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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 서경덕 徐敬德, 1489~1546]

 

 거듭된 사화로 세력이 세력이 많이 꺾인 사림파는 지방에 은거하면서 서원과 향약 등의 향촌 활동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는 한편 주자학의 근본 문제를 깊이 연구하는 등 수준 높은 학문 활동을 통해 한층 더 심화된 학문적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시대 주자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부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시작을 장식한 인물이 바로 화담 서경덕이라고 할 수 있다.

 서경덕은 송도에서 태어나 58세로 자신의 서재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동안 출사하지 않고 화담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화담선생으로 불렀다. 그는 18세 때 '대학'을 읽다가 사물을 궁구하는 격물(格物)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때부터 벽에 사물의 이름을 붙여 놓고 궁리를 시작하는 등 격물을 중시하는 학풍을 수립했다.

 '격물(格物)'은 사물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사물과 직접 접촉하는 실천적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정신적 긴장을 요구하는 '거경(居敬)'과 함께 주자학의 근본적 학문 방법 중의 하나로 서경덕은 이 같은 방법론을 통해 종달새가 날아다니는 현상부터 온천과 바람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자연현상에 대한 독창적이고 합리적인 해설을 내놓았다.

 예를 들어 온천을 설명하면서 음에 속하는 물은 성질이 차가울 수밖에 없는데 온천이 뜨거운 까닭을 두고 "구체적인 사물의 특징은 음양이기의 배합에 따라 결정되며 음기인 물을 땅 속에서 있는 양기가 건드려서 온천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또 부채를 흔들면 바람이 발생하는 현상을 두고 "부채가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천지 사이에 가득한 기를 부채가 움직이게 한 것일 뿐"이라고 해설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 주자학자들 중에서는 드물게 기(氣)를 가지고 만물을 설명하는 입장을 지켰는데 '태허설', '귀신사생론', '원리기', '이기설' 등의 저술에는 기철학과 관련된 그의 주요 주장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기를 자기 원인에 의해서 존재하면서 자기 운동의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근원적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기일원론적 세계관을 수립했다. 그가 기를 주자학의 또 다른 중요한 범주인 이(理)보다 앞서는 존재로 설정하고 이(理)를 부속물 정도로 서술하면서 기의 영원성을 주장한 것은 주자보다 장재와 소옹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또 그가 사색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직접 탐구하는 격물을 학문 방법으로 중시한 것은 상대적으로 독서와 거경을 더 중시했던 주자학의 일반적인 경향과 구별되는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를 근원적 실재로 규정한 것은 관념이자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理)를 앞세웠던 대부분의 학자들에 비해 훨씬 덜 사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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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암 조광조/위키백과]

 

 조광조는 후세의 사림파 유학자들로부터 계파를 초월하여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잇는 인물로 높이 평가받는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당시의 군주였던 중종에게 중용되어 중앙정계로 진출하자 "내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내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든다."는 구호를 내걸고 유교의 정치, 곧 지치(至治)를 당시 조선 사회에 실제로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개혁정치를 주도해 나갔다.

 그는 사림파 자체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사림파의 경제적 토대를 이루고 있었던 향촌 사회를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주자가 정리한 향약을 보급해, 향촌 사회를 자율적으로 통치하는 기틀을 수립하였다.

 아울러 주자학적 이념에 충실한 인재들을 선발했으며, 사림파의 정치적 기반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 일종의 추천제인 현량과를 설치하여 향촌에서 성장한 신진 학자들을 대거 발탁하는 등 다방면으로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광조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관학파 유학자들의 비리를 공격하고 그들의 부당한 포상을 삭제하는 한편, 국가기관이지만 도교적 풍습에 근거하던 소격서를 혁파하는 등의 공격적 개혁을 진행시켰다.

 조광조의 이 같은 개혁은 정치적으로는 훈구파 세력의 과도한 국가권력 독점을 방지하려고 한 것이었으며, 학술적으로는 주자학 이념에 입각하여 관학파 유학자들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함으로써 주자학 이념에 입각하여 관학파 유학자들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함으로써 주자학 이념에 걸맞은 사회를 조선에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은 기존 훈구파 세력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기묘사화라는 비극으로 종결되었다. 1519년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조씨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을 조작하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파 유학자들이 희생당하면서 사림파는 다시 시련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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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 들어선 조선왕조는 건국과 함께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워 고려 때까지의 지배적인 이념이었던 불교를 비판하는 한편 국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유교경전에 근거하여 기본법제를 정비하는 등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건설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과 권근 등을 비롯한 관학파 유학자들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정도전은 왕조의 성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로 조선을 기본적으로 유교적 윤리규범에 의해 통제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이상을 품고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제도 정비에 기여하는 한편 '불씨잡변' 등의 저술을 통해 불교를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다. 또 권근은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지향하는 조선왕조의 성립 후 당시까지의 주자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이해한 대표적인 학자로 '입학도설'이나 '오경천견록' 등의 저술로 조선 초기 주자학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권근의 글씨, 〈 해동명적〉에서, 규장각 소장, 백과사전/한국브리태니커]

 

 이들 관학파 유학자들은 조선조가 성립하는 데는 크게 공헌했지만 그런 공헌을 발판으로 중앙권력을 독점하면서 경제적으로는 대토지 소유자로서 기득권층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도덕적인 타락과 함께 권력의 남용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15세기 무렵에 이르면서 이들 대토지 소유자들은 무차별적으로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중소 지주들과의 갈등과 마찰이 극에 달했다. 이름은 물론이고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그 세력이 비대해졌다. 결국 당시 군주였던 성종은 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껴 김종직을 비롯한 중소 지주 출신 신진 유학자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로 인해 김종직을 비롯한 지방 출신 주자학자들이 중앙의 요직을 차지하고 기존의 세력과 대립하는 국면이 조성되었고 그로 인해 정치세력 또한 둘로 나뉘게 되었는데, 전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훈구파이고 후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사림파이다.

 

 사림파의 진출로 궁지에 몰린 훈구파는 연산군이 즉위하고 나자 김종직이 생전에 세조의 왕위찬탈을 빗대어 비판한 '조의제문'을 썻다는 사실을 빌미로 삼아 1498년 김일손 등을 죽이고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는 등 비이성적인 대응으로 사림파를 탄압하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무오사화이다.

 

[조광조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백과사전/한국브리태니커]

 

 이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림파 유학자들은 지방 향촌 사회를 기반으로 꾸준히 성장하였으며, 이후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자 이들은 다시 중앙의 정계로 진출하여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대표가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일군의 사림파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사헌부, 사간원 등 언론 관직을 통해 정계로 진출하여 기존의 공신들을 비판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일종의 추천제인 현량과를 통해 자기 세력을 중아으로 진출시키고, 지방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주자가 손질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군현마다 시행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급진적인 개혁은 또 다시 기득권 세력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역모를 뒤집어씌워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파 유학자들을 희생시켰다. 이 사건이 기묘사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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