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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혈연과 혼인관계로 묶인 한 가족이 사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예전에는 대가족제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현대사회에 접어들어 전통사회가 무너져가고 핵가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전의 대가족이 지금 핵가족으로 바뀌었다는 관념은 단순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도 대가족은 매우 희귀했다. 그리고 서구의 핵가족은 부부 중심의 가족을 가리키는데, 지금도 핵가족이라고 해도 부부 중심의 핵가족은 사실상 그다지 흔치 않다.



가족 구성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우선 부부가족(conjugal family)은 부부와 그 자녀로 구성된 가족으로, 자녀는 없을 수도 있다. 원시사회와 현대사회에 많은 이 부부가족은 가장 기본적인 요소만 갖추고 있어 핵가족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직계가족(stem family)은 결혼한 자녀 가운데 한 사람이 부모와 함께 가족을 꾸려 사는 형태이다. 이 가족에서 가족을 결합시키는 중요한 힘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유대이다. 그리고 확대가족(extended family)은 결혼한 자녀들이 모두 부모와 함께 가족을 구성하여 사는 형태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호적을 살펴보면 부부가족이 압도적으로 많고, 직계가족이 소수를 차지하며, 확대가족은 생각보다 아주 드물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현대 서구사회는 그렇지 않다. 직계가족이나 확대 가족이 거의 없고, 부부가족도 우리의 부부가족과는 다르다. 우리는 자녀들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부모와 함께 살지만, 서구에서는 결혼하기 전이라도 성년이 되면 따로 독립해 나간다. 그리고 서구의 부부가족에서 가족의 가장 강력한 유대는 부부 사이의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의 부부가족에서는 직계가족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부모와 자녀의 유대가, 부부가족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부부 사이의 유대 못지않게 강하다.


그런 탓에 부부가족은 언제든지 직계가족으로 바뀔 수 있다. 자녀 가운데 하나가 결혼하면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자식들은 독립하여 부부가족을 이룬다. 또 그 직계가족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다시 부부가족으로 돌아온다. 결국 부부가족과 직계가족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서로 넘나드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우리나라는 17세기까지만 해도 상속형태가 자녀균분상속이었다. 그런 경우에도 집은 맏아들에게 상속되었다. 맏아들이 부모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 구성은 가옥형태에도 남아 있다. 예전의 집들은 규모로 보나 공간 구성으로 보나 대개 한 부부가족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구조와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초가삼간이란 부부가족을 상정한 집이다. 실제로 한 집에 사는 사람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호적에 기록되어 있는 1회의 가족 숫자는 호적에 오르지 않은 인구를 감안하더라도 다섯 명을 크게 넘지 않는다. 대가족이라는 개념을 가족 구성적 측면에서 확대가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식구가 많은 가족으로 상정한다면, 부무가 미성년의 많은 자녀를 거느리고 있는 집도 대가족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런 경우도 많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데 부부가족은 때로는 직계가족으로 전환되고 직계가족이 다시 부부가족으로 전환되듯이, 직계가족의 흔적도 가옥구조에 그대로 남아 있다. 동춘당 송준딜(宋浚吉), 명재 윤증(尹拯), 완당 김정희(金正喜)가 살았던 유명한 옛집들은 모두 직계가족이 살 수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안채에는 시어머니가 거처하는 안방과 며느리가 거처하는 건넛방 또는 머릿방이 있고,, 사랑채에는 아버지가 거처하는 큰사랑방과 결혼한 아들이 거처하는 작은 사랑방이 있다. 그러나 이런 집도 사실은 그다지 많지 않아서 방 두세 칸으로 이루어진 집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부부가족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확대가족은 효를 중시하는 유교적인 이념에 부합되는 가족형태이다. 본래 부모가 살아 계신데 집을 따로 가지고 재산을 따로하는 분호별산(分戶別産)은 유교적인 효의 관념에 위배되는 것으로 여겨 고려시대에는 이를 금지하는 법까지 제정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가 없었고 관습도 그렇지 않았다.


결혼한 자녀가 모두 부모와 함께 사는 확대가족은 조선 말기에 극히 일부 부유한 양반집에서 나타났을 뿐이다. 또 그렇다 하더라도 부모가 사망하면 형제가 서로 살림을 나누는 것이 원칙이었다. 형제 사이에 불화가 일어날 경우 중재자 역할을 할 부모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가족 간의 큰 싸움으로 번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 '박타령'에서 놀부 부부가 흥부 부부를 내보낸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일이었다. 전통적 유교관념에서 강조했던 부모와 자녀, 그리고 형제 사이에 함께 살며 재산을 함께 소유한다는 동거공재(同居共財)는 단지 이상적인 이념일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집에 공간이 없으면 함께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 퇴계 이황(李滉)도 자신의 아들이 처가살이를 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일이 아닌 줄은 알지만 집이 좁아 함께 살 수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



한편 17세기까지만 해도 결혼하면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 사는 입장(入丈) 풍습이 있었다. 이런 풍습은 이미 늦어도 고구려 때부터 있었던 풍습으로서 꽤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것이 많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실제로 조선시대 중기까지도 김숙자(金叔滋), 이언적(李彦迪), 김성일(金誠一) 등 여러 이름 있는 양반집안에도 처가살이 풍습이 존재했음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자녀들은 친가 못지않게 외가를 매우 중시했고, 친밀도는 오히려 외가가 더했으며, 사위와 딸이 처가의 제사를 지내는 일도 사대부들의 일기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장인이 여러 사위와 함께 살 수는 없었으며, 처가살이하는 남자들도 몇 해가 지나면 대개는 분가하여 따로 살림을 차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나라의 가장 보편적인 가족형태는, 직계가족의 속성을 지녔고 직계가족으로 전환할 수 있는 부부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집도 그러한 구조에 맞게 지어졌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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