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파사석탑

금관(金官, 지금의 김해시)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 본래 김해시 호계사에 있었는데, 1873년에 허 왕후릉 곁으로 옮겼으며 지금은 전각을 둘러쳐 놓았다.)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세조(世祖) 수로왕의 왕비 허 왕후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년(48년)에 서역 아유타국(阿踰陀國, 현재 인도 아요디아 지역에 있었던 나라)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고 바다에 배를 띄워 동쪽으로 향하려 하다가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 건너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에게 아뢰자, 부왕이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래서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정박했다. 이 배에는 붉은 돛대와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을 실었기에 주포(主浦)라 이름했다. 처음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언덕을 능현(綾峴), 붉은 깃발이 처음으로 들어오던 해안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했다.

수로왕은 아내를 맞이하여 함께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 당시 해동에는 아직 절을 지어 불법을 받드는 사례가 없었다. 아마도 상교(像敎, 불교의 다른 명칭)가 아직 전해지지 않았고 이 땅 사람들이 받들지 않았기 때문으로 '가락국본기'에는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년(452년)에 이르러, 그 땅에다 절을 짓고 또 왕후사(王后寺)를 지어(이 일은 아도와 눌지왕 시대에 있었는데, 법흥왕 이전 시대다.) 지금까지 여기서 복을 빌고 남쪽 왜를 진압했다. 이것은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사각형ㅇ데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묘하다. 돌은 약간 붉은 반점 무늬를 띠고 있는데 질이 매우 연하여 이 땅에서 나는 것은 아니다. '신농본초(神農本草, 후한 때 365종의 약이름을 분류하여 지은 책)'에서 닭 벼슬의 피를 떨어뜨려 시험했다는 돌이 바로 이 돌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이라고도 하는데, 자세한 것은 '가락국본기'에 실려 있다.

-삼국유사 권 제4 塔像 제4-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국보 275호 '기마 인물형 각배'/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75호 '기마 인물형 각배'는 5세기 삼국시대 가야 유물로 높이 23.2cm, 길이 13.1cm, 바닥지름 9.2cm 크기이며,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에서 출토되었다.

국은 이양선 선생의 기증품으로 전체 형태는 말을 타고 있는 무사와 말의 등 부분에 두 개의 뿔잔이 좌우대층으로 솟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말의 몸통에는 판갑이 둘러져 있으며, 말 등에 앉아 있는 무사는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고,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는 창을 들고 있는데, 비교적 세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삼국시대 당시 무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가야 판갑옷과 투구/국립중앙박물관]


가야(5세기) 갑옷과 투구는 경상북도 고령 지산리 32호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로 투구, 어깨라리개, 판갑옷으로 각각 구성돼 있다. 투구는 사각형과 삼각형의 철판을 못으로 연결했으며, 어깨가리개는 좌우 2매로 가장자리에는 가죽 끈을 연결하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갑옷은 네모모양의 긴 철판을 인체공학적으로 구부려 연결했다.





[김해 양동리 76호분 출토 가야 판갑옷과 투구/동의대학교박물관]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