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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

금관(金官, 지금의 김해시)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 본래 김해시 호계사에 있었는데, 1873년에 허 왕후릉 곁으로 옮겼으며 지금은 전각을 둘러쳐 놓았다.)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세조(世祖) 수로왕의 왕비 허 왕후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년(48년)에 서역 아유타국(阿踰陀國, 현재 인도 아요디아 지역에 있었던 나라)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고 바다에 배를 띄워 동쪽으로 향하려 하다가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 건너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에게 아뢰자, 부왕이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래서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정박했다. 이 배에는 붉은 돛대와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을 실었기에 주포(主浦)라 이름했다. 처음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언덕을 능현(綾峴), 붉은 깃발이 처음으로 들어오던 해안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했다.

수로왕은 아내를 맞이하여 함께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 당시 해동에는 아직 절을 지어 불법을 받드는 사례가 없었다. 아마도 상교(像敎, 불교의 다른 명칭)가 아직 전해지지 않았고 이 땅 사람들이 받들지 않았기 때문으로 '가락국본기'에는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년(452년)에 이르러, 그 땅에다 절을 짓고 또 왕후사(王后寺)를 지어(이 일은 아도와 눌지왕 시대에 있었는데, 법흥왕 이전 시대다.) 지금까지 여기서 복을 빌고 남쪽 왜를 진압했다. 이것은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사각형ㅇ데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묘하다. 돌은 약간 붉은 반점 무늬를 띠고 있는데 질이 매우 연하여 이 땅에서 나는 것은 아니다. '신농본초(神農本草, 후한 때 365종의 약이름을 분류하여 지은 책)'에서 닭 벼슬의 피를 떨어뜨려 시험했다는 돌이 바로 이 돌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이라고도 하는데, 자세한 것은 '가락국본기'에 실려 있다.

-삼국유사 권 제4 塔像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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