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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진덕여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은 즉위하자 직접 태평가(太平歌, 진덕여왕이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노래한 것은 사대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제5 '진덕왕 조'에 실려 있는데, 당나라 고종은 이것을 읽고 법민을 대부경大府卿으로 임명해 돌려보냈다고 한다.)를 짓고 비단 무늬를 짜서 사신('삼국사기'에는 진덕왕 4년에 김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을 사신으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을 시켜 당나라에 바치게 했다.

어떤 책에는 춘추공春秋公을 사신으로 삼아 가서 군사를 요청하자, 당 태종이 가상히 여겨 소정방蘇定方을 보내기로 허락했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현경(顯慶, 당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의 연호로 656년에서 661년까지 사용했다.) 이전에 춘추공은 이미 제위에 올랐고, 현경 경신년은 태종 시대가 아니라 바로 고종(高宗) 시대다. 소정방이 온 것이 현경 경신년이니 비단에 무늬를 짠 것이 군사를 청할 때가 아님은 확실하므로 진덕여왕 때가 맞다. 아마도 김흠순(金欽純)의 석방을 요청할 때였을 것이다.

당나라 황제는 이 점을 가상하게 여겨 진덕여왕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권5) 치당태평송/ⓒ한국학중앙연구원

 

위대한 당나라가 큰 왕업을 여니
높고 높은 황제의 계획 창성하여라.
전쟁이 그치니 위엄이 정해지고
문치를 닦으니 모든 임금을 잇는다.
하늘을 통솔하닌 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만물이 빛을 머금는다.
깊은 인(仁)은 해와 달을 짝할 만하고
운수가 요순 시대와 같다.
펄럭이는 깃발은 어찌 그토록 빛나며
울리는 북소리는 어찌 그리도 장엄한가.
나라 밖의 오랑캐로 명을 거스른 자는
칼날에 엎어져 죽임을 당하리라.
순수한 풍속은 어두운 곳이나 밝은 곳에 고루어리고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치네.
사계절은 옥촉(玉燭, 사계절의 기후가 조화를 이룬 것이니 태평한 시대를 말한다.)처럼 화합하고
일월과 오행(七曜, 하늘에 보이는 별 중 육안으로 관찰되고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움직이는 별을 오행과 대응시킨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과 태양 달을 합친 7개의 천체를 말하며 칠요성이라고도 한다.)은 만방을 순행한다.
산의 신령은 보필할 재보(宰輔, '시경詩經-대아大雅' 숭고崧高의 '유악강신維嶽降神:큰 산의 산신령이 내려와  생보급신生甫及申:보씨와 신씨를 낳으셨도다'를 인용한 것으로 보후甫候와 신백申伯 두 사람으로 국가의 동량 즉, 기둥과 들보가 되는 신하를 가리킨다.)를 내리시고
황제는 충성스럽고 진실된 사람을 임명하였네.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이룬 한결같은 덕이
우리 당나라 황실을 비추리라.

 
진덕왕 대에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 있어 남산 우지암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했다. 그때 몸집이 큰 호랑이가 그 자리로 달려들자 공들이 놀라 일어났다. 그러나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며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땅에 던져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아 상석에 앉았지만, 공들은 모두 김유신의 위엄에 복종했다.

 

진덕여왕 때 일화/출처 : https://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26/2009052601483_6.html


신라에는 신령스러운 땅이 네 군데 있었다. 큰일을 의논할 때마다 대신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 의논했고, 그렇게 하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졌다.
신령스러운 땅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亏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진덕왕 대에 처음으로 정월 초하룻날 아침 조례(正旦禮,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진덕왕 즉위 5년의 일이다.)를 행했고, 처음으로 시랑(侍郞)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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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소재 경애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55대 경애왕(景愛王, 재위 924~297, 이름은 위응魏膺, 제53대 신덕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제49대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城王后 김씨이다.)이 즉위한 동광(同光, 후당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의 연호로 923년에서 926년까지 사용했다.) 2년 갑신년(924년) 2월 19일, 황룡사에 백좌(百座, '인왕백면좌회仁王百面座會'의 줄임말로 하루에 백 자리를 베푸는 불교 설법 행사다. 신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호국 경전인 '인왕경'이 이 의례에 사용된다.)를 열어 불경을 풀이했다. 아울러 선승(禪僧) 300명에게 공양한 다음 대왕이 직접 향을 피워 불공을 올렸다.

이것이 백좌로서 선(禪)과 교(敎, 참선하는 것을 '선이라 하고 일반적인 불교를 '교'라고 한다.)가 함께 한 시초가 된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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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사실만 기록한 이 조는 <기이> 편 전체에서 특이한 제목이다. 고운기는 그 당시 이상 징후의 상징적 표현으로 보았다.

제 40대 애장왕(哀裝王, 재위 800~809, 39대 소성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청명淸명, 즉위 후 중희重熙로 개명했다.) 말년인 무자년(808년) 8월 15일에 눈이 내렸다.

 

경북 경주시 동천동 헌덕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 41대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 38대 원성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맏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김인겸金仁謙,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다.) 원화(元和, 당唐나라 헌종憲宗 이순李純의 연호로 806년에서 820년까지 사용했다.) 13년 무술년(818년) 3월 14일에 큰눈이 왔다. 어떤 책에는 병인년으로 되어 있ㅇ으나 잘못된 것이다. 원화는 15년에서 끝나며 병인년이 없다.

 

경북 경주시 서악동 문성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45대 신무왕神武王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종태후定宗太后라고도 불리는 정계부인貞繼夫人이다.) 기미년(839년) 5월 19일에 큰눈이 내리고 8월 1일에 온 세상이 어두컴컴했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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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배반동 효공왕릉/ⓒ문화컨텐츠닷컴

제52대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 제49대 헌강왕의 서자며 어머니는 김씨고 이름은 요蟯다.) 대인 광화(光化, 당唐나라 소종昭宗 이엽李曄의 연호로 898년에서 901년까지 사용했다.) 15년 임신년(912년, 실제로는 주온朱溫의 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이다.)에 봉성사(奉聖寺) 외문(外門) 동서쪽 스물한 칸 사이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또 신덕왕(神德王) 즉위 4년 을해년(915년, 고본古本에는 천우天祐 12년이라 했는데, 정명貞明 원년으로 해야 한다.)에 영묘사(靈妙寺) 안의 행랑에 까치집이 서른네 개, 까마귀 집이 마흔 개 있었다. 또 3월에는 서리가 두 번 내렸고, 6월에는 참포(斬浦,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참포槧浦라고 했으며, 신라의 4독瀆 중에서 동독東瀆으로 중사中祀의 제전祭典에 속한다.-이병도설)의 물이 바다의 파도와 사흘 동안 다투었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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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54대 경명왕릉/경북 경주시 배동/ⓒ문화컨텐츠닷컴

제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 신덕왕神德王의 태자며 어머니는 의성왕후義成王后다.)에 사천왕사 벽화 속에 있는 개가 짖어 사흘 동안 경을 읽어 쫓아 버렸는데 반나절이 지나자 또 짖었다.

 

7년 경진년(920년) 2월에는 황룡사의 탑 그림자가 사지(舍知, 신라시대 17관등 중 16번째 등급의 벼슬) 금모(今毛)의 집 뜰에 한 달 동안이나 거꾸로 비쳤고, 또 10월에는 사천왕사에 있는 오방신(五方神, 동서남북 사방과 중앙을 수호하는 신이다.)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 속에 있는 개가 뛰쳐나와 뜰을 달리고는 다시 벽화 속으로 들어갔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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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팔국의 난 전개도/ⓒ더위키 THE WIKI

제10대 내해왕(奈解王,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이라고도 한다. 재위 196~230)이 자리에 오른지 17년 임진년(212년)에 보라국(保羅國, 지금의 나주지역)과 고자국(古自國, 지금의 고성), 사물국(史勿國, 지금의 사주泗州-사천지역) 등 여덟 나라가 힘을 합쳐 신라의 변경으로 쳐들어왔다. 왕이 태자 내음(㮈音)과 장군 일벌(一伐)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막도록 명령하자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했다.

 

이때 물계자(勿稽子)의 군공(軍功, 전쟁 등에서 얻은 군사상의 공적)이 으뜸이었지만, 태자의 미움을 사 공을 보상받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말했다.

 

"이번 전쟁의 공은 오직 자네에게만 있는데, 상이 자네에게 미치지 않은 것은 태자가 자네를 미워하는 것인데 자네는 원망스럽지 않은가?"

 

물계자가 말했다.

 

"나라의 임금이 위에 계시는데 어찌 태자를 원망하겠는가?"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왕에게 아뢰는 것이 좋겠소."

 

물계자가 말했다.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여 이름을 다투고, 자신을 드러내어 남을 덮는 것은 뜻 있는 선비가 할 일이 아니네. 마음을 가다듬고 다만 때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네."

 

10년(20년의 잘못이다.) 을미년(215년)에 골포국(骨浦國, 지금의 합포合浦) 등 세 나라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갈화(竭火, 지금의 울주다.)를 치자,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했다. 이때 물계자가 적군 수십 명을 베었으나, 사람들이 물계자의 공적을 말하지 않았다. 물계자가 아내에게 말했다.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에 임해서는 자신을 잊고 절조와 의리를 지켜 생사를 돌보지 않아야 충(忠)이라고 들었소. 무릇 보라(지금의 나주羅州지역)와 갈화의 싸움이야말로 나라의 어려움이었고 임금의 위태로움이었는데, 나는 일찍이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용기가 없었으니, 이것은 매우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오. 이미 불충으로써 임금을 섬겨 그 허물이 아버님께 미쳤으니, 어찌 효라 할 수 있겠소. 이미 충효를 잃어버렸는데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과 저자를 왕래하겠소."

 

물계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문고를 지니고 사체산(師彘山, 어디인지 자세하지 않다.)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대나무의 곧은 성질이 병임을 슬퍼하며 그것을 비유하여 노래를 짓기도 하고, 산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에 비겨서 거문고를 타고 곡조를 지으며 숨어 살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삼국유사 권 제5 피은(避隱) 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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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전에 신라인에게 불교는 상당한 거부감으로 다가왔다. 이 조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자비왕의 맏아들로 효성스럽고 겸손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 권3에는 소지마립간이라 했다. 소지왕炤知王이라고도 한다.)이 즉위한 지 10년 무진년(488년)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 그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는데 쥐가 사람의 말을 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라. 혹은 신덕왕神德王이 흥륜사興輪寺에 가서 향을 피우려고(行香-행향은 재를 베푸는 사라이 도량 안을 천천히 돌며 향을 사르는 의식이다.) 하는데, 길에서 여러 마리 쥐가 서로 꼬리를 물고 가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돌아와 점을 쳐 보니 내일 맨 먼저 우는 까마귀를 찾아가라고 하였다는데, 이 견해는 틀린 것이다."

 

왕은 기병에게 명령하여 뒤따르게 했다. 남쪽의 피촌(避村, 지금의 양피사촌壤避寺村이니 경주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렀을 때 되지 두 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기병들은 멈춰 서서 이 모습을 구경하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길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이때 한 노인이 연못에서 나와 글을 바쳤다. 그 겉봉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경북 경주시 남산동 서출지/ⓒ경주문화관광

"뜯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신라인들의 수수께끼 형식의 해학으로서 제유법의 일종이다.)"

 

사신이 와서 글을 바치니 왕이 말했다.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뜯어보지 않고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

 

일관(日官, 삼국시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하던 관리)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란 일반 백성이요, 한 사람이란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뜯어 보니 이렇게 씌어 있었다.

 

"거문고 갑(琴匣)을 쏴라."

 

왕은 궁궐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 속에서는 내전에서 분향 수도(焚修, 모든 불사를 맡아서 행하는 의식이다.)하는 승려와 비빈이 은밀히 간통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주살되었다. 이때부터 나라 풍속에 매년 정월 상해(上亥, 이달의 첫 해일亥日이다.), 상자(上子, 이달의 첫 자일子日이다.), 상오(上午, 이달의 첫 오일午日이다.)일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5일을 오기일(烏忌日, '까마귀를 꺼려 하는 날' 이란 뜻인데, 까마귀에게 찰밥으로 제사 지내는 풍속은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온다. 이 설화는 향찰을 한자어로 보는 데서 생긴 어원인 듯 하다.)로 하여 찰밥으로 제사 지냈는데, 이 풍속은 지금까지도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것을 속어로는 달도(怛忉, 양주동 박사에 의하면 우리말 '설, 슬'과 샛해 첫날을 뜻하는 '설'의 음이 상통하는 데서 온 훈차라고 한다.)라고 하는데, 또한 노인이 나와 글을 바친 그 연못의 이름을 서출지(書出池,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데 현지 사람들은 '양기못'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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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진흥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제24대 진흥왕은 즉위할 당시 열다섯 살('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일곱 살로 되어 있다.)이었기 때문에 태후가 섭정을 했다. 태후는 법흥왕의 딸이며, 법흥왕의 아우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왕비다. 임종 무렵 머리칼을 깎고 법복을 입고 세상을 떠났다.

 

승성(承聖(남조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소강蕭綱의 연호다.) 3년(554년) 9월, 백제의 군사가 진성(珍城)을 침공해 와서 남녀 3만 9천명과 말 8천필을 빼았아 갔다.

국보 3호 북한산 신리 즌흥왕 순수비/ⓒ국립중앙박물관

이보다 앞서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모의 했다. 이때 진흥왕이 말했다.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려 있다.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바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알렸더니, 고구려는 그 말에 감격하여 신라와 화친을 맺었다. 이 대문에 백제는 신라를 원망하여 침략해온 것이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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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 재위 500~514)의 성은 김씨고,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도는 지도로(智度路)며, 시호는 지증(智證)이라 했다. 이때부터 시호가 쓰이기 시작했고, 또 우리말에서 왕을 마립간(麻立干, '마립'은 두頭, 상上, 종宗의 의미고 '간'은 대大, 장長의 뜻이니, '정상'을 뜻하는 존호로 왕에게 쓰였으며, '마라한', '마루한'으로 발음했다고 한다.-양주동, 이동환 설)이라고 부른 것도 이 왕 때부터다.

 

왕은 영원(永元, 남조 제나라 동혼후東昏侯 소보권蕭寶券의 연호다.) 2년 경진년(500년)에 즉위했다.(혹은 신사년이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3년이다.) 왕은 음경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여서 좋은 짝을 찾기가 어려웠으므로 사신을 삼도(三道)로 보내 구했다. 사신이 모량부(牟梁部)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렀을 때 개 두 마리가 북만큼 커다란 똥덩어리의 양쪽 끝을 다투어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묻자 한 소녀가 이렇게 말했다.

 

"모량부 상공(相公)의 딸이 그곳에서 빨래를 하다 숲 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상공 딸의 키가 일곱 자 다섯 치나 되었다. 이런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이에 왕이 수레를 보내 그녀를 궁궐로 맞아들여 황후로 봉하니(박씨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다.) 신하들이 모두 축하했다.

 

또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다.) 동해 속으로 바람을 타고 이틀 정도 가면 우릉도(于陵島, 지금의 우릉도羽陵島-지금의 경북 울릉군 울릉도다.)가 있는데, 둘레가 2만 6730보(步)였다. 섬의 오랑캐들이 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게 굴면서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伊湌, 신라 벼슬 이름으로 17관등에서 제1관등이다.) 박이종(朴伊宗,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이사부異斯夫라고 되어 잇으며 김씨라고 했다.)에게 명하여 그들을 토벌하게 했다. 박이종은 나무로 만든 사자를 큰 배에 싣고 위협했다.

 

신라장군 '이사부' 표준영정/삼척시청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놓겠다."

 

우릉도의 오랑캐는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려 주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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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유적 효충사(朴堤上遺跡 孝忠祠) 박제상 영정/ⓒ양산시립박물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에는 박제상(朴堤上)으로 되어 있어 박제상으로 교쳐야 한다. '제상'은 '모말毛末'이라고도 했다.

 

제17대 나밀왕(那密王)이 왕위에 오른지 36년 경인년(390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 말했다.

 

"저희 임금은 대왕의 신성하심을 듣고 신 등에게 백제가 지은 죄를 대왕께 아뢰도록 하셨습니다. 대왕께서는 왕자 한 명을 보내 저희 임금께 성심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왕이 셋째 아들 미해(美海, 미토희未吐喜-라고도 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미사흔未斯欣으로 되어 있다. 미사흔과 박제상 이야기는 <일본서기> 권7에도 전한다.)를 왜국(신라에게 위협을 주었던 왜국의 성립은 대체로 4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런 왜국은 신라 왕을 눈물 흘리게 만들 만큼 강한 힘이 있었다.)에 보냈다. 이때 미해의 나이는 열 살로 말과 행동이 아직 반듯하게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내신 박사람(朴娑覽)을 부사(副使)로 삼아 딸려 보냈다. 그런데 왜왕이 30년 동안 그를 붙잡아 두고는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訥祗王)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기미년(419년)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사신을 보내 말했다.

 

"저희 임금께서는 대왕의 아우 보해(寶海, <삼국하기> '신라본기'에는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다.)가 지혜가 빼어나고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며 특별히 소신을 보내 간청하도록 했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매우 다행스러워하면서 서로 화친을 맺어 왕래하기로 했다. 그래서 동생 보해에게 고구려로 가도록 명령하고 내신 김무알(金武謁)을 보좌로 삼아 보냈다. 그런데 장수왕 역시 그를 억류하고는 돌려보내지 않았다.

 

10년 을축년(425년)에 이르러 왕은 여러 신하들과 나라 안의 호걸들을 불러모아 직접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세 순배 돌고 다양한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자 왕이 눈물을 떨구면서 신하들에게 말했다.

 

"과거 선친께서는 백성들의 일이라면 성심을 다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 왜국으로 보냈다가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또 짐이 보위에 오른 이래 이웃 나라의 군사가 대단히 강성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고구려만이 화친을 맺자는 말을 하였으므로 짐이 그 말을 믿고 아우를 고루려에 보냈다. 그런데 고구려 역시 그를 붙잡아 두고는 돌려보내지 않고 있다. 짐이 비록 부귀한 위치에 있지만 일찍이 하루 한 순간이라도 아우들을 잊거나 생각하고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만약 두 아우를 만나 보고 함께 선왕의 묘를 뵙게 된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겠는데, 누가 이 계책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때 모든 관료들이 다 함께 아뢰었다.

 

"이 일은 진실로 쉽지 않습니다. 반드시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데, 신들의 생각으로는 삽라군 태수 박제상(朴堤上)이라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제상을 불러 물었다. 제상은 두 번 절하고 대답했다.

 

"신이 듣건대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그 일을 위해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어려운가 쉬운가를 따져 보고 나서 행동하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고, 죽을지 살지를 따져 보고 나서 움직이면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명을 받들어 가겠습니다."

 

왕은 그를 매우 가상히 여겨 그와 잔을 나누며 술을 마시고 손을 잡고는 헤어졌다.

 

제상은 왕 앞에서 명을 받들고 곧장 북해(北海)의 길을 달려 변복을 하고 고구려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해가 있는 곳으로 가 함께 탈출할 날짜를 의논하여 우선 5월 15일로 정하고, 고성(高城) 수구(水口)로 돌아와 묵으면서 기다렸다. 보해는 기일이 다가오자 병을 핑계로 며칠 동안 조회하지 않다가 밤중에 도망쳐서 고성 바닷가까지 이르렀다. 고구려 왕이 이을 알고는 수십 명을 보내 뒤쫓아 고성에 이르러 따라잡게 되었다. 그러나 보해가 고구려에 머무는 동안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고 활을 쏘았다. 그래서 마침내 죽음을 면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왕은 보해를 만나 보자 미해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슬퍼하며 눈물을 머금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마치 몸 하나에 팔뚝이 하나뿐이고 얼굴 하나에 눈이 하나뿐인 것 같소.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없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소?"

 

이때 제상이 이 말을 듣고는 두 번 절한 후 하직하고 말에 올랐다.

 

그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길을 떠나 곧바로 율포(栗浦) 바닷가에 도착했다.

 

제상의 아내가 이 일을 듣고는 말을 달려 뒤쫓아가 율포에 이르러 보니,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 뒤였다. 아내가 간곡하게 불렀으나,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떠났다. 그러고는 왜국에 도착해서 거짓으로 말했다.

 

"계림의 왕이 무고한 내 아버지와 형을 죽였기 때문에 이곳까지 도망쳐 왔습니다."

 

왜왕은 그를 믿고서 집을 주고 편안히 살게 해 주었다.

 

제상은 항상 미해를 모시고 바닷가에 나가 노닐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았다. 잡은 것을 항상 왜왕에게 바치니, 왜왕이 매우 기뻐하여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때마침 새벽 안개가 짙게 끼자 제상이 말했다.

 

"도망가실 만합니다."

 

미해가 말했다.

 

"그렇다면 함께 갑시다."

 

제상이 말했다.

 

"만약 신까지 달아난다면 아마도 왜인들에게 발각되어 추격을 받을 것입니다. 신이 남아서 추격을 막겠습니다."

 

미해가 말했다.

 

"지금 그대는 나에게 아버지나 형과 같은 존재인데, 어찌 그대를 버려 두고 혼자 돌아갈 수 있겠소?"

 

제상이 말했다.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여 대왕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만 있다면 만족할 따름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리고 술을 가져다 미해에게 바쳤다. 이때 계림 사람 강구려(康仇麗)가 왜국에 있었으므로 그를 딸려 보냈다.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 있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주변 사람들이 들어와 보려고 했으나 제상이 밖으로 나와서 저지하며 말했다.

 

"어제 말을 달려 사냥을 하느라 병이 깊어 아직 일어나지 않았소."

 

그러나 날이 저물자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다시 묻자 대답했다.

 

"미해는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소."

 

주변 사람들이 급히 왜 왕에게 알렸다. 왜왕은 기병을 시켜 뒤쫓게 했으나 따라잡지 못했으므로 제상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몰래 너희 나라 왕자를 돌려보냈느냐?"

 

제상이 대답했다.

 

"나는 계림의 신하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한 것뿐인데 어찌 감히 당신에게 말하겠는가?"

왜왕이 노하여 말했다.

 

"이제 너는 내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말하니, 오형(五形, 중국 고대 다섯 가지 형벌로서 대체로 먹물로 얼굴에 글씨를 새기고[墨], 코를 베고[劓], 발뒤꿈치를 베고[刖], 성기를 절단하고[宮], 목을 베는[斬] 것을 말한다.)에 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신하라고 말하면 후한 녹을 주겠다."

 

제상이 대답했다.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차라리 계림 왕에게 볼기를 맞는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지 않겠다."

 

왜왕은 노하여 제상의 발바닥 살갗을 도려 낸 후 갈대를 베어다 놓고 구 위를 걷게 했다.(오늘날 갈대에 있는 핏자국을 세속에서는 제상의 피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제상이 대답했다.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또 뜨거운 철판 위에 세우고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역시 제상이 대답했다.

 

"계림의 신하다."

 

그러자 왜왕은 제상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는 목도(木島) 가운데서 불태워 죽였다.

 

미해는 바다를 건너오자 강구려를 시켜 먼저 나라에 알리게 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백관들에게 굴헐역(屈歇驛)에서 맞도록 명하고, 자신은 친동생 보해와 함께 남쪽 교외에서 맞았다. 그리고 대궐로 들어와서 잔치를 베풀고 나라 안에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제상의 아내는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봉하고 딸을 미해의 부인으로 삼았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옛날 한(漢)나라의 신하 주가(周苛)가 형양(滎陽)에 있을 때 초(楚)나라 군사의 포로가 되었다.  항우(項羽)가 주가에게 '네가 내 신하가 되면 만록후(萬祿侯)로 봉하겠다.'라고 했으나, 주가는 욕을 하며 굽히지 않다가 초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제상의 충렬(忠烈)이 주가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다."

 

처음에 제상이 떠나갈 때, 소식을 들은 부인이 뒤쫓았으나 만나지 못하자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의 모래밭에 드러누워 오래도록 울부짖었는데, 이 때문에 그 모래밭을 장사(長沙)라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하여 돌아오려는데 부인이 다리가 풀려 일어나지 못했으므로 그 땅을 벌지지(伐知旨)라 했다. 오랜 뒤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경주시 외동읍과 울주군 두동면 경계에 있으며 해발 754미터다. 그 아래에 박제상 사당이 있다. 아직도 이곳 주민들은 치술령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낸다고 한다.)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다 삶을 마쳤다. 그 뒤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으며, 지금도 사당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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