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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우리가 불행한 이유를 다른 데서 찾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집착하고 스스로의 단점에 집중하기 때문에 행복과 멀어졌다고 보는 게 러셀의 믿음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고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며 동참하는 게 바로 행복 부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별것 아니지만 나는 나 자신을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만들 수 있다.
나한테는 그런 능력이 있다.
-그르초 막스(Groucho Marx)-

러셀은 부유하고 지체 높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비상한 영민함을 보인 자작(子爵, 백작보다 아래 남작보다 위인 영국 귀족)이었다. 하지만 겨우 다섯 살 때 이미 침울하고 기운 없는 아이였다고 고백한다.

 

"난 태어날 때부터 행복하지 않았다. 사춘기 시절의 나는 사는 게 싫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자살을 꿈꾸었고 실행에 옮길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수학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은 열망 덕분에 자살 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자살 충동에 사로잡혔으나 수학에 관한 학구열로 스스로를 다잡은 10대 소년, 목숨을 연명할 이유를 이런 데서 찾다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을 정도다. 어쨌든 러셀은 수학 덕분에 절망과 무기력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우리에게 '점점 줄어드는 자기 몰두'라는 화두를 던진다. 러셀은 학구열을 불태웠다. 연구에 몰두한 덕에 그는 20세기 최고의 석학 중 한 명이 되었고 수많은 성과를 일궜으며 차츰 우울증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었다.

 

러셀이 자살 충동을 사그라뜨릴 수 있었던 요인이 수학이었다는 말을 듣노라면, 그 요인이 다른 사람들에겐 되레 자살 충동을 부추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우리가 러셀의 이야기에서 배우게 되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주는 도전과 분투에 몰두한다면 더 행복해진다는 사실이다. 러셀의 믿음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집착할 운명일 수밖에 없는 각자의 '어리석음과 단점'이 있는데, 우리가 나름의 충족감을 느낄 무엇인가를 찾는다면 청교도적인 엄격한 태도로 자신의 단점에 집중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자기를 돌아보는 강박증이 있다.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는데 그중 첫째는 우리가 우울감에 흠뻑 젖은 술판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북유럽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러셀은 우리가 잔뜩 짜증이 날 때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해버리고픈 유혹을 느낀다는 걸 이해했다. 그러면서도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든 애를 쓰는 대신 몇 시간 동안 불행 자체를 망각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었다. "술에 취하는 건 일시적 자살이지"라고 러셀은 한마디 툭 던진다.

 

오늘날 예를 들어보자, 2006년에 잡지 '톱 산티(Top Sante)'가 40대 이상의 여성 2천 명을 대상으로 자신의 몸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자기 몸에 몇 점을 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평균적으로 10점 만점에 3.5점을 준다는 결과가 나왔다. 대략 열 명 가운데 여섯 명의 여성들이 체중을 감량하기 위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으며 변비약을 복용한다고 인정했다. 응답자들은 평균적으로 10킬로그램 이상을 줄이고 싶어 했고 그들이 선망하는 체형의여성을 보면 부러움을 느낀다고 답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루기 힘든 체형에 대한 강박증이 어느 정도는 있다. 그런 몸을 갖게 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걸 뻔히 아는데도 수많은 잡지와 매체로 인해 우리 마음은 끊임없이 자극을 받는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썩 만족감을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꺼이 스스로를 가장 좋아하는 관심 대상으로 여길 필요가 있다.

 

우리가 모두 러셀처럼 수학에 관한 천부적 재능을 이용해 끔찍한 자기 강박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마냥 더 행복해지기만을 바라며 넋 놓고 앉아 있는 대신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수는 있다. 이런 추동(推動) 우리가 러셀에게 빚진 부분이다.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생각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에게 러셀이 전하는 조언은 이것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무엇이든 하라.

어린 러셀이 그랬듯 우리 역시 선택을 해야 한다. 행복해질 텐가, 불행해질 텐가? 서슴없이 행복 쪽을 택한 이들에게 러셀이 다시 묻는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노력이 해가 될 것 같은가? 이에 대한 대답이 'No'라면 왜 멀거니 앉아만 있는가. 지금 당장 벌떡 일어나 노력에 불을 지펴라.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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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이 생각하기에 최고의 직업은 계속해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직업이다. 일이 배움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기회를 포착할 필요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라. 그러면 일평생 단 하루도 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공자

 

자기 직업을 좋아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을 이미 충분히 만나봤다면 이번에는 자기 직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그 일을 좋아하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라. 러셀은 두 가지 이유를 찾아냈다.

 

첫째, 자기 일에 만족하는 사람들의 직업은 기술을 습득하고 연습할 기회를 제공한다.

 

러셀이 말하길, 우리는 기술을 습득하고 그 기술을 사용하는 걸 좋아한다. "물구나무를 설 줄 아는 소년은 어느덧 두 발로 서 있길 꺼리게 된다."

 

기술을 습득해 꾸준히 연습하며 샐행에 옮기는 건 우리에게 크나큰 만족감을 준다. 때론 그 기술이 경쟁이라는 이름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자신이 변호사나 정치인이라면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나 경쟁자에게서 더 나은 부분을 배워 자기 역량을 더 키우게 된다.

 

어려운 일을 수행함으로써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에 기술을 습득하는 경우도 있다. "비행기 조종 묘기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은 매우 정교한 조종 기술을 통해 만족감을 얻는다." 뭐, 겁에 질린 여행자 350명이 그 조종사 뒤쪽에서 비명을 지르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행복감을 선사하는 기술이 있다면 그 기술로 인해 큰 보상을 받을 필요도 없고, 자기 분야 외의 사람들에게 높이 칭송받을 필요도 없다. 러셀은 본인이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자기 일에서 행복을 느끼는 배관공들 얘기를 인상 깊게 들었다.

 

하지만 어떤 기술이 계속해서 기쁨의 근원이 되려면 그 안에 변화 발전의 가능성이 포함돼 있어야 한다. 변호사나 정치인은 수년에 걸쳐 어느 위치를 향해 계속 올라갈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 직업은 특정 시간이 지나면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진 않는다.

 

그럼 우린 뭘 해야 하나? '지겹지만 먹고살게 해주는' 틀 안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고 새로운 기술을 계속 개발할 수도 있다. 정부가 산출한 프레젠티즘(Presenteeism) 비용, 즉 일하러 직장에 와서 앉아 있긴 하지만 능률적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손실은 영국의 경우 연간 9억 파운드(약 1조 4,375억 원)라고 한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닐 수 있다. 러셀이라도 충분히 제기했을 만한 내용이 있다. 9억 파운드라는 숫자로 산출된 비용보다도 훨씬 더 큰 비용이 제기되는데, 이 비용은 삶에 대한 열정 손실이라는 항목으로 매겨질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잘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서 기쁨을 얻지만 그렇게 기쁨을 얻는 구조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위태로워진다. 일 자체는 계속 변한다. 신제품, 새로운 체계, 참신한 생각, 신기술 등은 우리가 애써서 습득한 기술을 서서히 약화시킨다. 경제 추세는 우리 일의 가치를 감소시킨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어떤 일은 '단순화'되고 있고 또 어떤 일은 외주 제작에 맡겨진다. 그보다 많은 일들은 평범한 방식에 따라 수행되도록 서로 합해진다. 우수성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규모의 효율성에 더 많이 좌우되는 팀들이 일을 맡는 것이다.

 

평생 동안 배움을 이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용주가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는 수밖에 없다. 업무 시간을 쪼개야 한다면 분명히 얼마간 경제적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더 이상 한 가지 기술만으로 만족스러운 이력을 채워갈 수 없다.

훈련이나 직업 교육을 받고는 싶은데 자금이 걱정된다면 정보 검색을 통해 여러 가지 창구를 찾아보라. 국가 차원의 교육 프로그램도 있고 교육비를 어느 정도 지원받을 수 있는 방법도 여럿 있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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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인 것만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다. 이는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운이다.

 

 

청년기는 12월31일 밤에 늦게까지 있는 걸 허락받는 시기이고 중년기는 그날 밤 의무적으로 늦게까지 있어야만 하는 시기이다.-빌 본(Bill Vaughn)

 

 

러셀의 책 '행복의 정복' 전반부는 우리가 왜 불행한지 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러셀의 관점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얘기는 천천히 들어보기로 하자. 일단 러셀은 "만약 당신이 지금 행복하다면 당신 친구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행복할까 자문해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행은 언제 어디서든 당신과 마주친다"고 덧붙인다.

 

모든 사람들이 너무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행복해지겠노라 마음먹는 통에 그 누구도 마음껏 즐길 수 없는 사교 모임에 참석해본 적 있는가? 그것만큼 짜증나는 경험도 없다. 새해 첫날이야말로 가장 좋은 예다. 하지만 비슷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는 얼마든지 더 있다. 가족 생일(특히 자기 생일), 총각 파티나 처녀 파티, 친척집 방문, 친구 애들까지 가세한 모임, 호화스러운 휴가 등등.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느라, 혹은 불행을 밀어내느라 엄청난 노력과 돈을 쏟아 부으며 숨을 헉헉댄다. 러셀이 지적하듯 우리는 병적일 정도로 지나치게 촉각을 곤두세워 행복을 탐색하거나 불행을 거부하는 와중에, 정작 우리 자신이나 친구들에 관해서는 외면한다. 중요한 걸 놓친 상태에서 뭔가가 바뀔 거라는 희망을 품은 채 우릴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을 일들을 미련하게 되풀이하며 산다.

 

우선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게 있다. 우리 대부분은 종종 행복하지 않은 순간과 맞닥뜨린다. 최소한 더 행복해질 수 있는데 그러질 못하고 산다. 이건 수치스러운 일도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러셀이 조사하지 못한 부분을 하나 짚고 가야 한다. 대체로 우리의 외부 환경은 행복감과는 크게 상관없다는 점이다. 미국의 퓨 리서치센터는 사람들이 지난 40여 년 동안 경기 불황과 호황, 의료 및 과학기술의 발전을 겪으며 얼마나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지 꾸준히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수치는 희한하게도 항상 비슷하다. 미국 국민의 절반 정도는 꽤 행복하고 약 30퍼센트는 매우 행복하다고 답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불행을 열거하자며 책 한 권으로는 모자랄 하위 집단이 늘 있기 마련이다. 노숙자, 만성 질병을 앓는 환자, 부당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 정신 질환자 등등. 이런 사람에게 불행은 상당 부분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런데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이 느끼기에 우리 주변 환경은 40년 전에 비해 놀랄 만큼 좋아졌다. 하지만 퓨 리서치센터의 통계에 따르면 자가용, 해외여행, 인터넷, 위성 텔레비전, 리필 방향제도 행복 지수를 높이지는 못한다고 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러셀의 희망사항을 실행해보자고 마음먹을 수 있다. 즉 바깥세상의 애매한 즐거움 속에서만 행복을 찾으려 아등바등하는 걸 그만두기로 해보자. 가끔은 무력감을 느낄 때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우리에겐 변화의 힘이란 게 있다. 우리는 자기 주변을 관리하고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박차를 가해 더 많이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일은 덜 할 줄 아는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러셀은 새해 첫날 '행복해지기로 굳게 다짐하며' 외출했던 1930년대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 물질적인 것이 행복을 전해주지 못하는다는 걸 깨닫지 않는 한, 현대를 사는 우리의 하루하루도 행복감보다는 부담감과 비장함이 가득한 매해 12월31일과 같을 것이다.

주기적으로 인내심을 요구하면서 억지로 웃어줘야 하는 모임, 약속, 혹은 친구 관계가 있는가? 당신이 그걸 싫어하고 늘 싫어했고 앞으로도 계속 싫어할 거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라. 그 모임이나 관계에서 벗어나기가 그리 녹록하진 않겠지만,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기 전까지는 그만큼 불행의 시간이 하염없이 연장될 뿐이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탈출을 시도하라.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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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행복 철학, 두 마음

러셀은 어떤 일을 계속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무의식을 여러 가지 문제 해결에 착수하게 만든다. 그는 이 멀티태스킹이 우리한테도 가능한 얘기라고 말한다.

 

예술은 의식과 무의식의 긴밀합 결합이다. -장 콕토(Jean Cocteau)

 

어느날 아침 눈을 떴는데 몇 주 동안 갈피도 못 잡고 있던 문제의 답이 번뜩 떠오른 적 있는가? 지난달 그 문제 때문에 밤낮으로 애를 태우며 고민하던 때를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 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을까 이해가 안 될 정도다.

 

러셀은 이 문제 해결 과정이 전혀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일종의 문제 해결 기계처럼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풀지 못한 문제를 부여안고 걱정 끝에 잠이 들면 다음 날 아침 또다시 불행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난다. 이는 마치 괴로운 습관과 같다. 골치 아픈 문제는 여전히 고집스레 해답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다시금 괴롭고 언짢은 마음으로 잠이 든다. 단순히 문제 해결에 실패하는 것뿐 아니라 너무 기진맥진해서 해결할 힘조차 소진돼버리고 만다. 심지어 낮 동안 다른 문제들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결국에는 문제 자체를 그냥 내버려두지도 못하면서 어떤 통찰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이도저도 아닌 일종의 평형 상태에 도달한다. 다소 몽롱한 상태에서 이것저것 다른 일을 한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회의 준비를 하고 작년에 했던 일과 대동소이한 일을 하면서 평정심을 찾으려고 한다.

 

이상의 내용이 우리의 모습이라면 러셀은 전혀 달랐다. 복잡한 문제 해결에 관한 한 러셀은 수학의 달인이었고 윤리학의 도사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단 몇 시간, 또는 며칠 동안 가장 최대치의 집중도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생각에 임한다고 한다. 그런 다음 자기 무의식에게 명령하기를 "수면 아래에서 작업을 진행하라"고 한 뒤 몇 달 동안은 그 문제에 대해 또다시 생각하지 않는다. 나중에 그가 자기 머릿속 서류 정리함에서 그 문제를 자아내면, 이미 무의식이 그 서류를 꺼내 말끔히 해결한 다음 다시 서류함에 정리해서 넣어놓은 걸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우리는 단지 러셀처럼 우리 생각이나 마음을 개념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러셀의 방법을 찬찬히 살펴보라. 실제로 이 과정이 적용되는 예는 상당히 많다. 가령 6개월 전에 작성했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꺼내서 다시 봤더니 구조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면 당신은 이미 의식적 사고 없이 문제 해결 과정을 진행시킨 것이다.

 

러셀의 방식을 적용하려면 다음 요소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1. 계획 수립 : 혹시 몇 주 동안 자신의 결정을 소금에 절이듯 시간 속에 놔둘 생각이라면 전 과정을 일찍 시작해야 한다.

2. 강도 : 러셀은 문제를 마음대로 갖고 놀라는 말을 했던 게 아니다. 초기 처리 과정을 시행하는 데 자신의 모든 능력을 강도 높게 쓰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문제가 뭔지 취합해서 정리해두고 해야 할 일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 정도는 처음부터 필요하다는 뜻이다.

3. 훈련 : 계속 방해를 받는다면 무의식은 제 할 일을 해내지 못한다. 자신감을 가지고 무제를 그냥 내버려두라.

4. 현실성 : 우린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 우리의 무의식 처리 장치가 우리 자신보다 더 나을 리는 없다. 무의식 장치는 그저 훼방받지 않고 정신 산만해지지 않는 상태의 우리 자신일 뿐이다. 말도 못하게 어려운 문제는 전문가에게 일임하고 싶겠지만 그렇다 해도 결과는 미지수다.

 

그래도 시도해보자. 분명 효과가 있다. 혹시 실패할 경우 도움을 청하거나 다시 본인 능력들을 불러 모을 회의를 소집하면 된다.

 

리포트를 쓰거나 학술적 연구를 진행하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작성해야 할 때, 일단 일에 착수하기 전에 몇 주 동안 대략적 밑그림을 그리는 습관을 들이라. 전체적인 그림을 쭉 훑어보거나 다른 이들에게 조언을 듣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개선이 필요한 데가 어딘지 확인하라. 그리고 최소 며칠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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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도서 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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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행복은 우리가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그네들의 행복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게 있다.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오한 행복을 누리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바라건대, 나 동물들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네.
그 얼마나 느긋하고 자족하는 모습들인지.
-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러셀은 월트 휘트먼의 시로 책의 서두를 연다. 휘트먼이 왜 동물을 좋아하는지에 관한 이 시는 한편으로 러셀의 마음을 대변한 것임에 틀림없다. "동물은 자신의 상황을 걱정하거나 한탄하는 법이 없다. 어둠 속에 잠 못 이루며 자신의 죄 때문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근본적으로 이 시의 내용은 러셀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일종의 행동 방침이다.

 

물론 동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나는 애완용 거북이를 한 마리 키우고 있는데, 내 생각에 이 녀석은 나랑 같이 텔레비전으로 럭비 경기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어쩌다 보니 나는 그렇게 믿게 됐지만 아내는 거북이의 취향 같은 걸로 왈가왈부하거나 관심을 기울일 사람은 아니다.

 

휘트먼이 언급하는 동물들을 보라. 그네들의 초연한 모습은 실로 우리에게 큰 자극이자 가르침이 된다. 우리는 문제 해결에 골머리를 썩으며 평생을 징징댈 필요가 없다. 많이 배웠거나 문제 해결 의지가 있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돼지는 자기 배설물 위에 누워 뒹굴다가 어느새 소시지가 되고 만다. 자기 분뇨 위에 뒹구는 것도, 소시지가 되는 것도 우리가 돼지더러 축하할 일이라고 얘기할 만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마치 돼지처럼 자기 배설물 위를 뒹굴면서도 개의치 않고 자족하는 존재라면, 어느 누구를 해코지하지도 말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다가 순리대로 도살장에서 죽임을 당해 장렬히 소시지가 되고 말라. 도살장에서 죽든, 럭셔리 호텔에서 스트립 걸 다섯 명을 옆에 끼고 코카인을 들이마시다 죽든 어쨌든 언젠가는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이것이야말로 러셀의 관점에서는 총명하게 행복해지는 데 완벽히 다가서는 게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해보자. 앞으로 10분 동안 잔뜩 심각하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 중인가? 세상만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사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인생의 핵심은 무엇인가? 자, 조심스레 단언컨대 10분이 다 지나도록 당신은 그 어떤 답도 찾을 수 없을 것이며 더 행복해지지도, 더 만족스러움을 느끼지도 못할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떤가? '아, 배고프다, 저녁으로 뭘 먹을까? 오늘은 왠지 인도 음식이 날 부르는군. 짐한테 문자나 보내봐야겠다. 짐이 별일 없으면 만나야겠지. 부다페스트로 여행 갔던 얘기도 듣고 싶군.' 이 생각 덕분에 결과적으로 친구와 우정이 쌓이고 기분 좋은 식사를 하고 중부 유럽에 대한 얘기도 듣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식의 즐거움은 겉치레로 보이거나 깊이가 부족한 게 아니냐고?

 

이런 질문에 러셀이 둘려주는 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세계에서 느끼는 즐거움,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의 역량껏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행복의 근원이 된다.

 

쾌락주의는 지나친 방종이나 탐닉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우리 주변의 세계에서 기쁨을 취하는 것이다. 방금 유럽 여행을 하고 돌아온 친구가 있는가? 오랫동안 못 본 친구가 있는가? 지금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만나라.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이 책의 다음 장은 묵묵히 기다려줄 테니까.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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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특출하지 않다는 이유로 행복할 권리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신은 평범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게분명하다.
평범한 사람들을 이렇게나 많이 만드시지 않았는가.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던 수년 사이에 처음으로 널리 공표된 생각이 있다. 그건 바로 모든 이들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으며 누구든 그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곧 지식인 계층 사이에 확산된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났고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이 생각의 핵심은 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고 자기 존재를 눈에 띄게 드러내고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D. H. 로렌스가 노래한 육체노동자 주인공부터 T. S 엘리엇이 그린 중년의 프루프록이 보여주는 좌절까지, 보통 사람들이 드러내는 희로애락 또한 마땅히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제기된 것이다. 가난하고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역시 행복을 희구할 권리, 행복을 누릴 자격을 갖췄다는 사상이 보편적으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행복 구추권이 있다는 소리가 우리에겐 그리 놀랍지 않다. 그런데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에게 주입되다시피 한 믿음이 있다. 즉 오직 위대한 사람들만이 불행을 담아낼 비극의 용량을 갖추고 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소량의 슬픔만 감내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러셀은 헨리 입센이 쓴 희곡 <유령>을 <리어왕>과 비교하면서 입센의 작품을 칭찬한다. <유령>에는 남편과 사별한 한 여인(알빙부인)이 등장한다. 남편의 불륜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종교적 도덕성에 순응하던 이 여인은 결국 희생불능으로 무너져버리고 그녀의 아들과 연인 역시 파멸한다. 이 희곡이 상연되는 걸 본 적 있다면 웃을 일이 별로 없는 공연임을 알 것이다. 매독 얘기가 나오는 희곡에 웃음 코드가 들어가긴 힘들다. 알빙 부인은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인데도 그녀의 성격상 결함이 결국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의 파멸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분명히 비극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평범한 여인의 이야기에 마음을 써야 할까?

 

관심을 갖지 않을 이유는 또 뭐냐고 러셀이 묻는다. "우리는 더 이상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기지 않는다. 비극적 열정을 발산할 권리가 이들에게만 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악착스레 일하고 고되게 살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러셀은 이렇게 말하면서, 고귀한 비극은 공동 소유라고 밝힌다. 비극은 한 개인에게 우연히 닥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모습에서 기인하는 무엇이라고 본 것이다.

 

행복이 '감히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는 낡은 생각은 누가 봐도 이상하다. 하지만 행복과 자기 자신을 무관하게 여기는 이런 생각은 매일 쏟아지는 뉴스를 통해 여전히 우리 무의식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수백만 달러를 잃었지만 그래도 수백만 달러가 아직 은행에 고이 남아 있는 사람은 평생 그런 액수의 돈을 만져볼 일도 없고 으리으리한 집에 살 일도 없는 우리 같은 사람에 비하면 암만 해도 자기 불행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명한 사람이 암에 걸리면 안됐다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이웃 사람이 똑같은 진단을 받았을 때보다 더 슬피진 않다. 완벽한 세계라면 우리는 누구에 관한 소식이든 상관없이 똑같은 방점을 찍어 다룰 것이다. 하지만 그건 완벽한 세계가 아닐 것 같다. 하루 스물네 시간 중요성이 동일한 뉴스만 나오는 텔레비전을 봐야 한다는 얘기 아닌가. 생각만 해도 숨 막히고 지긋지긋한 노릇이다.

 

부자들, 유명인사들, 특권층 사람들도 안 좋은 일을 겪는다. 하지만 그들의 불행은 우리가 직접 겪는 나쁜 일보다 심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딱 일주일만 연예인 촌평(gossip)을 끊어보라. 가급적이면 30년이고 40년이고 꾸준히 그렇게 해보라. 창조적 자극을 위해 우리 가정을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도움과 지지가 필요한 사람들은 연예인이 아니라 우리의 가족과 이웃, 친구와 직장 동료들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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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을 게 하나도 없는 책, 지루한 책, 재미없는 책... 모두에게 이런 책이ㅣ 한 권쯤은 있을 것이다. 그런 책들을 통해 얻는 교훈 하나. 스스로를 표현하는 재주는 말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다.

 

더운 사람이 추운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알렉산드로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이제 우리는 바이런식 불행에 대한 광범위한 탐색 말미에 다다랐다. 아떤 면에서 보면 불행하다는 게 심오하거나 고상하다고 여기는 것, 행복한 사람들은 단순하다고 보는 견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감정은 위대한 사상가들을 위한 몫이라고 여기는 것 등은 모두 어리석은 생각이다. 러셀은 이런 생각들이 우리 스스로 내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리고 모든 게 더 좋아질 수 있는 외부 세계의 증거를 외면하고 새롭거나 뜻밖의 사건이 좋은 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근거를 무시하는 것도 우라의 어리석음을 키운다고 말한다.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해보는 게 집에 가만히 앉아서 답도 없는 문제를 붙들고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러셀의 시대엔 인터넷도 블로그도 없었지만 그는 분명 인기 작가였다. 그가 내놓은 결과물이 입증하듯 러셀은 소재가 고갈되거나 글길이 막히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의 글은 경험 덕분에 세상에 굴러 나왔다. 예컨대 러셀은 사람들이 당신 의견을 인정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를 한다. 그는 이미 예전에 자기 의견을 표명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투옥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글을 쓰고는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러셀은 이런 조언을 한다. "뭘 써보겠다고 애쓰지 말라. 차라리 쓰지 않으려고 애써보라. 세상 속으로 나가라. 해적이 되든 보르네오 섬의 왕이 되든 러시아 노동자가 되든 하라."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뭔가 쓸 거리가 생길 것이라고 러셀은 충고한다.

 

지난 80년 동안 우린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건 아닐까? 그 당시에도 러셀이 제안한 경험 가운데 훌륭한 문학으로 탄생된 건 세 번째 제안 하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불굴의 의지로 조사해서 나온 결과물 <수용소 군도>가 그것이다. 중요한 건 세상을 삐ㄸ가하게 보며 비난하기 이전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라는 러셀의 조언이다. 그냥 자기 머릿속에 담긴 내용을 무턱대고 쓰진 말라.

 

블로그 세계에서 확연히 눈에 띄는 부분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알고 싶다는 욕구를 뒤로 제치고 혼자 치고 나가는 경우다.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뭐, 아무거나 끼적거리는 거야 그저 소일하는 방법으로는 괜찮다. 하지만 러셀이 지적하듯 직접 경험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못한다.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바라만 보면서 자기 내부에 내내 갇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함정에 빠뜨리고 올가미로 옥죄고 있는 꼴이다.

 

러셀은 작가 지망생이 해적(물론 권고 사항은 아니다)이나 보르네오 섬의 왕(국경 재편성이라는 문제 때문에 만만찮은 일이긴 하지만)이 된다면 "자신의 글쓰기가 스스로에게 하찮게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작가 지망생은 뭔가 다른 할 일을 찾을 가능성도 있다. 글쓰기 말고 다른 데서 재능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현대이ㅡ 예를 들어 러셀의 말을 다시 곱씹어보자. 러셀이 살던 시데에는 누군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곧장 정치판에 뛰어들어야겠다고 말한다면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졸업 후 바로 정치에 입문하는 전문적인 정치 계층이 있다. 국회의원들이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할까? 물온 이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 제기되지만 찬성하는 쪽에서 노놓는 논점 또한 확실하다. 우리가 스스로를 표현할 때 경험은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며 우리를 보다 쓸모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자선 단체에 돈을 보낼 게 아니라 시간을 투자해서 직접 자선 활동에 동참해 보라. 봉사활동은 기부금만큼이나 가치 있으며 다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귀중한 무엇인가를 돌려준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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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질투를 경험한다. 질투는 단순히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 미래의 행복 가능성까지 빼앗아가 버린다.

이 세상에 누구도 나 같은 사람은 없다.
내 생각에 10년에 한 번씩 시대의 아이콘 같은 금발 미녀가 등장한다.
마릴린 먼로나 다이애나비가 그랬고, 지금은 바로 내가 그 아이콘이다.
-패리스 힐튼(Paris Hilton)

"어린이들은 질투심을 표현하는 데 있어 어른들보다 단지 약간 더 개방적이다." 그러면서 러셀이 말을 이어간다. "하녀 아야기를 들어보자..." 아니, 우린 하녀와 관련된 일화를 들을 생각이 없다. 모든 일을 우리 스스로 해야 하는 상황에서 러셀은 왜 하녀를 둬야만 할까? 그는 어째서 그렇게 특별한가? 이건 불공평하다. 우린 러셀의 이야기를 듣다가도 이렇게 불뚝 질투가 솟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질투 치료제는 오로지 행복뿐이다." 아니면 이런 표현은 어떤가. 남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불행한 이들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곤 한다. "어느 이집트 학자 앞에서 다른 이집트 학자를 칭찬해본 적 있는가?" 이건 러셀의 질문이지만 보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해보자. 언젠가 제3자에게 누군가를 칭찬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우리는 쓸데없는 얘기를 한다는 소리를 듣지만 나중에는 결국 그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 우리의 잘못은, 얘기를 듣고 있던 상대방의 어린애 같은 감정에 상처를 입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화제의 대상만큼 똑같이 칭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뾰로통하게 샘이나 내는 어린애로 만드는 건 확실히 질투만 한 게 없다. 누군가 상처받는 상황이 안 생기도록 다른 사람 칭찬을 점잖게 유보하면 어떻겠냐고? 이런 흔한 대안은 틀림없이 잘못된 생각이다. 이는 모든 것을 평범하고 흔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접근법이다. 그저 내면의 아이를 만족시키는 수준 낮은 접근법.

러셀은 문제의 반대편 끝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만약 우리가 러셀이 언급한 이집트 학자 중 한 명이거나 그런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이라면, 동료들의 흠을 찾는 게 아니라 칭찬할 이유를 찾는게 우리의 주요 임무다. 이렇게 대처함으로써 우리는 비교의 유의한 요소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는 부정적 방식을 대신할 대안을 찾아낼 수 있다.

물론 쉽지 않다. 대중매체가 비교라는 문제를 다루고 이를 정의하는 방식 때문이다. 누가 섹시하고 누가 못 생겼느냐, 누가 뚱뚱하고 누가 말랐느냐, 누가 베스트 드레서고 누가 워스트 드레서냐..., 이렇게 이분화한 강조는 늘 부정적이기 마련이다. 지금 언급할 영화를 보라고 권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예시 차원에서 얘기는 하겠다. 화려한 패션과 질투 문화의 고위급 여사제 같은 패리스 힐튼이 등장한<미녀와 폭탄(The Hotie and the Nottie)이라는 제목의 영화다. 내가 확인했을 당시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IMDB, Internet Movie Database) 최악의 영화 52위에 랭크되었다. 줄거리는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못 생긴 소녀가 있다. 소녀한테는 남자 친구가 없다. 그래서 대대적인 메이크오버가 감행된다. 소녀는 아름다워진다. 대강 이런 내용이다. 질투 취급 설명서로서 이보다 더 효과적인 예는 없을 정도다. 겉모습이 아름답거나 겉과 속이 모두 쓸모없거나.

마음속으로 이 세상을 예쁜이와 못난이로 이분화하는 파괴적 결과를 피하려면, 러셀의 조언대로 남을 흠 잡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수밖에 없다. "뭐든 유쾌한 일이 생기면 전력을 다해 그 기쁨을 만끽해야 한다." 러셀의 전언이다. "이게 다른 것만큼 그렇게 즐겁지 않은 것 같은데, 따위의 생각은 접어두라."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가 닥치면 우리는 그들의 감정에 공감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성공을 거둘 때 '그들의 기쁨을 공감하는 것' 역시 아주 중요하다. 그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라. 질투는 우리의 발목을 잡지만 긍정적 공감은 우리를 분발시킨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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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치르는 비용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자녀들이나 배우자를 기쁘게 하려는 노력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아이들을 통해 알게 되는 건 아누 많다.
가령 나의 인내심은 얼마만큼인가 하는 이런 것.
-프랭클린 P. 존스(Franklin P. Jones)

 

"삶을 향한 일반적 자신감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무엇보다도 한 사람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올바른 사랑을 받는데 익숙해질 때 우리는 인생을 향해 자신감을 보일 수 있다." 러셀이 말하는 핵심은, 이런 사랑이 아이였을 때 부모와 아이 사이의 특별한 유대감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무슨 이유에서든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는 소심하고 모험심이 없으며 두려움과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 같다. 이런 아이는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즐거운 탐험을 떠난다는 기분으로 나설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탐험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뒤죽박죽 북새통'을 이루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줄 것이므로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인정받고 편안해지는 데만 허겁지겁 몰두하는 사람에게는 역경이 마치 감당 못할 재난처럼 다가온다. 실패와 좌절을 다 감수하기로 한 사람에게도 실패와 좌절이 비참하긴 마찬가지다.

 

얼마만큼의 사랑이 지나친 것일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때 그들에게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아이들이 잘 자라는 데 도움을 주려고 애쓸 뿐이다. 물론 자녀들을 양육할 때 "안 돼" 같은 말을 쓰게 된다. 아이들이 합리적인 거절과 비참한 감정적 거절을 연계시키기 시작한다면, 부모가 더 이상 함께 있지 않을 때 아이들은 거부당하는 기분을 막아내려고 가능한 한 무슨 것이든 하려고 든다. 그 어떤 갈등 상황도 다 피해버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설령 부모를 조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세상 전체를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거절당하는 상황을 피할 수도 없지만 자꾸 피하기만 하다 보면 어느덧 거절 자체가 파괴력을 더해갈 게 뻔하다.

 

자, 과잉보호 어머니들을 향한 러셀주의자의 엄명을 들어보자.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를 재난에 대해 아이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경고하는 어머니가 있다. 개란 개는 모조리 사람을 무는 동물이라 생각하고 세상의 모든 소는 죄다 성난 황소일 거라 여기는 겁많고 심약한 이 어머니는 자녀들에게도 자기 것과 똑같은 소심함을 고스란히 물려줄 것이다."

 

자녀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인 남자 얘기를 해보자. "일찍이 지혜롭지 못한 어머니로부터 자신이 물려받았던 것을 자기 아내에게서 기어코 찾아내려 애쓴다. 그러면서도 아내가 자녀들을 다 자란 사람으로 여기는 걸 보면 화들짝 놀란다."

 

우리는 종종 '스텝포드 와이프(Stepford Wif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아이라 레빈(Ira Levin)의 소설에서 아내들이 모두 로봇으로 대체되는 내용으로부터 비롯된 표현이다. 이 용어는 남편의 행복을 위해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아내를 빗대는 데 사용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원작 소설의 주요 타깃은 다름 아닌 스텝포드 '맨'이다.

 

사실 이 소설이 표적으로 삼는 대상은, 남자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할 여성과는 절대 결혼하지 못하는 남자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스텝포드 커플을 비웃을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아내 쪽만 비난해선 안 된다. 그 커플의 남편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필요가 있다. 혹시 지금의 아내 대신 당돌하게 당신에게 반대를 표하는 누군가와 결혼한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으신지요?

 

아이가 '내 친구 엄마는 걔한테 해도 된다고 했단 말이야' 라는 카드를 꺼내 들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가? 아이가 친구 엄마를 비장의 카드처럼 써먹지 못하게 하라. 지금 당장 사회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라. '내 친구 엄마' 카드야 잠깐 반짝하고 말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여전히 내 아이의 행복을 책임질 사람은 아이 친구 엄마가 아니라 바로 자산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러셀의 행복 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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