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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건국이념인 주자학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주류 학문으로 북송의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 등 다섯 명의 학자를 거쳐 남송의 학자인 주희가 집대성한 학문이며 송학, 정주학, 도학, 성리학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주자학은 이전 시대 한당의 훈고학이 자구 해석에 얽매이거나 경전을 기송하는 데만 주력한 나머지 유학의 장점인 실천적인 측면이나 수양의 문제를 방기함으로써 불교와 도교에 사상적 주도권을 빼앗긴 것을 전면적으로 반성하면서 일어났다.

 주자학은 동시대의 불교와 도교의 이론을 빌려 이전의 유학이 생활 윤리 규범에 머물렀던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이상학적 토대를 구축하였는데, 그중에서 우주와 인생을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 이(理)와 기(氣)이다.

 이기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기가 현상과 신체, 물질, 도구, 수단 등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이(理)는 본체와 정신, 본질, 목적 등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존재론뿐만 아니라 윤리학 또는 인간학, 심성론과 수양론, 학문 방법론에 이르기 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탁월한 설명력을 가지는 범주체계이다.

 기는 일기, 음양, 오행, 만물 등 다양한 모습과 형태를 지니고 차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기의 응짖 또는 변형일 뿐이며 만물의 생성 소멸 또한 기의 이합집산으로 설명된다. 곧 기가 모이면 사물이 생성되고 흩어지면 사물이 소멸하는 것이다.

 이(理)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기에 의해 설명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제멋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를 갖추고 있어야 할 모습으로 있다. 이 있어야 할 모습을 갖추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理)이다. 이는 우주와 만물의 근거이며 우주가 우주로 있어야 할 모습을 부여해 주는 원리이자 본질이다. 개별적으로 말하면 이는 개개의 사물이 개개의 사물다운 특징을 갖게 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기론은 각자 뚜렷하게 구별되는 개념이지만 이 둘의 관계는 때로 미묘하고도 복잡한 사색을 필요로 할 만큼 까다로운데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둘은 떨어지지도 않고 섞이지도 않는다는 뜻인 불리부잡(不離不雜)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철학산책/김교빈 최종덕 김문용 전호근 김제란 김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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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기대승에게 보내는 이황의 편지글 '답 기명언(答 奇明彦)'

 요즘 보내신 두 번째 글의 가르치을 받고, 먼젓번 제 편지에 말이 소략하고 그릇된 곳이 있음을 알았기에 삼가 수정하여 고친 글을 앞에 써서 괜찮은지 여쭙고, 뒤에 바로 두 번째 글을 이어서 보내니 밝혀 회답해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성과 정을 구분하는 논의는 선대의 유학자들이 자세히 밝혔으나, 오직 사단과 칠정에 대해서는 그것이 모두 정이라고만 했을 뿐, 이(理)와 기(氣)를 나누어 말한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정지운이 천명도를 만들면서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나의 뜻에도 역시 그 분별이 너무 심하여 분쟁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기에 순선(純善)과 겸기(兼氣) 등의 말로 바꾸었습니다. 그 뜻을 말씀드리자면 대체로 서로 도와서 연구하여 밝히고자 함이며, 그 말에 흠이 없었다 함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변설을 보니, 잘못을 지적하여 타일러 줌이 자세하니 깨우침이 더욱 깊습니다. 그러나 아직 미혹됨이 있기에 시험 삼아 말씀드리니 바로잡아 주시기를 청합니다.

 사단이 정이고 칠정 또한 정으로 다 같은 정인데 어찌하여 사단과 칠정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겠습니까. 보낸 편지에 이른바 자사와 맹자가 각각 주장하여 말한 것이 같지 않다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理)와 기는 본래 서로 기다려 체(體)가 되고 용(用)이 되어 진실로 이(理) 없는 기없고, 기없는 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장한 말이 이미 서로 틀리니, 또한 분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예부터 성현들이 이 두 가지를 논할 때에 어찌 꼭 혼합하여 한 가지 설로만 분별없이 말하였겠습니까. 또 성(性) 한 글자를 말씀드려도 자사는 이른바 천명의 성[天命之性]이고 맹자는 이른바 성선의 성[性善之性]입니다. 이 두 성(性) 자가 가리키는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차 이기가 부여한 가운데에 나아가 이 이(理)의 근원을 가리켜 말함이 아닙니까. 그 가리키는 바가 이(理)에 있고 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순수하고 순선하고 악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理)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성이 기를 겸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성의 본연이 아닌 것입니다.

 자사와 맹자는 도체의 온전한 것을 환히 들여다보고 이와 같이 말했는데, 그것은 기를 섞어서 성을 말하면 성의 본래 상태가 선하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후세에 정호, 정이, 장재 등의 여러 선생들이 나온 뒤에야 기질의 성[氣質之性]에 관한 논의가 있었으나 그들 또한 자사나 맹자의 말씀에 더 보태려고 한 것이지 다른 의견을 세우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리켜 말한 바가 사람이 태어난 뒤에 있는 것이니 역시 순수한 본연의 성[本然之性]으로 일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일찍이 정에 사단칠정의 구분이 있는 것은 마치 성에 본연과 기질의 다름이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을 이와 기로 나눌 수 있다면 정 또한 이와 기로 나누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부끄러워하고, 양보하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어디에서 움직이는가 하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성에서 발동하는 것이고,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은 어디에서 발하는가 하면, 외물이 사람의 형기에 접촉되어 사람의 마음속에서 움직여 나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단의 발동을 맹자가 일찍이 마음이라고 말했으니 마음은 분명 이(理)와 기의 합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켜 말한 것이 이(理)를 기준으로 한 것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성이 순수하게 마음속에 있으므로 불쌍히 여기고, 부끄러워하고, 양보하고, 잘잘못을 가리는 네 가지 마음이 그 실마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 칠정의 발동을 정자가 이르길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주자는 이르기를 "각각 마땅한 바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틀림없이 칠정은 이(理)와 기를 겸한 것입니다.(하략)

[퇴계집(退溪集) 권17, 서(書),답기명언(答奇明彦)/동양철학산책/김교빈 최종덕 김문용 전호근 김제란 김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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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황의 성학십도/태극도 1568(선조 1)년 12월 왕에게 올린 상소문/출처:네이버/한국한중앙연구원)


 진차(進箚)

 성학(聖學)에는 큰 실마리가 있고 심법(心法)에는 지극한 요령이 있습니다. 이를 드러내어 그림을 만들고 이를 지적하여 해설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도에 들어가는 문(入道之門)'과 '덕을 싸흔 기초(積德之其)'를 보여 주려 하는데, 이는 제가 부득이하여 만들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임금의 마음은 온갖 정무가 나오고 온갖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많은 욕심이 서로 공격하고 많은 사악함이 번갈아 침범하는 곳입니다.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태만해지고 방종함이 계속된다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 같아서 누가 이를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중략) 이 도를 만들고 이 설을 지은 것이 겨우 열 폭의 종이에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를 생각하고 익히는 것이 단지 평소 한가한 틈을 타서 하는 공부에 불과하지만, 도를 깨달아 성인이 되는 요체와 근본을 바로잡아 정치를 베푸는 근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대학도(大學圖)

 경(敬)이란 마음을 주재하는 것이며 만사의 근본이다. 그 힘쓰는 방법을 알면 '소학'이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시작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소학'이 이것에 의지하고서야 시작될 수 있음을 알게 되면, '대학'도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끝을 맺을 수 없게 됨을 일관하여 의심치 않게 된다. 마음을 일단 세운 뒤 이 경에 의해 사물을 밝히고(格物), 앎을 투철히 하여(致知), 사물의 이치를 모두 궁리하게 되면 이른바 "덕성을 높이고 학문을 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尊德性而道問學). 이 경으로써 뜻을 성실히 하고(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여(正心), 자신의 몸을 수양하면 이른바 "먼저 그 큰 것을 세우면 작은 것도 빼앗기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 경으로써 집안을 바로잡고 나라를 다스려서 천하에까지 미치면 이른바 "자기 자신을 수양해서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공손한 태도를 독실히 하여 천하가 태평해지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상의 모든 것이 하루라도 경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경이라는 한 글자가 성학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요체가 아니겠는가? (이상은 '대학혹문'에 나오는 주자의 말)

 경이라는 것은 위로나 아래로나 모두 통하고 공부를 착수하는 데 있어서나 그 효과를 거두는 데 있어서나 항상 힘써서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의 말이 위와 같았으니, 이제 이 열 개의 그림도 모두 경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요컨데 이(理)와 기(氣)를 겸하고 성(性)과 정(情)을 포함한 것이 마음입니다. 그리고 성이 발현해서  정이 될 때가 곧 마음의 기미(幾微)인데, 이는 온갖 변화의 중심이며 선악의 분기점이 되는 때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경의 태도를 유지하는 데 전념하여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더욱 이것들을 몸소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발동하지 않았을 때에는 잘 보존하는 존양(存養)의 공부를 깊이 하고, 마음이 발동한 뒤에는 잘 살피는 성찰(省察)의 습관이 익숙해져서, 진실됨을 축적하고 오래 힘써서 중간에 그만두지 않는다면, 이른바 정일(精一)의 방법으로 중(中)을 포착한다는 성학(精一執中之聖學)과 본체를 온전히 보존함으로써 모든 일에 올바로 대처한다는 심법(存體應用之心學)이 다른 곳에서 구하기 전에 여기에서 얻어질 것입니다.

[이황 '성학십도'/원본 '퇴계집' 권7/'한국문집총간' 29 (민족문화추진회, 1989)/동서양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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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점

 

1.본성이 이치인가 마음이 이치인가

 주자학의 기본명제는 "본성이 곧 이치이다."라는 의미의 '성즉리(性卽理)'이고, 양명학의 기본명제는 "마음이 곧 이치이다."라는 의미의 '심즉리(心卽理)'이다. 주자학에서는 모든 사물이 각각의 이치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이치가 있고, 개에게는 개의 이치가 있으며, 꽃에는 꽃의 이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치는 하늘이 정한 것이다. 하지만 양명학은 각각의 사물에 하늘이 정한 이치가 들어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모든 이치가 각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가 "만물이 내게 갖추어져 있다."라고 한 말의 연장인 셈이다.

 

[사진 왕수인(왕양명)/네이버 지식백과]

 

 한번은 왕수인이 친구와 함께 유람할 때 한 친구가 절벽에 피어 있는 꽃나무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세상에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는데 꽃나무는 깊은 산속에 있으면서 제 스스로 피고 지는 것이니 과연 내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자 왕수인은 "그대가 이 꽃을 보기 전에는 이 꽃과 그대 마음이 모두 고요할 뿐이었지만, 그대가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 비로소 꽃빛깔이 일시에 또렷해졌으니, 곧 이 꽃이 그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답하였다.

이런 왕수인과 친구가 절벽에 핀 꽃을 보면서 나눈 대화가 양명학의 '심즉리'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사진 주희/네이버 지식백과]

 

 이런 점에서 본다면 주자학과 양명학 모두 이(理)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유체계는 똑같이 관념론에 속한다. 다만 양자를 구분한다면 주자학은 내 밖의 사물이 객관적으로 있다고 보는 입장이므로 객관적 관념론이라고 불리고, 양명학은 객관적 존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불린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모두 유학이며 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인본주의이다.

인본주의란 세계 만물의 기준을 사람으로 보는 인간중심주의를 뜻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사물에 대한 감각과 인식이 인간 개개인의 판단에 달여 있기 때문에 그 개별 인간 하나하나가 만물을 재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얼핏 보면 유가의 인간중심주의와 같아 보인다. 그러나 유학의 또다른 특징은 도덕중심주의이다. '성즉리'와 '심즉리'의 이가 자연법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덕법칙인 것이며 그런 점에서 '성즉리'의 성은 도덕성이고, '심즉리'의 심은 도덕심이다.

 주희는 '성즉리'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보았다. 하지만 예전부터 전해 오는 '대학'에서는 격물치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고 보고 정이천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더하여 새로 134자를 만들어 넣었다.

 '격물치지'는 '사물에 나아가(格物)' '앎을 완성한다.(致知)'는 뜻이다. 이 말만 보면 앎의 대상이 사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궁극적인 탐구대상은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 속에 들어 있는 이(理)이다. 그렇기 때문에 '격물궁리(格物窮理)'라고도 한다. 주희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상만물은 모두 각각의 이를 지니고 있고 사람에게는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신령한 앎의 능력이 마음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 모든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 이미 알고 있는 이치를 바탕으로 매일매일 탐구해 가다 보면 마침내 하루아침에 모든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물의 겉과 속, 정교하고 미세한 사물과 거친 사물 할 것 없이 사물의 이치가 다 깨달아질 것이며 내 마음의 온전한 본 모습과 그 마음의 활용이 밝아지지 않음이 없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주희의 말처럼 온 세상 만물을 다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주희는 독서를 통해 깨닫는 것과 함께 유추법을 제시하였다. 유추법이란 10개 가운데 7~8개를 깨달으면 나머지는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얼핏 보면 천하 만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쉽게 이해 되지 않는다. 이 점은 이렇게 생각해 보자. 개와 고양이와 나무와 돌의 이치는 모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모습과 역할이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개의 이치는 어떤 것일까? 본래 성리학에서는 이치는 변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선(善)이라고 본다. 따라서 개의 이치를 따지는 일은 어떤 개가 가장 좋은(착한) 개인지를 찾는 일과 같다. 가장 좋은 개는 주인 잘 따르고 집 잘 지키는 개일 것이고 주인을 물거나 도둑을 보고 겁을 내는 개는 나쁜 개가 된다. 그리고 이런 평가 원칙은 지금 우리집에서 기르는 개만이 아니라 옆집 개와 뒷집 개,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다른 나라 개들까지도 모두 해당되며, 이미 죽은 개나 앞으로 태어날 개에게도 해당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리학에서는 이치가 사물 존재보다 앞선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착한) 고양이는 어떤 고양이일까? 쥐 잘 잡고 주인 잘 따르는 고양이가 착한 고양이일 것이며 이 원칙도 이미 죽은 고양이나 앞으로 태어날 고양이에게까지 해당된다. 나무도 마찬가지이다. 목재로 쓰기도 좋으면서 예쁜 꽃과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좋은(착한) 나무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개와 고양이와 나무의 이치는 다르지만 좋은 나무, 좋은 고양이 좋은 개로 생각을 넓히면 그 이치는 모두 같아진다. 따라서 모든 만물의 이치는 결국 선의 이치라는 점에서 같다는 결론이 나오며 이러한 이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사실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사물의 이치를 따지는 것은 사람 중심의 논리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중심주의인 유학의 입장에서는 이상할 것이 없다. 그래서 깨달은 궁극의 진리는 그 이치가 내 속에 들어 있는 사람다움의 이치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희는 만물의 이치를 다 합친 것이 태극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격물치지를 통해 궁극에는 태극을 깨닫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젊어서 주자학을 공부했던 왕수인은 주희의 격물치지 이론을 직접 실험해 보았다. 1주일 동안 대나무 앞에 앚아서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대나무만 바라보며 대나무의 이치를 탐구하다가 병을 얻었다. 그런데도 대나무는 대나무대로 나는 나대로 있음을 경험하였다. 왕수인이 깨달은 것은 내 마음이 대나무에게 갈 때 대나무가 비로소 존재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내 마음 속에 들어 있는 타고난 양지를 잘 기르면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왕수인의 생각은 생 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여우는 하던 이야기로 되돌아 갔다. "내 생활은 단조로워. 나는 닭을 쫓고, 사람들은 나를 쫓지. 닭들은 서로 비슷하고, 사람들도 모두 비슷해. 그래서 난 좀 권태로워. 그러나 네가 날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햇빛을 받은 것처럼 밝아질 거야. 다른 발자국 소리와는 다르게 들릴 너의 발자국 소리를 나는 알게 될 거야. 만일 다른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나는 땅속으로 숨을 거야.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 소리처럼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길 봐! 밀밭이 보이니? 나는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나한테 쓸모가 없어. 밀밭을 보아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그래서 슬퍼! 그러나 네 머리카락은 금빛이야. 그래서 네가 날 길들인다면 정말 신날 거야! 밀밭도 금빛이기 때문에 밀은 너를 기억하게 해줄 거야. 그래서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까지 사랑하게 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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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과 양명학의 의미와 사상사적 영향

 성리학은 중세 시기 동아시아 3국 모두의 보편적 세계관이 되어 700년 이상을 이어 왔고, 양명학 또한 인간 주체와 실천을 강조하면서 근대적 사유의 싹이 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은 명대 이후 사회구조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교조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양명학 또한 인륜이나 사회기강을 거부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사진 태극도설/네이버 지식백과]

 

 주자학은 특히 중세 봉건왕조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서 사상적 유연성이나 새로운 발전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고착화하는 경향을 보였고, 양명학 또한 개인 주체를 강조하고 실천을 중시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래서 명말 청초에 이르면 양명학의 폐단을 비판하면서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는 새로운 학문 경향이 등장한다.

 

[사진 황종희/네이버 서울대학교철학사상연구소]

 

[사진 고염무/네이버 지식백과]

 

 그러한 경향의 처음을 연 사람은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등이다. 황종희는 양명학의 폐단을 비판하고 개인적 도덕 수양의 한계를 넘어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계몽사상가적 정치 이론을 전개하였다. 고염무 또한 경전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세론을 찾으려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훈고학과 비슷한 고증학을 새로운 학문 방법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왕부지는 고대부터 내려온 기철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상을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흐름은 대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들어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근대로의 전환이 일어났으며 그 과정에서 서구의 충격과 그에 대한 대응이 복잡하게 전개된다. 크게는 봉건제를 유지하면서 성능이 우월한 무기를 중심으로 서구의 우월한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이려는 양무파(洋務派)와 이를 넘어서서 정치,경제의 개혁까지를 주장한 변법파(變法派)가 대립하였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모두 근대 이전까지 사회를 이끄는 사상으로 기능하였으며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늘날 다시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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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자학과 양명학의 관계

 양명학의 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양명학이 주자학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계승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주자학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극복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사진 주희/네이버 지식백과]

 

 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약간이 차별성이 있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봉건사회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다는 측면을 중시하여 모두를 이학(理學)이라고 부른다.그러나 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관학이었던 주자학의 엄숙주의,귄위주의에 반기를 든 것이 양명학으로서 이러한 변화 과정이 이지(理智)에 입각한 규제에서 서정(抒情)에 입각한 자연주의로, 이치가 바깥 사물에 있음을 인정하는 객관에서 내 마음속에 들어 있다고 보는 주관으로, 전통에서 반전통의 자유주의로 나타났다고 보고, 주희의 이학(理學)과 구별하여 심학(心學)이라고 부른다. 또 일부에서는 크게 보면 후자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양명학의 심학 체계 속에 명말 청초에 유행하는 기학(氣學)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는 입장에서 기학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사진 왕양명(왕수인)/네이버 지식백과]

 

 

 또 다른 문제는 고대 유가사상과 주자학,양명학의 연관에 대한 이해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주희가 성선설을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유가의 전통을 순자가 아니라 공자에서 맹자로 이어진 것으로 보았지만 오히려 학문 내용을 보면 주지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순자 사상의 영향으로 이해되며, 이와 달리 왕수인의 학문은 맹자의 양지양능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유가 전통에 더 가깝다는 주장이 있다. 그 밖에도 왕수인 사상과 육상산의 사상에 유사성이 많기 때문에 육왕학(陸王學)이라고 표현을 쓰면서도 두 사상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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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사진 백과사전]

 

 퇴계 이황(李滉)은 조선 초기의 혼란기였던 연산군 시대에 좌찬성 식(埴)의 7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며, 12세때 작은 아버지에게서 '논어'를 배웠고 20세경에는 건강을 해칠정도로 성리학을 익히는데 몰두했다고 한다. 1527년(중종2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재했으며,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후에 여러 관직을 거친 후 1549년 낙향해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연산군때 태어나 중종, 인종, 명종, 선조의 5대에 걸친 정치적 격동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태어나기 3년 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네 살이 되던 해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특히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는 정암 조광조가 희생당한 중종 때의 기묘사화를 직접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마흔다섯 살 때 일어난 을사사화에는 자신의 형이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고 자신도 삭탈관직을 당했기 때문에 사화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가 권신들에 의해 좌절되는 현실을 목도하고 은둔을 결심하여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 동안 도산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강학하였는데, 그의 치열한 학문적 열정은 동시대 많은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 스스로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퇴계이황 동상/사진 백과사전]

 

 그의 학문적 축적은 저술뿐만 아니라 당시 학자들과 교환한 편지글 속에 남아 있다. 그중 정자중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주자의 글을 읽으면서 "마치 바늘이 몸을 찌르는 것처럼, 잠자다가 갑자기 확 깨는 것처럼" 절실하게 느꼈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의 주자학에 대한 치열한 탐구심을 엿볼 수 있다.

 이황의 저술 중 대표적인 것들로는 '성학십도', '계몽전의', '주자서절요'와 다량의 서간문을 들 수 있으며, 대부분 '퇴계집'에 실려있다.

 

 이런 퇴계 이황의 철학 사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기대승과의 논쟁을 통해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사단칠정' 논쟁이다. 이 사단칠정 논쟁은 한국철학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이며, 그 발단을 보면 학자 정지운이 작성한 '천명도(天命圖)'를 이황이 수정하면서 정지운이 "사단은 이(理)에서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 것이다(四端發於理 七情氣之發)"로 고치자 이에 대해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라 이황과 기대승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입장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이다.

 이 논쟁은 두 학자 간의 개인적 논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큰틀에서 보면 당시 학계에 주자학의 이기론과 심성론에 대한 두가지 다른 해석방식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논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이 논쟁을 통해 조선의 주자학은 주자학의 기본이론인 이기론과 심성론을 결합시킴으로써 중국 주자학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독자성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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