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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족

가훈은 집안을 어떻게 경영해야 다음 세대에도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의 결정체였고, '가정교육의 테스트'였다. 가훈서는 각 집안의 환경과 배경, 사회적 지위와 고유한 경험의 토대 위에서 실제적인 삶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 작성형태 등에서도 차이가 나게 마련이며, 특히 가훈을 편찬한 인물의 평생 경험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가훈이 없는 집안이 거의 없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었고, 이름 있는 가문들은 가문의 전통이 마련된 기반으로 선조의 유훈과 가훈을 특화하기도 한다.

 

가훈의 일반화는 성리학적 지배체재의 확산과 연관되어 있었다. 조선 초의 가훈자료가 대체로 성리학적 수신과 도덕적 함양에 보다 중점을 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며, 이러한 한국의 가훈은 중국 남북조시대의 안지추(顔之推 531~602)가 지은 '안씨가훈(顔氏家訓)'이나 '주자가훈(朱子家訓)' 등을 전범(典範)으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훈의 성격은 조선 중기 이후 장자 중심, 가부장적 친족조직이 발전하고 가문의 전통이 매우 중시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7세기는 성리학적 지배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사대봉사(고조, 증조, 조부, 아버지의 신주를 집안의 사당에 모시는 일)가 끝날 무렵 묘위전(墓位田, 무덤 앞 제사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경작하는 밭)의 운영과 관련된 족계(族契)나 족규(族規)를 마련하고 족보와 가훈서를 간행하였다. 또 각 사족가문은 현실적으로 향촌사회 내에서의 입지를 다지고 도덕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제가(齊家)를 위한 가정교육이 필요하였다.

 

효정공 가훈/조선 세종대왕이 친히 쓴 효정공의 가훈/ⓒ한국학중앙연구원

 

가훈의 주요 내용은 수신과 공부, 덕성의 함양이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이었다. 또 동시에 각 가문별로 특수한 성격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즉 개별 가문의 상징전통으로 특화되어, 가훈의 내용은 그 가문의 실용성, 구체성을 바탕으로 한 생활문화가 되었다. 가훈서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은 서간, 문답(問答), 유훈(遺訓) 등의 형식으로 아직 미정착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17세기 이후가 되면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체계를 갖추어 편찬된 가훈들이 나타난다. 그 특징을 요약하면, 첫째는 수신과 제가, 처세의 3부문이 고르게 수록되는 가훈의 기본 체제가 완성되었다는 점, 둘재는 내용이 세분되면서 실천방안들이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18세기에 이르면 거의 모든 가문의 가훈서를 가지며, 그 대상 또한 확대되어 여성, 어린이, 노비, 서자, 측실 등 구체적으로 분화되고, 형태도 다양해졌으며, 교과서적인 목적도 부가되는 경향을 보여 주면서 전문화되어 갔다. 그중 여훈이나 계녀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7세기 이후이다. 당시 부덕이 높은 여성이 가문 영달의 밑거름이자 가문을 빛낼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여성의 부덕은 그 가문의 명성과 가풍을 전하는 것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함께 보기: 가훈의 종류와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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