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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067호 '분청사기 상감 연꽃넝쿨 무늬 병(粉靑沙器象嵌蓮唐草文甁)'은 높이 31.8cm, 입지름 7.7cm, 바닥지름 9.8cm 크기의 조선시대 분청사기 병이다.

전체적으로 유약이 잘 녹아 맑게 윤이 나며, 다리굽의 접지면은 유약을 닦아내고 내화토를 얇게 발라 구웠다.

나팔처럼 벌어진 입구 부분에서 풍만하게 처리된 몸통 부분에 이르는 유연한 곡선과 높고 튼튼한 굽의 조화가 형태미와 안정감을 돋보이게 한다.

몸통 부분에는 연꽃을 중앙 세 곳에 흑상감(도자기 표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서 그 속에 흑토나 자토를 메워 넣는 공예 기법)으로 새겨 넣고, 연꽃 줄기가 원을 그림며 감싸듯 이어져 있어 형태와 무늬 구성이 조화롭고도 짜임새 있게 표현되었다.


보물 1067호 '분청사기 상감 연꽃넝쿨 무늬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67호 '분청사기 상감 연꽃넝쿨 무늬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67호 '분청사기 상감 연꽃넝쿨 무늬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67호 '분청사기 상감 연꽃넝쿨 무늬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67호 '분청사기 상감 연꽃넝쿨 무늬 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067호 '분청사기 상감 연꽃넝쿨 무늬 병/ⓒ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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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은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275cm 크기의 통일신라시대 유물이다.

제작 연대가 확실한 유물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연대에 있어 기준이 되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 나발(螺髮, 불상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의 머리카락. 나계(螺髻)라고도 함)이 있고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상투처럼 우뚝 솟아오른 혹과 같은 것. 불정(佛頂)·무견정상(無見頂相)·정계라고도 함)가 크고 편평하다. 다소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미간백호상(白毫,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이라고도 함) 구멍이 있다. 법의(法衣, 세 가지 법의인 삼의(三衣), 곧 가사(袈裟)를 일컬음. 승복(僧服)•승의(僧衣)•법복(法服)이라고도 함)가 얇게 표현되어 있어 전체적인 몸의 곡선이 잘 드러나는 형태이다. 마치 물결치듯 U자 모양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이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두 다리까지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광배는 거신광, 두광, 신광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은 8세기 신라 불상의 정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1915년 경주 감산사터에서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옮긴 것이다. 광배와 대좌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 졌으며, 광배에는 719년 김지성(金志誠, 652~?, 통일신라의 문신. 67세에 집사부 시랑에서 물러나고, 은퇴한 뒤 감산사를 창건하고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또한 미륵보살의 유가론을 연구하였으며, 노장사상에도 심취하였다고 한다.)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감산사를 지었으며, 미륵보살과 아미타여래를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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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329호 '백자 청화 소상팔경 무늬 팔각 연적(白磁 靑畫 瀟湘八景文 八角 硯滴, 19세기 조선후기, 높이 12.6cm)'은 회화적인 기량이 돋보이는 초대형 팔각 연적(硯滴, 먹을 갈 때 벼루에 따를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연적의 윗면에는 구름 속에서 꿈틀대는 용의 모습을 음각과 양각기법을 활용해 매우 생동감있게 표현하였으며, 옆면에는 '소상팔경(瀟湘八景)'의 아름다운 전경 무늬가 표현돼 있다. 또한 팔각 면 중 물이 나오는 출수구가 있는 정면에는 당나라 시인 가도(賈道, 777~841)의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의 구절 일부를 인용한 "동정추월(洞庭秋月)"이라는 소상팔경도의 제목과 "송하문동자 장한강동거(松下問童子 張翰江東去)"가 들어가 있다. 소상팔경(瀟湘八景) 무늬란 중국 후난성(湖南省), 퉁팅호(洞庭湖) 남쪽에 위치한 샤오수이(瀟水)강과 샹장(湘江)강 주변의 여덟 가지 절경을 그린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를 말하는 것으로, 조선 후기에 청화백자의 무늬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보물 1329호 '백자 청화 소상팔경 무늬 팔각 연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9호 '백자 청화 소상팔경 무늬 팔각 연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9호 '백자 청화 소상팔경 무늬 팔각 연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9호 '백자 청화 소상팔경 무늬 팔각 연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9호 '백자 청화 소상팔경 무늬 팔각 연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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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57호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은 상층 기단 면석에 글자 크기 4cm의 탑 이름이 해서체(楷書體, 자형이 가장 똑바른 한자 서체의 한 가지)로 새겨져 있는데,끝에 태평 11년(太平十一年)의 연호 및 연대가 나타나 있다. 여기서 태평은 중국 요(遼)나라의 연호로, 1031년(고려 현종 22)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이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탑을 해체 복원하면서 탑의 내부에서 '太平十一年歲次辛未正月四日高麗國尙州界知京山府事任若木郡內巽方在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태평11년세차신미정월4일고려국상주계지경산부사임약목군내손방재정도사5층석탑조성형지기)'라 쓰여진 백지묵서(白紙墨書)의 형지기와 아울러 녹유사리병(綠釉舍利甁)·동합(銅盒) 등의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는데, 이 '조성형지기(造成形止記)'에 따르면 당시 승려 지한의 주도 아래 이 지역 향리와 백성들이 국가의 평안, 전쟁의 종식, 풍년을 발원하며 세운 탑이라고 한다.

글 문투에는 이두식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 탑 자체에 관해서는 물론이지만 이두 연구에도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탑은 원래 2층 기단에 5층의 탑신이 올라간 형태인데, 현재 5층 지붕돌은 없어졌고, 상륜부(相輪, 불탑 꼭대기에 있는,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 부분)의 장식 받침인 노반(露盤, 탑의 꼭대기에 있는 상륜의 한 부분)은 남아있다.

1층 기단에는 코끼리 눈을 본 떠 만든 무늬가 새겨져 있고, 2층 기단부터 탑신까지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1층 몸돌에는 문짝과 자물쇠 모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깨끗하면서도 아름다운 느낌을 주며, 지붕돌은 4단 받침대 추녀 밑으로 낙수홈(물을 아래로 내려보내기 위한 홈)이 있다.

보물 357호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57호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57호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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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588호 '강민첨 초상'은 경상우병사 이연필(李延弼, 생년미상~1803)이 진주에 있던 원본을 1788년 화원 박춘빈에게 옮겨 그리게 하여 강원도 회양 관아로 보낸 것이다.

이 그림이 그려져 전달된 곳인 당시 회양 관아는 강민첨의 후손인 강세황이 회양부사로 부임한 아들 강인과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이 초상화의 모사에 강세황이 관여해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상의 주인공인 강민첨(姜民瞻, 963(광종 14)∼1021(현종 12))은 고려시대 전기 문신이자 장군이며, 진주강씨 은열공파(殷烈公派)의 시조로 강세황(姜世晃, 1713(숙종 39)∼1791(정조 15).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이자 평론가)의 17대조이다.


[강세황 초상 보기]


강민첨은 1016년에 내사사인([內史舍人, 고려시대 내의성(內議省)의 종4품 관직)이 되었고,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공하였을 때 대장군으로 평장사 강감찬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홍화진에서 적을 대파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은열(殷烈)'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공신각에 초상이 걸렸다고 전한다.

이 초상에서 강민첨은 머리에 관모인 전각복두(展脚幞頭)를 쓰고, 중국 송(宋)나라의 제도를 본받은 고려시대 관복을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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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28호 '금동약사불입상(金銅藥師佛立像)'은 8세기 후반 통일신라 시대 작품으로 높이 37cm 크기이다.

약사불은 보통 한쪽 손에 둥근 약단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약사불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여러방향에 머무르는 부처를 표현한 사방불에서 동방에 머무르는 부처로 표현된다.

둥근 약단지를 들고 있는 약사불은 갖은 질병을 고쳐주고 재난에서 벗어나도록 하며 음식과 옷을 제공하는 등 여러 고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현실세계와 가장 가까운 부처라고 할 수 있다. 부처가 되기 전 보살이었을 때는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것을 포함한 12가지 큰 소원을 지녔고, 부처가 되고 난 후에는 동방에 위치한 유리광세계를 다스리게 되었다고 한다.

보물 328호 '금동약사불입상(金銅藥師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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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234-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금동불입상'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출토된 9세기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높이 17.4cm 크기이다.

대좌와 함께 주조한 금동불에 얇게 투각한 당초무늬 그리고 불꽃무늬의 거신광배(擧身光背, 불상의 윤곽에 따라 광배를 표현한 것, 전신광배라고도 한다.)를 결합한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광배까지 한 묶음으로 온전하게 전하는 통일신라 말의 불상은 흔치 않은데, 출토지가 후백제 영역이었던 익산 왕궁리인 점에서 제작시기를 비롯한 발원자의 문제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는 불상이다.

전체 형태를 보면 육계(肉髻, 부처의 머리 위에 볼록 올라온 머리 모양, 원래는 인도의 성인(聖人)들이 긴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 묶었던 형태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혜를 상징한다.)가 아주 크고 얼굴이 둥굴넙적한 형태이며, 이목구비가 분명하면서 귀기 길어 어깨 부분까지 내려와 있는 형태에 콧수염이 새겨져 있는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둥굴넙적한 얼굴은 토착화되어 표현되었으며, 신체의 비례는 상체가 지나치게 짧고 하체가 길게 표현되어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한 장의 대의를 통견식으로 입었고 옷주름의 형식은 Y자형을 따랐다. 심단형식의 대좌 또한 연꽃의 입체감은 없고 선각으로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뒷면의 주조 구멍은 머리에는 없지만 몸 전면에서 다리까지 큼직하게 뚫려있는데, 내부의 주물이 매우 거칠다. 목 아래에는 광배를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도록 촉이 달려 있다.

국보 123-4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금동불입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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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27호 '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 觀音菩薩 立像)'은 7세기 삼국시대 것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양동 산 108에서 출토되었다.

이 금동관음보살입상을 통해 7세기 전반 우리나라에 관음 신앙이 존재했음을 증거하는 중요한 자료로써의 가치가 큰 유물이다.

불교에서 관음 보살은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 삶의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을 모든 고통에서 구제하고 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믿는다.

이 상의 전체적인 형태에서 보살이 쓰고 있는 관 중앙에 화불(化佛)이 있고, 정병(淨甁, 자비를 상징하는 상징적인 공양구)을 들고 있는데,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관음보살상으로 여긴다.

국보 127호 금동관음보살입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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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56호 '무령왕 금귀걸이'는 충남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길이 8.3cm 크기의 금제 귀걸이다.

무령왕 귀걸이는 하나의 중심되는 고리를 기준으로 작은 고리 2개를 연결고리로 하여 두 줄의 귀걸이를 매달아 만들었는데, 큰 귀걸이의 중간 장식은 2개의 원통체를 대칭되게 연결하였고, 원통체의 끝에는 금실과 금 알갱이로 장식한 심엽형(心葉型 하트모양 또는 그와 비슷한 형태의 나뭇잎모양) 장식이 달려있다.

귀걸이의 끝 장식은 큰 심엽형 장식을 중심으로 작은 심엽형 장식 2개를 대칭되게 매달았다. 작은 귀걸이의 중간 장식은 금 알갱이를 붙여 만든 투작구체(透作球體) 5개를 '0-0 모양의 고리로 연결하였다.

끝 장식은 담녹색 곡옥에 누금수법 장식이 가미된 금 모자를 씌운 것으로 금모자에 좌우대칭으로 2개의 심엽형 장식이 달려 있다.

무령왕 귀걸이와 비슷한 류의 귀걸이가 경주의 금령총과 일본 구마모토 현의 에다후나야마 고분(일본 구마모토현 다마나 시에 있는 고분으로 1873년 1월 4일 발굴된 원형의 분구(墳丘)에 방형 혹은 삼각형의 단상부(壇狀部)가 합쳐진 모양의 큰 무덤인 전방 후원분이다)에서 출토된 바 있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과 그 왕비의 무덤으로 1971년에 처음 발굴되었으며, 벽돌로 만든 무덤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국보 156호 '무령왕 금귀걸이'/ⓒ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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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630호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은 경북 경주시 황남동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5세기 신라시대 유물로 너비 59cm 크기의 관꾸미개이다.

전체 형태가 마치 새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관꾸미개는 가운데를 세로로 접어 고깔형태의 관에 끼우는 형식으로 사용되었는데, 관모의 앞 부분에 끼워 넣을 수 있도록 앞쪽 아랫부분은 뾰족하고 매끈하게 되어 있다.

관꾸미개의 위쪽에는 세 개의 돌기가 표현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양판과 양 날개가 각각 따로 제작되어 결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라시대 관꾸미개는 새의 날개 모양이 주를 이루지만 나비처럼 생긴 것도 있으며, 새 날개 모양은 옆으로 날개를 활짝 펼친 형태가 오래된 것이며, 차츰 새 날개 모양의 끝이 안으로 오므라들어 위로 솟구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따라서 보물 630호 황남대총 금제 관식은 비교적 오래된 형식의 관꾸미개임을 알 수 있다.  

[새날개 모양 관장식] [나비 모양 관장식]

보물 630호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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