힘을 발휘하여 문화자본의 독점을 야기하고, 문화적 독점은 다시 특정한 미적 형식의 안정적 지배를 강화하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하는 유행 형식 역시 마찬가지로 문화자본으로 전환된다.

 

그렇다면 소비주의와 대중적인 쾌(快)를 강조하는 문화 대중주의적 문화 연구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대중들은 일상에서 상품미학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자생적인 미적 감수성을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비 속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적 수용자의 능동적인 의미 구성 과정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서 발생되는 대중적인 '쾌' 의 질과 그 의미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짐 맥기건(Jim McGuigan)은 문화적 대중주의가 문화 소비에 대한 역사적 혹은 경제적 이해도 없이 단지 해석의 전략에만 열중하는 '무비판적 대중주의' 로 표류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한 바 있다. 무비판적 대중주의의 소비 위주의 시각은 소비자의 권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대중문화에 대한 무비판적인 예찬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단순히 문화적 소비를 너무 중요시하고 대중적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예찬함으로써 '질적인 판단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고 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더 이상 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무비판적 대중주의가 부추기는 포스트모던적 불확실성을 비난하면서 "미학적, 윤리적 판단을 이 토론에 다시 개입시키는 것은 문화적 대중주의의 무비판적 표류 및 소비자 멋대로의 주권이나 질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치유하는 중요한 해결책이 된다." 고 주장했다.

 

-출처 : 문화비평과 미학(최연희·정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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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페르시아에 이어 인도, 파키스탄까지 비슷한 문화권으로 엮을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지역적으로 근접한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슬람의 영향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같은 '동양'이면서도 아랍과 페르시아는 중동, 인도와 파키스탄은 (서)남아시아로 구분된다. 게다가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지만 인도는 힌두교 국가이다. 인도인구의 80% 이상이 힌두교도이고, 인도를 찾는 수많은 여행객도 어렴풋하게나마 힌두교의 정신세계에 호기심 어린 관심을 가지고 힌두교의 대표적인 성지인 바라나시에 몰려들어 인도사람들과 함께 갠지스강에 몸을 담그곤 한다. 그러나 이슬람을 이야기할 때 인도를 빼놓고 얘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도 인구의 10% 이상이 이슬람이기 때문이다. 10%면 얼마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인도 인구가 11억이 넘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이슬람교도가 인도에 살고 있는지 금방 계산이 나온다. 실제로 인도는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이슬람교도가 많은 나라이다. 게다가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 다양한 문화, 예술분야에서 이슬람의 영향, 즉 아랍과 페르시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7세기부터 세력을 확장하여 아랍, 페르시아, 터키에 비슷한 문화를 심은 이슬람이 인도에까지 이슬람 왕조를 세우게 된 것은 12세기부터였다. 이때부터 아랍과 페르시아문화가 서서히 인도로 들어오게 되는데, 특히 인도 최대의 이슬람 왕국인 무굴제국(Mughul, 1526~1857)이 힌두교 관용 정책을 펼치면서, 힌두문화와 이슬람문화가 자연스레 섞이기도 하고 인도의 이슬람문화가 한껏 꽃피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유명한 타지마할 역시 무굴제국이 낳은 이술람건축의 걸작으로 황제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이 사랑했던 왕비를 추모하며 지은 궁전형식의 아름다운 무덤이다. 1700년경 무굴제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현재 인도 영토의 대부분을 손에 넣게 되지만 남부까지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그 결과 이슬람은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아그라를 중심으로 북인도와 지금의 파키스탄에서 뿌리를 내린 반면, 인도 남부는 여전히 힌두세력이 강하게 유지되었다.

무굴제국 지도/ⓒ네이버지식백과

무굴제국이 무너지고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한 후에도 인도의 이슬람세력은 인도 북부에 그대로 남아 인도 북부와 남부 사이의 문화적 차이를 지속시켰으며, 정치적으로는 인도이슬람연맹을 조직하여 이슬람 국가 독립을 도모하게 된다. 결국 1947년 인도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로서 인도에서 분리,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이슬람의 영향은 인도에 그대로 남아 지금까지도 인도 북부와 남부는 문화적으로 구별되는 요소가 상당히 많다. 예컨대, 인도 내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힌두어와 영어 외에도 10여 가지의 공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북부는 힌두어와 그와 가까운 언어가 주로 사용되며 남부는 드라비다어족의 언어가 주로 사용된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도의 고전음악양식이 남부와 북부가 서로 달라, 남부의 고전음악인 카르나틱(Carnatik)음악은 힌두전통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면, 북부의 고전음악인 힌두스타니(Hindustani)음악은 힌두와 이슬람, 인도와 페르시아문화가 어우러져 만들어진 다문화융합의 정수이다. 따라서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인도문화의 특성과 그를 대표하는 음악 역시 카르나틱음악 보다는 다문화융합적인 힌두스타니음악이 보다 인도음악의 특성을 잘 나타내주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타르와 타블라, 라가와 탈라

 

동양권 음악 중에 서양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가장 인기 있는 음악은 어느 나라 음악일까?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인도음악을 꼽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리고 인도음악을 꼽는 사람들이 곧바로 떠올리는 인도음악의 이미지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국적이면서도 오랜 전통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음악, 명상의 세계로 초대하듯 편안하고도 아름다운 음악, 그래서 그 유명한 비틀스의 멤버 조지 해리슨을 한없이 인도로 이끌어간 음악, 그런데 바로 이 유명한 인도음악은 사실상 힌두스타니음악, 즉 북인도의 고전음악이다. 힌두스타니음악만큼이나 유명해져 인도음악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힌두스타니음악에 쓰이는 두 개의 악기, 즉 선율악기인 시타르와 타악기인 타블라가 바로 그것이다.

시타르/ⓒ전북일보
타블라/ⓒ위키백과

시타르(sitar)는 페르시아 고전음악에 사용되는 선율악기, 세타르(setar)에서 파생된 악이이다. 이름도 비슷하고 목이 긴 류트(lute) 계열이 라는 점도 비슷하지만, 인도의 시타르는 페르시아의 세타르보다 목의 폭도 훨씬 넓고 울림통도 훨씬 크며 소리 역시 많이 다르다. 인도음악 하면 떠오르는 신비스러운 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이 시타르인데, 커다란 울림통 덕분에 소리가 멀리 퍼져나가며 선율을 만들어내는 6~7개의 현 외에 9~13개의 울림현(혹은 공명현)이 있어서 신비로운 느낌이 배가된다. 또한 시타르연주를 들어보면 주선율 외에 저음으로 계속 이어지는 지속음을 들을 수 있는데, 지속음 위에서 연주되는 선율, 그리고 그 선율을 "웅웅"거리면서 받쳐주는 울림현의 소리가 힌두스타니음악의 독특한 맛을 자아낸다.

시타르에 더해지는 타블르(tabla) 소리 또한 힌두스타니음악의 매력을 한층 더 살려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드럼을 뜻하는 아랍어, 타블(tabl)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타블라는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작은 드럼세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연주한다. 단 두 개의 작은 드럼에서 나온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소리를 뽑아내며 현란한 리듬 세계를 펼쳐 보이는데, 그 안에서 선율감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타블라음악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타블라음악은 대부분 악보 없이 구전으로 전승된다. 한국의 장구를 연주할 때 "덩덩덕쿵덕"과 같은 구음을 붙이며 연주하듯, 타블라도 "다다떼떼 다다뚠나"와 같은 구음을 붙여 연주하는데, 타블라의 구음은 타블라를 두드리며 내는 소리만큼이나 흥미롭기 그지없다. 타블라는 북인도 고전음악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인도음악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인도 최고의 타악기로 인도와 파키스탄음악 그리고 서구음악과의 다양한 퓨전음악에까지 두루 활용되고 있다.

 

아랍·페르시아 연장선상에서 인도음악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아랍·페르시아음악의 특징이 인도음악에서도 보이기 때문이다. 즉 미분음과 풍부한 장식음이 쓰이며, 아랍의 마캄, 페르시아의 다스트가에 해당하는 선법체계인 라가(raga)를 바탕으로 음악이 만들어진다. 산스크리트어로 색채라는 뜻의 라가는 북인도 고전음악은 물론, 남인도 고전음아그이 핵심요소로서 마캄이나 다스트가와 같이 다양한 라가에 따라 기본적으로 쓰이는 음계나 중요한 선율의 윤곽이 정해지지만 연주자의 솜씨에 따라 같은 라가도 다르게 연주된다. 따라서 인도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라가가 연주자에 따라 어떻게 연주되는지를 즐기기 위해 공연장을 찾곤 한다. 보통 라가연주는 앞서 살펴본 수피댄스의 반주음악과 비슷한 음악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먼저 시타르 혼자 리듬감 없는 즉흥연주로 라가에 사용될 음들을 저음부터 고음까지 천천히 훑으며 연주하다가, 리듬감을 가미하여 연주하기 시작하면 타블라가 가세하고 점점 속도가 빨라지면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때 타블라연주는 선율체계가 아닌 리듬체계에 근거해 연주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인도의 리듬체계를 탈라(tala)라고 부른다. 산스크리트어로 손뼉을 친다는 뜻의 탈라는 아랍·페르시아음악에 없는 요소이다. 선율체계인 라가와 리듬체계인 탈라를 바탕으로 시타르와 타블라가 즉흥성을 더하면서 서로 풀어나가는 음악적 묘미가 인도음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라비 샹카와 조지 해리슨

 

인도음악이 전 세계에 퍼지게 된 것은 1950년대 중반, 인도 정부가 인도음악가들을 해외로 파견하여 공연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물론, 무굴제국 시기인 18~19세개, 인도를 두고 영국과 프라스의 패권다툼이 벌어지면서 인도문화와 유럽문화 간의 통로가 일찌감치 생겨났었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한 인도음악은 빠른 속도로 서구인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특히 클래식, 팝을 망라한 전문음악인들은 인도음악에 즉시 매료되어 직접 인도를 방문하기까지 하는데, 그 첫 번째 주인공이 바로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 1916~1999)이었다. 인도음악에 감명을 받은 메뉴인은 직접 인도를 방문하는가 하면, 인도음악가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음악회를 열었고, 이를 계기로 인도음악가들의 미국 진출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힌두스타니음악을 연주하는 시타르 연주자로서 인도음악을 서방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라비 샹카(Ravi Shankar, 1920~)이다.

라비 샹카는 비틀스의 멤버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과의 만남으로도 유명한데, 사실상 서구세계에서 시타르가 유명해진 것은 조지 해리슨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조지 해리슨은 우연한 기회에 시타르연주를 듣고는 곧 시타르에 반하게 된다. 그는 즉시 시타르를 사서 혼자 연습하여 비틀스의 새 노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1966)>에서 시타르를 연주해 넣었고, 그리고는 얼마 후 영국에 온 라비 샹카를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을 계기로 인도로 가는 해리슨의 끝없는 여정이 시작된다. 해리슨은 장기간 인도에 무물면서 샹카에게서 시타르를 배웠고, 인도철학과 종교에 깊이 심취하였다. 힌두교로 귀의한 후에는 자신의 신앙을 음악 속에 담아내며 죽을 때까지 인도를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며 살았고, 해리슨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갠지스강에 뿌려졌다.

 

샹카와 해리슨, 두 거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언급하게 되는 공연이 하나 있는데, 1971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가 그것이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으로부터의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던 중이었고, 전쟁으로 인한 난민들이 인도로 대거 몰려들었다. 샹카는 해리슨에게 방글라데시 난민들을 돕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자선콘서트를 열자고 제안했고,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인 해리슨은 최고의 대중음악 스타들을 모아 성공적으로 콘서트를 치러냈다. 사실상 이 공연을 계기로 라비 샹카는 서방세계에, 그것도 록음악 팬들을 비롯한 대중음악 청중에게까지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서구음악가들과의 공동작업을 활발하게 펼쳐나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때의 공연은 라이브로 녹음되어 지금까지도 판매되고 있는 명반이 되었으며, 라비 샹카와 조지 해리슨 외에도 에릭 클랩튼, 밥 디런, 빌리 프레스턴 등의 음악을 모두 들을 수 있다.

 

인도영화와 인도대중음악

 

인도음악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면서 인도음악과 서양음악의 만남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사실상 인도에 가면 TV나 라디오, 길거리에서 힌히 들을 수 있는 음악은 전통적인 힌두스타이음악이 아닌 인도음악과 서양대중음악이 결합된 일종의 동서양 퓨전음악인데, 이 퓨전음악의 거의 대부분은 인도영화에 나오는 영화음악이다.

 

인도영화를 흔히 볼리우드(Bollywood)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인도의 초기 영화산업이 봄베이(뭄바이)에서 성행했었기 때문에 봄베이와 할리우드를 합쳐서 탄생된 말이다. 원래 볼리우드는 봄베이에서 제작된 힌디어 영화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인도영화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지금은 영화 중심지가 마드라스(첸나이)로 옮겨졌고 사실상 볼리우드는 인도영황의 한 부분만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볼리우드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볼리우드라는 말 자체가 인도영화를 할리우드의 짝퉁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인도문화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ㅂ잗고 있기 때문에 볼리우드라는 말이 예전처럼 자주 사용되지는 않는다.

 

현재 인도영화산업은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매년 1천 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되어 인도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스크린에서 상영된다. 영화감상은 인도사람들이 가장 즐겨하는 문화생활이며, 특히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인도사람들에게 인도형화는 최고의 인기품목이다.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사람들에게 한국드라마가 최고의 인기품목인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인도영화를 보면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주기적으로 노래가 삽입된다.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세팅이 된 상테에서 배우들이 춤추며 노래한다. 마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하다. 물론 노래는 립싱크이다. 실제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은 플레이백 싱어(playback singer)라고 부르는데, 음악을 작곡하고 편곡하는 음악감독과 함께 인도대중음악을 이끌어가는 대중스타들이다. 인도영화에서 쓰이는 음악은 보통 동서양음악의 독특한 퓨전인데, 서양의 현악기, 관악기, 기타나 키보드는 물론, 시타르와 타블라도 사용된다. 서양음악의 화성도 사용되고 록, 재즈, 서양클래식음악 등 장르를 막론하고 다양한 음악적 재료를 사용한다. 말하자면 좋은 소리는 다 활용한다. 그러나 서양음아그이 색채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인도식으로 사용하여 인도만의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낸다. 노래가사는 한국가요나 별반 다를 바 없이 낭만적인 사랑을 가장 많이 담아내며, 영화 줄거리도 남녀간의 사랑을 중심으로경쾌하게 진행된다. 그리고 대부분 해피엔딩이다.

 

인도의 대중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인도영화 한 편을 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영화 한 편을 소개하자면 영어로 제작된 <신부와 편견(Bride & Prejudice, 2003)이 좋을 것 같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각색한 영화이다. 여자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이쉬와리아 라이(Aishwarya rai, 1973~)를 볼 수 있는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다. 미스월드 출신으로, 줄리아 로버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극찬한 바로 그 배우이다.

 

카왈리 황제, 누스랏 파테 알리 칸

 

인도에서 이슬람의 종교의식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음악양식이 있을까? 주저할 것 없이 있다고 답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유명한 카왈리(qawwali)가 있다. 메시지를 뜻하는 아랍어, 콸(qual)에서 유래한 카왈리는 북인도와 파키스탄 이슬람교도들이 바치는 일종의 찬송가 같은 음악으로 음악과 춤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슬람의 수피(sufi)의 음악이 인도로 건너와 인도음악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종교음악이다.

 

아랍권의 수피들이 빙글빙글 도는 춤을 추면서 신과의 교감을 이루어내듯, 북인도와 파키스탄의 이슬람교도들은 카왈리를 연주하면서 신과의 교감을 이루어낸다. 카왈리는 주로 수피 성인의 성지에서 연주되지만 결혼식과 같은 의례에서도 사용되며, 라디오나 TV 그리고 음반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다.

 

카왈리음악은 노래와 기악반주로 구성된다. 한 명의 리드싱어가 전체 카왈리를 이끌어가고, 두명 혹은 그 이상의 보조싱어가 박수를 치면서 노래를 부른다. 이들의 박수소리는 박자를 맞추는 기능 이상의 역할을 한다. 박수소리 자체가 하나의 기악반주로 들릴 만큼 카왈리음악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기악반주에는 하모니움(harmonium)과 타블라가 쓰인다. 하모니움은 아코디언을 바닥에 눕혀놓고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오른손으로 건반을 여누하고 왼손은 앞으로 죽 뻗어 주름박스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소리를 만들어낸다. 타블라는 역시 인도 타악기의 챔피언으로 카왈리연주에서도 그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카왈리는 규칙적인 박자가 가장 큰 특징인데, 싱어들의 박수소리와 타블라에 맞추어 규칙적인 박자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속도가 붙으면서 리드싱어와 함께 보조싱어들도 노래에 참여하여 합창을 이루어내는데, 반복되는 리듬과 현란한 타블라연주, 박수소리와 함께 점점 속도를 더해가며 강렬하게 내뱉는 노래소리는 신과의 일치를 갈망하는 이들의 염원을 그대로 전해준다. 바로 이러한 카왈리의 매력 때문에 카왈리는 북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이슬람이라는 범주를 넘어 전 세계의 공연장에서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바로 그 인기몰이를 주도한 사람이 파키스탄의 카왈리 스타, 누스랏 파테 알리 칸(Nusart Fateh Ali Khan, 1948~1997)이다.

카왈리가 북인도와 파키스탄의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카왈리를 오로지 파키스탄음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바로 누스랏 파테 알리 칸 때문일 것이다. 카왈리의 황제라고도 불리는 누스랏은 대대로 카왈리를 연주하던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려수부터 카왈리 음악전통을 습득하였고, 가족과 함께 카왈리를 공연하면서 자라났다. 이미 파키스탄과 인도에서 카왈리의 리드싱어로서 이름을 알리고 있었지만, 서방세계에 그의 이름이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서구음악가들과의 공동작업이 성공을 거두면서부터였다. 이는 인도의 라비 샹카가 거쳐간 행로와도 많이 비슷한데, 사실상 누스랏 파테 알리 칸과 라비 샹카는 '동양'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다. 누스랏이 함께 작업한 대표적인 서양음악가로는 캐나다의 마이클 부룩(Michael Brook), 영구의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 미국의 에디 베더(Edie Vedder)를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록 밴드 펄 잼(Pearl jam)의 리드싱어인 에디 베더와 함께 작업한 음악이 영화 <데드맨 워킹(Dead Man Walking, 1995)>의 OST로 사용되어 유명해졌다. 이 영화에서 누스랏 파테 알리 칸과 에디 베더는 타블라와 기타연주에 맞추어 <사랑의 얼굴(The Face of Love)>과 <머나먼 길(The Long Road)>을 노래한다. 누스랏의 음악세계를 엿볼 수 있는 성공적인 동서양 퓨전이긴 하지만, 누스랏의 음악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것은 역시 카왈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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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웨토 가스펠 콰이어/ⓒ한겨레신문

소웨토 가스펠 합창단(Soweto Gospel Choir)이 한국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다. 보통 가스페이라고 하면 미국의 흑인(African American)음악이라고 한정지어 생각하기 쉬운데, 가스펠음악이 미국 못지않게 사랑받는 곳이 바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소웨토 가스펠 합창단 역시 남아프리카공화국 안의 흑인 집단거주지로 유명한 도시인 소웨토에서 시작된 가스펠 합창단이다. 가스펠이라는 장르가 아무래도 서양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친숙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다른 아프리카음악보다 쉽게 알려질 수 있는 음악이기는 하지만, 서구식 음악양식에 가깝기 때문에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음악으로는 어뜻 떠오르지 않는 음악장르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스펠과 같이 서구식 다성부 함창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대표하는 독특한 음악장르가 있는데, 음부베(mbube) 혹은 이스카타미야(iscathamiya)라고 부르는 아카펠라음악이 바로 그것이다.

음부베의 역사는 192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족구성은 다양한데, 그중에서 줄루(Zulu)사람들은 한창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와 광산이나 공장에서 새로운 노동자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가족을 고향에 두고 홀로 도시에 상경해 있던 남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주말이면 남자들끼리 모여 춤과 노래로 소일거리를 삼았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탄생한 것이 반주 없이 남자들끼리 다성부로 노래하는 아카펠라음악이었다. 이들은 아예 몇몇 사람들끼리 아카펠라 그룹을 만들어 서로 대회를 벌이기도 했는데, 1930년대에는 아카펠라 대회가 줄루 노동자들의 합숙소에서 펼쳐진 진귀한 풍경이 되었다. 처음에는 나탈(Natal)이라는 도시에서 시작되었는데, 곧 요하네스버그의 줄루 노동자들에게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말 어느 아카펠라 그룹의 레코딩이 전국을 휩쓸면서 줄루 아카펠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대표하는 음악장르가 되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솔로몬 린다(Solomon Linda, 1909~1962)와 오리지널 이브닝 버즈(Original Evening Birds)이다.

솔로몬 린다와 오리지널 이브닝 버즈의 1939년 레코딩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전역을 휩쓸면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는데, 그중 솔로몬 린다가 작곡한 <음부베(Mbube, 사자)>라는 노래는 누구나 들어도 알고 있을 법한 노래로서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곡이다. 솔로몬 린다와 오리지널 이브닝 버지는 새로운 양식의 아카펠라를 선보였는데, 리드싱어가 높은 음역에서 찌르는 듯한 목소리로 솔로 선율을 뽑아내고 4성부 합창이 솔로를 받쳐주는 형식이었다. 4성부 합창에서는 베이스 성부가 강화되었고, 더불어 부드러우면서도 정교하게 만들어진 춤도 곁들여졌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아카펠라형식이 줄루 아카펠라의 전형이 되면서 아예 <음부베>라는 노래가 음악장르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음부베>라는 노래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민요수집을 하던 미국의 학자가 <음부베> 노래를 미국으로 가져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미국의 포크뮤직 그룹이었던 위버스(The Weavers)는 이 곡을 단순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요라고 생각하고는 1951년 <윔모웨(Wimoweh)>라는 이름으로 이 노래로 발표하였고, 이어 토큰스(The Tokens)라는 미국의 팝 보컬 그룹이 1961년 같은 노래를 리메이크한 <오늘밤 사자는 잠들고(The Lion Sleeps Tonight)>를 발표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에도 여러 팝 그룹들이 이 노래를 불렀고, 디즈니 영화 <라이언 킹(The Lion King, 1994)에서 이 노래를 영화 OST로 사용하면서 이 곡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으나 동시에 저작권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음부베>라는 노래는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발표된 지 60년이 지나서야 저작권 문제가 일어날 정도로 노래의 진원지는 모른 채 그저 미국의 팝송으로만 인기를 누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와 다르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줄루 아카펠라로서 음부베라는 음악 장르가 전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Ladys-mith Black Mambazo)가 서구에서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1960년대경에는 음부베 대신 이스카타미야(iscathamiya:부드럽게 걷는다는 뜻의 줄루어)라는 말로 줄루 아카펠라를 일컫고 있었는데,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가 1970년대를 풍미한 최고의 이스카타미야 그룹이었다. 남아프라카공화국을 넘어 전 세계에 이스카타미야와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의 이름을 각인시킨 것은 사이먼 앤 가펑클(Simon&Gafunkel)로 이름을 알렸던 미국의 팝 뮤지션 폴 사이먼과의 인연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폴 사이먼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여행하다가 이 그룹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와의 공동작업으로 <그레이스랜드(Graceland, 1986)> 음반을 발매하여 그래미상까지 받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특히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의 리더인 조세프 샤발랄라(Joseph Shabalala)와 폴 사이먼이 공동으로 작곡한 노래, <홈리스(Homeless)>와 <그녀 신발 밑창엔 다이아몬드(Diamonds on the Soles of her Shoes)>는 줄루 아카펠라의 매력을 한껏 발휘하며 전 세계의 사랑을 듬뿍 받은 노래들이다. 폴 사이먼과의 공동작업 이후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는 꾸준한 활동을 통해 두 차례 그래미상을 거머쥐는 등 세계적인 그룹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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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사막과 열대우림 사이에 형성된 사바나 지역, 그중에서도 대서양 연안의 서아프리카지역은 유럽, 아랍, 아프리카 등지의 문명이 교차하며 학술과 문화가 꽃피웠던 곳으로, 아프리카의 여러 왕국들이 이 지역에 세워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13~16세기에 번성했던 말리왕국이었다. 말리왕국에는 위계적인 사회계층이 확립되어 있었는데, 사회지도층인 왕족과 귀족, 그리고 이들을 섬기는 노예가 있었고, 그 두 계층 사이에 기능직에 종사하는 사람들, 즉 조선시대의 중인과 같은 중간계층이 있었다.

 

서아프리카 지역 말리왕국 전성기 영역/ⓒwikipedia

바로 이 중간계층 중에 잘리(jali) 혹은 그리오(griot)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구전역사가이자 시인이자 음악가였다. 왕족이나 귀족의 후원하에 활동하던 잘리는 역사를 말로 전해주기도 하고 후원자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동시에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주는 음유시인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었다. 모든 왕에게는 개인 잘리들이 있었고, 부유한 귀족도 잘리들을 거느렸고, 또한 마을마다 잘리들이 있었다. 이들이 주로 연주하던 악기는 코라(kora)라는 현악기이다. 코라는 커다란 박을 반으로 자른 것을 공명통으로 하여 그 위로 붙여놓은 긴 목에 21개의 줄을 매달아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줄을 뜯어 소리를 낸다. 양쪽 엄지손가락으로 베이스와 멜로디를 연주하고 양쪽 검지로 잔가락을 붙여 연주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연주만으로도 다양하고 풍부한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도 코라는 말리, 세네갈, 기니아, 감비아에서 연주되는 대표적인 전통악기이며, 잘리전통 또한 변화를 겪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코라(kora)/ⓒwikipedia

 

현재 잘리는 마치 프리랜서같이 결혼식 등 여러 가지 초청에 응하면서 공연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잘리는 여전히 지나간 역사 속의 사건과 인물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구전역사가로서, 그리고 사회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서슴지 않는 사회비평가로서, 또한 음악가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말리의 유명한 여성 잘리 칸디아 쿠야테(Kandia Kouyate, 1958~2004)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사회비판을 하기로 유명한데, 이 때문에 위험한 여성이라는 예명이 붙어다닌다. 쿠야테는 말리왕국시대부터 내려오는 잘리 집안의 이름으로 쿠야테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예외 없이 잘리 출신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잘리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잘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흔치는 않지만 잘리 출신이 아니더라도 잘리가 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말리 출신의 유명한 싱어송 라이터인 살리프 케이타(Salif Keita, 1949~)이다. 그는 말리왕국을 세운 순자타 케이타(Sunjata Keita)의 후손으로 말리왕국시대였다면 음악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서아프리카음악과 서구 팝음악을 결합시킨 음악으로 아프리카 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은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코라와 함께 기억해둘 만한 아프리카의 전통악기는 음비라(mbira)이다. 양손의 엄지손가락으로 연주하기 때문에 일명 엄지피아노라고도 불리는데, 피아노와는 완전히 다른 악기이므로 별로 적합한 예명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쿠바의 전통음악인 손(son)에 쓰이는 악기 중 하나인 마림불라가 바로 음비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음비라도 코라와 같이 박을 공명통으로 사용하는데, 공연에서는 공명통을 사용하지만 큰 소리를 낼 필요가 없을 때에는 공명통 없이 연주하기도 한다. 공명통 안에는 금속으로 만든 얇은 건반이 네모난 판 위에 붙어 있어 이것을 엄지손가락으로 튕기면서 연주를 하는데, 건반 아래에 병뚜껑 같은 것이 부착되어 있어 간반을 튕길 때마다 "츠~츠~" 하는 울림을 만들어 낸다. 음비라는 짐바브웨를 대표하는 전통악기로서 조상들의 영혼을 불러오는 제의에서 주로 연주된다. 짐바브웨에서는 조상신들이 보이지는 않지만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후손들을 돕기도 한다고 믿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사람들과 조상신을 연결시키는 의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마비라(mabira)라고 불리는 이 의식은 보통 밤새도록 이어지는 마을행사이며 여기에서 행하는 음비라연주와 춤은 조상신이 내려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음비라(mbira)/ⓒwikipedia

 현재 음비라는 마비라에서도 연주되지만, 마비라와 상관없이 무대 위에서도 자주 연주된다. 1980년 짐바브웨의 정식 독립 이후 음비라가 짐바브웨의 문화적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 이전, 백인정권하에서는 음비라음악이 흑인음악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때문에 음비라연주 자체가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비라를 연주하며 영어가 아닌 짐바브웨 조상들, 즉 쇼나(Shona)족의 언어인 쇼나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음악가가 있었다. 현재 세계적인 음악가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토마스 마푸모(Thomas Mapfumo, 1945~)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음비라와 쇼나어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가사 자체를 반정부적인 내용으로 만들어 부르면서 아예 자신의 음악양식을 치무렝가(chimurenga)라고 이름 붙였다. 쇼나어로 저항이라는 뜻이다. 1980년 총선과 함께 영국으로부터 정식 독립하였으나 이후 마푸모는 여전히 불안정한 짐바브웨의 정치, 사회문제를 치무렝가음악으로 풀어내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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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기악곡을 통해 작곡가 내면의 목소리와 음악적 이상을 추구하던 19세기 작곡가들은 오페라를 통해서도 낭만적인 정서를 드러내고자 노력하였다. 교향시가 하나의 주제와 연관된 다양한 표현들을 악장 구분 없이 하나로 쭉 연결시킴으로써 작곡가의 의도를 돋보이게 한 것같이 막의 장면과 장면, 노래와 노래 사이에 생기는 단절감(휴지)이 드라마에 몰입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 바그너는 한번 막이 올라가면 쉼 없이 계속 진행되는 새로운 형태의 오페라, 악극을 선보이게 된다.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위키백과

 

악극은 음악과 시, 연극, 미술, 춤, 건축 등의 예술장르를 통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음악극으로 자매예술간의 벽을 허물고 개별예술들을 하나로 융화시키는 '종합예술(total artwork)'을 모든 예술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로 본다. 바그너가 종합예술의 개념을 강조한 이유는 카메라타와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연극을 오페라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카메라타와 바그너 모두 고대 그리스극을 목표로 삼았지만 카메라타가 음악이 드라마의 전개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바그너는 음악을 구심점으로 극의 다른 요소들이 통합되어야 한다는 상반된 결과에 도달한다.

 

그리고 대본가가 가사를, 작고가 음악을 만들기 때문에 가사와 음악이 상호협력하여 극을 이끌어가지 못하고 가사(언어, 문학)와 선율(아리아, 오케스트라 반주)이 통합되지 못하는 단점을 보완하고자 자신이 직접 대본, 연출, 음악감독 등의 역할을 맡았다. <트리스탄과 아졸데)에서는 드라마로서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극 중에서 갈등의 계기가 되는 중요한 사물이나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똑같은 주제음형을 반복하는 '유도동기(leitmotif)' 기법을 사용, 이후 영화음악이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등장할 때마다 동일한 주제음악이나 주제가를 삽입하는 기법으로 발전한다.

 

영화 '트리스탄과 이졸데' (2006)/(감독)  케빈 레이놀즈/(주연)  제임스 프랭코 ,  소피아 마일즈

 

특히 난쟁이, 지하세계, 마법, 신, 영웅들이 등장하는 북구 설화를 토대로 한 장대한 서사극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바그너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오페라(음악, 드라마)와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음계의 7개의 음으로 된 11, 13화음과 반음계를 사용하여 조성감을 약화시켰고, 바그너 튜바, 베이스 트럼펫, 콘트라베이스 트롬본 같은 새로운 악기들을 등장시켜 새로운 음향에 대한 실험성 또한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바그너 이전의 공연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무대와 같은 높이, 혹은 무대 위에서 연주하였는데 바그너는 오케스트라를 무대 아래에 배치시킴으로 오케스트라 때문에 배우와 관객의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드라마는 계속 진행되는데 노래가 끝나면서 드라마의 연속성이 깨진다고 판단한 바그너는 가수의 노래가 끝나는 동시에 오케스트라가 새로운 노래의 첫 부분을 바로 연주하도록 하여 극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였다. 앞서 언급한 작품 외에 <로엔그린>, <탄호이저> 같은 작품들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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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시대 작곡가들이 단원수가 많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 작곡에 몰두한 데는 만하임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삼마르티니(Giovanni Battista Sammartini, 1700~1775), 슈타미츠(Carl Philipp Stamitz, 1745~1801) 같은 음악가들의 영향이 크다. '만하임 악파(Mannheim school)'로 불렸던 이들은 신곡, 새로운 자극을 좋아하던 당시의 청중을 위해서 곡의 마지막 부분의 극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다이내믹의 변화를 이용하였다. 다이내믹을 이용한 만하임 악파의 독특한 마무리는 '만하임 크레셴도(Mann-heim crescendo)'로 불리면서 당시 많은 인기를 끌었다.

 

 

 

크레셴도(crescendo) : 점점 세게

 

크레센도는 '점점 세게'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인데 만하임 크레셴도는 곡의 피날레(finale) 부분이 시작될 때, 제1바이올린 파트가 연주하고 이후 먼저 연주하던 제1바이올린 파트와 함께 제2바이올린 파트가, 그리고 다시 앞서 연주하던 제1,2바이올린 파트와 함께 비올라 파트가 연주하는 것같이 오케스트라의 악기파트들이 중첩(overlap)되면서 음량이 점층적으로 커지는 기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만하임 크레셴도 연주법에 표시는 되어 있지만 실제 베토벤을 제외한 고전작곡가들은 매우 세게(ff)나 매우 여리게(pp)와 같은 극단적인 다이내맥을 선호하지는 않았다.

 

만하임 그레셴도 연주법

ppp 제1바이올린
pp 제1,2바이올린
p 제1,2바이올린 + 비올라
mp 제1,2바이올린 + 비올라 + 첼로
mf 제1,2바이올린 + 비올라 + 첼로 + 더블베이
f 제1,2바이올린 + 비올라 + 첼로 + 더블베이 + 목관악기
ff 제1,2바이올린 + 비올라 + 첼로 + 더블베이 + 목관악기 + 금관악기
fff 제1,2바이올린 + 비올라 + 첼로 + 더블베이 + 목관악기 + 금관악기 + 타악기

 

만하임 악파에서 유래한 점층적인 음량의 변화는 고전과 낭만시대 교향곡에 영향을 주어 만하임 크레셴도로 끝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교향곡은 오케스트라 전체가 큰소리로 연주하면서 마치게 된다. 그리고 곡의 마지막 부분에 팀파니같이 큰 음량을 내는 타악기를 부가함으로 청중들과 연주자 모두 하나가 되어 같이 흥분하고 음악의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만하임 크레셴도는 연주자가 '세게'와 '여리게'를 모두 다 표현하는 오늘날의 다이내믹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베네치아 악파의 이중합창에서 유래된 '테라스 다이내믹'처럼 만하임 크레셴도도도 악기의 수에 따라 음량이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다이내믹이 섬세하고 풍부한 음악적 표현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악곡에 다이내믹을 표기하기 시작한다. 바로크시대의 음악에 다이내믹 표시가 없는 것과 달리 모차르트 음악에 표시된 아기자기한 다이내믹 표시, '점점 세게' (cresc.)와 '점점 여리게' (dim. 또는 decresc.) 등은 원작자가 표기한 것이므로 연주할 때 다이내믹 표시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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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쿠(雅樂)는 일본의 궁중음악을 말한다. 처음 가가쿠를 들으면, 슬며시 시작해서 슬며시 끝나버리는 음악, 안 맞는 것 같기도 하면서 맞는 것 같기도 한 합주라는 인상을 받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가가쿠에는 그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고 미묘한 미의식이 있다. 일본의 왕조는 천년 이상에 걸쳐 이러한 미묘함을 다듬어 세련된 예술음악으로 발전시켜왔다. 각 악기의 조화, 선율의 흐름, 리듬이나 템포의 모든 요소가 서로 작용하여 가가쿠의 독특한 음색을 만들어내고 있다.

 

가가쿠는 한국의 아악과 같은 한자인 '雅樂'을 쓰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좁은 의미로 문묘제례악을 지칭하는 한국의 아악과는 다르게, 일본의 가가쿠는 크게 세 가지 성격으로 구분된다. 첫째, 아시아대륙으로부터 전래된 음악으로 중국에서 전해준 당악(唐樂)과 우리나라에서 전해준 고려악(高麗樂)이 이에 속한다. 둘째, 일본 고유의 음악과 무용으로 황실의 제례와 이식 등에서 사용되는 가구라우타(神樂歌), 아즈마아소비(東遊) 등이 있다. 셋째, 10~11세기경 일본의 귀족들에 의해서 시작된 가가쿠는 이러한 세 종류의 음악의 총칭이고, 오늘날 가가쿠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당악과 고려악이다.

 

일본에 처음 궁중음악을 전해준 것은 우리의 삼국이었다. 5세기부터 신라, 백제, 고구려에 각각 자국의 음악을 전해주었고, 이후 8세기에 이르러 당에서 음악이 전해졌으며, 그 외에도 인도와 발해 등지에서 전해진 음악이 궁중에서 연주되었다.

 

이렇게 많은 음악이 궁중에서 연주되자 외래음악을 정리하여 일본인의 취향에 맞게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동기로 9세기 중반에 귀족들에 의하여 악제개혁이 단행되었다. 즉 이전의 여러 외래음악 중 중국에서 들여온 당악과 인도계 음악을 합하여 좌방악인 당악(도가쿠)이라고 하고, 삼국과 발해에서 들여온 음악을 합쳐 우방악인 고려악(고마가쿠)이라고 하였다. 이후 당악과 고려악은 연회나 귀족들의 교양음악으로, 궁중을 중심으로 연행되어왔다.

 

원래 당악과 고려악은 모두 음악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는 무악(舞樂)의 형태였다. 그러나 무악을 연행하기 위해서는 무용수들이 복잡한 복장과 무구를 갖추어야 했고, 이들의 무용을 반주하는 연주자들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손쉽게 즐기는 음악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무용 없이 순수하게 악기만으로 연주하는 기악합주형태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관현(管絃)이다. 예전에는 당악과 고려악에 모두 관현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당악에만 남아 있다.

 

관현은 글자 그대로 관현악합주를 말한다. 앞줄에는 타악기 세 종류, 두 번째 줄에는 현악기 두 종류, 그리고 맨 뒷줄에는 관악기 세 종류가 앉는다. 악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객석에서 보았을 때 앞줄 왼쪽에는 작고 두꺼운 쟁반형의 금속제 타악기인 쇼코(鉦鼓), 중앙에는 한국의 좌고와 비슷하게 생긴 다이코(太鼓) 그리고 오른쪽에는 연주의 리더격인 갓코(鞨鼓)의 연주자가 앉는다. 두 번째 줄의 왼쪽에는 가야금과 같이 생긴 고토(箏), 오른쪽에는 비와(琵琶)가 위치한다. 뒷줄 왼쪽ㅇ에는 횡적인 류테키(龍笛), 중앙에는 한국의 피리와 유사한 히치리키(篳篥) 그리고 오룬쪽에는 생황과 같은 쇼(笙)의 연주자가 앚는다. 이렇게 8종류의 정형화된 악기편성을 삼관(三管), 이현(二絃), 삼고(三鼓)라 하여 가장 조화로운 편성으로 여기고 있다. 여기서 조금 특이한 것은 타악기가 맨 앞줄에 위치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앞줄 중앙에 낮는 다이코 주자의 손의 움직임을 보면서 뒷줄의 현악기와 관악기가 맞추어나가기 때문이다.

 

가가쿠의 관현(쇼코, 다이코, 갓코, 고토, 바와, 류테키, 히치리키, 쇼)/ⓒ유네스코한국위원회

 

무용이 수반되는 무악(舞樂)의 경우 현재 각각 당악과 고려악이 있는데,  무용수가 등장하는 방향, 무용수의 의복색상, 악기의 종류 등 외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음악과 무용의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당악과 고려악은 좌방악과 우방악으로 정리되어 내려왔기 때문에, 무용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즉 당악은 좌방무이므로 관객 쪽에서 보았을 때 무대 왼쪽에서 등장하고 본무대에 오르거나 발을 디딜 때도 왼발부터 진행한다. 이에 비하여 고려악은 우방무이므로 무대 오른쪽에서 등장하고 무대에도 오른발부터 오른다.

 

당악의 무악(좌), 고려악의 무악(우)/ⓒ유네스코한국위원회

 

의복색상에서의 차이를 보면, 당악은 무용수가 양(陽)을 나타내는 홍색 계통과 금색옷을 입는 데 비하여, 고려악은 무인이 음(陰)을 나타내는 녹색 계통과 은색옷을 입는다.

 

당악과 고려악은 춤과 반주음악의 관계도 서로 다르다. 당악의 춤은 선율에 맞추어 춤 동작을 기억하는 데 비하여, 고려악의 춤은 한국의 장구와 같이 생긴 산노쓰즈미(三鼓)라는 악기의 리듬형에 맞추어 춤을 춘다. 고려악의 이러한 특징은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한국무용과 상통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궁중음악에도 관현악합주가 있고, 무용반주로 관악합주가 주로 사용되듯이, 일본의 궁중음악에도 관현악합주인 관현이 있고, 무악의 반주로서 관악합주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의 전통음악이 신라시대의 음성서로 시작하여 고려시대의 전악서와 대악서, 조선시대의 장악원을 거쳐 오늘날의 국립국악원으로 계승되고 있듯이, 일본의 가가쿠는 8세기의 가가쿠료(雅樂寮)에서 10세기의 가쿠소(樂所)를 거쳐 현재의 왕립음악기관인 궁내청 식부직 악부(宮內廳式部職樂部)에 의하여 연주,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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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能)는 가부키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가무극이다. 노가쿠도(能樂堂)라는 전용극장에서 노가쿠시(能樂師)라는 전문남성배우들에 의해서 연행된다. 여성의 역할을 맡은 배우는 노멘(能面)이라는 가면을 착용하는데, 이러한 여인의 가면은 노의 상징이 되었다. 노는 노래와 무용이 매우 천천히 진행되고, 대사는 문어체를 사용하며, 무대장치도 단순하기 때문에 작품의 내용을 감상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노는 이야기의 전개보다는 연기자들의 미묘한 움직임과 절제된 감정표현, 신비로운 노의 가면, 우아한 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노래와 반주의 표현양식을 감상하는 무대예술이다.


노의 공연 장면/ⓒ위키백과


노의 기원은 산가쿠(散樂)라는 연희에서 찾을 수 있다. 산가쿠는 나라시대(710~794)에 중앙아시아지역에서 발생하여 중국과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래된 것으로, 노래, 춤, 흉내내기, 마술, 곡예, 인형놀음 등의 다양한 기예를 망라하여 흔히 산악백희(散樂百戱)라고 불린다. 산가쿠의 여러 기예는 점차 분파되어 흉내내기를 중심으로 한 익살스러운 촌극형태로 발전되어 사루가쿠(猿樂)라는 극장르가 성립되었고, 여기에 신앙적인 요소와 문학적이고 가무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현재와 같은 우아한 아름다움을 근간으로 하는 노가 되었다.


이러한 노는 중세에 실권을 쥐고 있었던 무사계급이 주로 향유한 음악이었다. 따라서 노에는 무사들의 심미관과 취향이 반영되어 있고 화려한 귀족문화와는 다른 절제된 세련미와 양식미가 나타나 있다.


노에서 사용하는 가면 노멘/ⓒ위키백과


노는 주연인 시테와 조연인 와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배우는 모두 남자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여성의 역할을 할 때는 가면을 사용한다. 또한 귀신이나 화신의 경우도 가면을 쓰는데, 가면을 쓰고 있는 역할, 즉 여성과 귀신은 반드시 주인공인 시테를 나타낸다. 예외로 주인공인 여성과 함께 다른 여성이 출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은 시테즈레라고 해서 주인공의 동반자를 의미한다. 조연인 와키는 대부분 젊은 남성역할이며, 가면을 착용하지 않는다. 이렇듯 주연과 조연의 역할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를 처음 보는 사람이더라도 어떤 역할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노의 내용은 신화나 역사담, 전설 등에서 비롯되어 장중하고 환상적인 것이 대부분으로, 여기에는 화신이나 귀신 등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노의 배우 구성(다이코, 오쓰즈미, 고쓰즈미, 후에)/ⓒ위키백과


노는 전용무대에서 연행된다. 노의 무대는 사방 약 6m의 정사각형의 본무대와 무대 왼쪽으로 뻗어 있는 복도와 같은 하시가카리라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시가카리는 부수적인 연기구역인 동시에 저승(분장실)과 이승(본무대)을 연결하는 매개수단이기도 하다. 본무대에는 4개의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어 건물 안의 지붕이 있는 무대라는 이중구조 형태이다. 무대의 중앙 뒷면에는 소나무가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대나무가 그려져 있으며, 무대 앞에는 작은 소나무 3그루가 심겨 있다. 이렇듯 지붕이 있는 무대와 나무들은 노가 원래 야외에서 행해지던 예능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노의 음악은 크게 성악(우타이,謠)과 기악반주(하야시, 囃子)로 구성된다. 노래는 6명에서 10명 정도가 부르는데, 선율은 정형화되어 있기 땜누에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노의 발성법은 매우 독특하여 성대를 누르면서 내기 때문에 장중한 느낌을 준다.


반주에는 고쓰즈미(小鼓), 오쓰즈미(大鼓), 다이코(太鼓)라는 세 종류의 북과 후에(笛)라는 횡적을 사용한다. 작은북인 고쓰즈미는 부드럽고 낮은 소리가 나는 반면에, 조금 큰북인 오쓰즈미는 씩씩하고 날카로운 음색이 난다. 오쓰즈미와 고쓰즈미는 짝을 지어 연주하는데, 전자가 "포~" 하고 부드럽게 치면 후자가 "딱" 하면서 강하게 받아주고, 여기에 연주자의 목소리로 "이야" , "하", "요" 등의 추임새를 곁들인다. 다이코는 가장 큰북으로 주로 신, 악마, 영혼 등 인간이 아닌 주인공이 나오는 장면에서 쓰인다. 특히 격렬한 장면에서의 다이코 소리는 극적 효과를 더해준다.


노는 고도로 절제되고 우아한 몸짓과 무용으로 극을 전개해나간다. 단전에 힘을 모은 채 몸의 중심을 낮게 하고 무대 위를 미끄러지듯이 걷는 동작은 보행의 예술이라 불리는 노의 기본이 된다. 이 밖에 노의 동작은 대부분 일정한 형태로 유형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머리를 약간 숙이고 손을 눈보다 조금 윗부분을 가리면 우는 동작을 나타내고, 부채를 가슴 앞으로 대는 동작은 환희와 기쁨을 나타난다. 이외에 부끄러움의 표현, 노여움의 표현, 물에 비추어보는 표현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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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라쿠(文樂)는 샤미센(三味線)음악에 맞추어 인형을 조정하는 대표적인 일본의 전통인형극이다. 가부키와 함께 대표적인 서민예능으로 꼽히는 분라쿠는 에도시대(1602~1867)에 오사카(大阪)에서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400여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분라쿠의 정식명칭은 닌교조루리(人形浄瑠璃)로, 이는 닌교(인형)와 조루리가 결합된 용어이다.


일본음악의 특징 중 하나는 스토리가 있는 서사음악이 매우 발달한 점인데, 목이 긴 세 줄짜리 악기인 샤미센을 반주로 하는 서사음악을 조루리(浄瑠璃)라고 한다. 따라서 닌교조루리란 샤미센의 반주에 노래와 대사를 하고, 이에 맞추어 인형을 조정하는 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조루리 중 분라쿠는 기다유부시(義太夫節)라는 조루리를 반주로 하는데, 기다유부시는 17세기 말 오사카 출신의 다케모토 기다유(竹本義太夫)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분라쿠는 샤미센반주에 세 명의 인형조정자가 함께 인형을 조정한다. 따라서 노래를 담당하는 다유(太夫), 샤미센 연주자, 인형 그 어느 하나가 빠져서도 성립될 수 없다.


인형의 보통 크기는 1.3m 정도로 상당히 큰 편이다. 인형의 내부에는 여러가지 장치가 부착되어 있어 눈, 눈썹, 입, 손가락 마디 등 세밀한 표정과 동작이 가능하다. 인형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움직이는데, 이것은 세 명의 인형조정자가 호흡을 맞추어 동작을 분담하기 때문이다. 리더격인 주(主)조정자는 인형의 등 뒤에 왼손을 넣어 얼굴을 조정하고 오른손으로 인형의 오른손을 다룬다. 왼손을 넣은 인형의 내부에는 여러 장치가 연결되어 있어, 얼굴표정을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다.


분라쿠 인형 조정자는 검은 옷을 입는다/ⓒ위키백과



왼손조정자는 인형의 왼편에 서서 자신의 오른손으로 인형의 왼손에 부착된 사시가네라는 긴 막대를 쥐고 조정한다. 왼손으로는 인형이 무대에서 사용하는 소두구를 다룬다. 다리조정자는 인형의 뒤에서 허리를 낮춘 상태로 서서 인형의 두 다리를 조정한다. 다만 여자인형은 다리가 없으므로 인형의 치맛자락을 잡고 마치 다리가 있어 자연스럽게 걷는 것처럼 다룬다.


오사카 국립분라쿠극장에 전시된 분라쿠 인형/ⓒ위키백과



처음에 분라쿠를 보면 하나의 인형에 세 사람이 붙어 있기 때문에여간 집중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왼손조정자나 다리조정자는 검은 옷과 검은 두건을 쓰므로 사정이 조금 낫지만 주조정자는 얼굴을 드러내고 전통의상을 입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관객의 시선에 그대로 노출된다. 하지만 세 명의 인형조정자의 호흡이 정확하게 맞고 감상에 조금 익숙해지면 무대에서 인형조정자의 존재가 사라지고 인형의 모습이 부각되게 된다.


분라쿠는 인형극이기 때문에 인형이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인형이 희로애락 등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것은 다유의 역할이다. 다유는 샤미센 연주자와 함께 등장인물(인형)의 대사는 물론, 상황설명이나 분위기 묘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말과 노래로 표현한다. 다유는 원칙적으로 한 사람이 나레이터, 성우, 가수의 역할을 모드 소화해내어, 마치 엣 무성영화의 변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분라쿠의 반주음악인 기다유부시의 다유와 사미센 연주자/ⓒ위키백과



샤미센 연주자는 다유의 호흡을 보고 호응하면서 음악을 만들어나간다. 다유의 상태가 좋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 때 샤미센은 단지 다유에 맞추어가기보다는 연주를 힘차게 하여 다유가 우렁찬 소리를 내도록 독려한다. 샤미센은 목이 긴 세 줄로 된 일본의 대표적인 현악기로, 주걱같이 생긴 바치(撥)라는 채로 연주한다.


분라쿠는 이야기 주제에 다라, 고대와 중세를 배경으로 귀족과 무사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역사적인 이야기를 엮은 시대물(時代物)과 근세 서민들 사이에서 얼어난 사건이나 애정, 갈등 등을 그린 세화물(世話物)로 나누어볼 수 있다. 분라쿠의 작품은 대본의 완성도가 높아 많은 작품이 가부키로 각색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오늘날 분라쿠와 가부키에는 공통적인 작품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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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음악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앙상블은 산쿄쿠(三曲)이다. 산쿄쿠는 고토, 샤미센, 샤큐하치 또는 고토, 샤미센, 코큐의 세 가지 악기를 사용하는 합주음악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각각 한 명씩 연주하지만 여러 명의 주자가 함께 하는 제주(齊奏)형태도 있기 때문에 서양음악의 삼중주와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산쿄쿠는 기악합주뿐 아니라 노래를 부르면서 연행하는 형태도 있다.


한국의 정악이 풍류방음악으로서 사대부와 중인계급 등의 음악애호가들이 즐겼던 것처럼 산쿄쿠는 자시키(座敷)라 불리는 가정 내의 객실이나 응접실에서 행해지던 교양으로서의 음악이었다. 이러한 음악을 일컬어 가정음악이라고 했는데, 산쿄쿠의 전신인 소쿄쿠(箏曲)나 지우타(地歌)가 가정음악의 대표적인 예이다.


일본 전통음악 산코쿠(고토, 샤미센, 샤쿠하치)/ⓒ이지선닷컴



소쿄쿠는 한국의 가야금과 비교될 수 있는 고토라는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을 말한다. 고토는 처음에는 궁중음악인 가가쿠 합주에서 주로 사용되었지만 에도시대에 이르러 독주악기로서도 애호되기 시작하였다. 고토는 샤미센과 더불어 맹인악사들이 연주했는데, 이들은 도도(當道)라는 맹인 위계조직에 속하여 연주와 교습활동을 했다.


중국의 쟁에서 유래한 일본 전통악기 고토/ⓒ나무위키



맹인악사들은 고토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고토 독주곡 등을 연주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고토반주의 가곡을 구미우타(組歌)라고 하고 순수기악곡을 단모노(段物)라고 부른다. 이 두 음악은 오늘날까지 소쿄쿠의 대표적인 형태로 연주되고 있다. 또한 소쿄쿠의 선율에 샤미센과 샤쿠하치가 첨가되어, 앞서 이야기한 산쿄쿠의 형태로 연주되기도 한다.


지우타(地歌)는 샤미센반주의 가곡으로, 에도시대에 관서지방 사람들이 자신들의 '토지(土地)의 노래(歌)'라는 의미로 사용한 명칭이다. 지우타는 소쿄쿠와 마찬가지로 원래 맹인 위계조직인 도도에 소속된 남성음악가들이 연주한 음악이었으나, 1871년 도도가 폐지되면서부터는 맹인이 아닌 전문연주자들이 연주했고, 오늘날까지 소쿄쿠와 더불어 가정음악으로서 여성들에게 널리 애호되고 있다.


지우타는 샤미센을 위한 음악이지만 다른 악기와 함께 연주되기도 한다. 일반적인 연주형태는 독주 혹은 둘 이상의 샤미센합주, 샤미센과 고토의 합주, 그리고 산쿄쿠합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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