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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일부일처제가 시행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부일처제는 대부분의 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가장 적절한 혼인제도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일부다처의 사례도 종종 발견되는데, 여기서 주의할 서은 일부다처란 처 외에 첩을 거느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첩의 유무, 다과는 관계없이 처가 여럿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왕비가 6명에 부인이 23명이었는데, 부인 23명은 차치하고 왕비가 여섯이었다는 것은 일부다처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왕실의 특수한 경우라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1123년(인종 1)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의 부자들은 처를 서너 명씩 두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기록에도 최충헌(崔忠獻), 이제현(李齊賢)처럼 2명의 처를 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첫 번째 처가 죽고 난 후 후처를 취했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둘 이상의 처를 거느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울과 지방 두 군데에 처를 두었다는 기록도 있고, 한꺼번에 세 처를 두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물론 이런 사례는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전통 혼례식의 초례 장면/ⓒ한국관광공사


그려시대 일부다처의 경우, 상당히 오랫동안 먼저 혼인한 처와 나중에 혼인한 처 사이에 차별 없이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고려 말에 이르면 '정처(正妻)' 외에 다음 처라는 뜻의 '차처(次妻)'도 보이고, 나머지 여러 처라는 뜻의 '서처(庶妻)'라는 용어도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처 사이에도 차츰 차별이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얼마 후 15세기 태종 때에 이르러서는, 극히 일부의 예외는 있었지만 일부일처제를 법적으로 확고히 하였다. 그래서 가장 먼저 결혼한 정처 하나만을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첩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가에서 첩을 두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지금은 중혼(重婚)을 법으로 금지하기 때문에 축첩은 법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럴 경우 누가 첩인가는 자명하다. 나중에 혼인관계를 맺은 여자가 첩이 된다.

그러나 예전에는 처와 첩의 구분이 혼인의 순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처첩의 구분은 신분에 의해 결정되었다. 신분과 지위가 높은 양반가의 딸은 처로 결혼하지만, 일반양인이나 천민이 양반가의 남자와 결혼할 경우에는 처의 지위에 오를 수 없고 어디까지나 첩으로 인정될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계집종이나 기녀로서 첩이 된 천첩(賤妾)의 경우에는 지위가 더 열악했다. 그 소생 자녀의 경우에도 본래는 천자수모법(賤子隨母法)에 따라 천인(賤人)이 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지위가 높은 양반관리의 자녀를 천인으로 삼기에는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장애가 있어 결국 양인(良人)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자녀들은 서얼금고(庶孼禁錮)의 법에 따라 문과(文科), 생원과(生員科),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문관직은 금지되고 무관직은 허용되었지만 실제로는 의관(醫官), 역관(譯官), 지관(地官) 등의 특수직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이 법이 서얼 자신의 금고에 그쳤으나, 16세기 명종 때에는 서얼의 자자손손(子子孫孫)에 미치는 것으로 해석되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신분제가 조금씩 이완됨에 따라 파기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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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열녀춘향 수절가'에는 이도령이 밤에 춘향의 집을 찾아간 대목에서 월매가 한숨 쉬며 춘향에게 하는 말에 "무남독녀 너 하나를 금옥같이 길러 내어 보오항 같은 짝을 지어 육례 갖추어 여의자고 하였더니" 하는 대목이 있다. 혼인의 대명사인 육례(六禮)는 중국의 '의례(儀禮)'에 등장하는 것으로, 혼인을 치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여섯 가지 절차를 말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실제 혼례절차는 남송(南宋)의 주자가 집안의 예법으로 만들었다는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라고 하였다.


기산풍속도첩 '초례상'/ⓒ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첫 번째 절차는 의혼(議婚)이다. 의혼은 양가에서 중간에 중매인을 통해 혼인을 의논하는 절차이다. 의혼은 혼인절차의 하나일 뿐 구체적인 형식도 없고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는 것도 아니었다. 중매인은 양가를 오가면서 주혼자(主婚者)와 혼담을 나누어 혼인을 성사시켰다. 요즈음 혼주(婚主)라고 부르는 주혼자는 당사자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큰아버지, 외할아버지 등 집안의 어른이 맡아 하는데, 반드시 남자가 하는 것은 아니어서 할머니가 맡기도 한다. 주혼자는 혼인에 문제가 생겨 법적 책임을 묻게 되면 그 책임을 지는 사람이기도 하다.

양가 사이에 중매인을 두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옛날에는 양반가에 연애결혼이란 없었다. '맹자'의 가르침에 "부모의 명을 기다려 중매인의 말을 듣지 않고 구멍을 뚫어 서로 엿보거나 담을 넘어 만나는 것은 부모와 온 세상 사람들이 천히 여긴다"고 하였다. 그래서 연애결혼은 예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겼다. 나이가 많은 홀아비나 과부의 재혼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는 중매인을 두지 않고 당사자끼리 약속하여 혼인하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드문 예였다. 대부분은 부모의 명에 따라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혼인하여 일생을 함께해야했다.


납채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 번째 과정이 납채(納采)이다. 의혼과정에서 혼인하기로 어느 정도 약정이 되면 먼저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납채문(納采文)과 사주단자(四柱單子)를 보내고 신부 집에서는 신랑 집에 택일단자(擇日單子)를 보내는데, 이 과정을 납채라고 한다. 납채문에는 대개 주혼자의 이름으로 보잘것없는 집안의 어리석은 자식을 배필로 맞아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납채예물을 보내니 혼례날짜를 잡아 연락해 달라고 신부 집에 보낸다. 신랑 집에서는 납채문과 함께 일명 사성단자(四星單子)라고도 하는 사주단자를 보내는데, 신랑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쓴 것이다.


사주단자를 받은 신부 집 주혼자는 신랑의 사주를 토대로 궁합(宮合)을 본다. 궁합뿐 아니라 복명(卜命)이라는 이름으로 백년해로할 수 있는지 점을 치고, "갑자을축 해중금(海中金)"하는 식으로 60갑자를 순서에 따라 금, 목, 수, 화, 토 오행에 맞추어 길흉을 따지는 오행상극(五行相剋)을 보아 서로 상충되는 바가 있는지 알아본다. 또 원진살(元嗔煞)이라고 하여 부부가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는 살이 있는지 디를 통해 알아본다. 예컨대 소는 말이 밭 갈지 않는 것을 미워하고 말은 소의 뿔을 싫어하니, 소띠와 말띠는 혼인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게다가 신부가 태어난 해와 혼인하는 해가 서로 어울리는지 합혼개폐(合婚開閉)라는 것도 본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다 점치는 것은 아니지만 혼인의 길흉을 알아보는 방법으로는 이렇게 많은 방법이 있었다.


연길단자/ⓒ문화컨텐츠닷컴


이렇게 까다로운 궁합은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결혼이 자녀의 일생을 좌우할 중요한 선택이고 불확실한 선택이기 때문에 무언가에 의지하려는 생각이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상대방이 집에서 청혼이 들어왔을 때 특별한 이유 없이, 또는 노골적으로 싫은 이유를 대어 청혼을 거절하면 서로 사이가 나빠질 것을 염려하여, 청혼을 거절할 수 있는 핑곗거리로 삼기 위해 이런 여러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만들어 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합혼개폐도 한(漢)나라 때에 흉노족이 청혼을 할 때에 그것을 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 것이라는 말이 전한다. 택일단자는 연길단자(涓吉單子)라고도 한다. 신부집에서는 혼인날짜를 잡아 신랑 집에 연길단자를 보내 혼인날짜를 통보한다.

납채과정은 지금의 혼인절차로 말하자면 약손힉과 같은 것으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구속력을 갖게 하는 절차이다.


세 번째 과정은 납폐(納幣)이다. 납폐는 대개 혼인하기 전날 이루어지는데, 혼서(婚書)라고도 부르는 납폐문(納幣文)과 빙재(聘財)라고 예물을 함에 넣어 신부집에 보내는 과정이다. 혼서에는 보잘것없는 집안에 따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며 예물을 보내니 살펴보아 달라는 인사를 하면서 청홍채단(靑紅采緞) 예물과 함께 함에 넣어 함진아비 편에 신부 집에 보낸다. 함은 대개 나무로 짜는데, 주로 버들고리나 대나무로 엮은 상자에 옷을 담아 두고 쓰던 시절에 나무로 짠 함은 신혼부부의 첫 번째 가구였다.


기산풍속도첩 '함진아비 행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납폐는 아직 예식을 치른 것은 아니지만 납폐가 끝나면 혼인이 정식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했고 법적으로도 그러했다. 그래서 납폐가 끝난 후 신랑이나 신부가 죽으면 아직 혼례식을 치르지 않았더라도 상대방은 상복을 입어야 했다.

납폐 후에 마지막 절차로 친영(親迎)이 있다. 친영은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집으로 데리고 오는 과정이다. 신랑이 신부 집으로 신부를 맞이하러 갈 때에는 대개 백마를 타고 갔다는 기록이 고려 말에 보이는데, 조선 후기 풍속화를 보면 그때까지도 신랑은 백마를 타고 가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친영 행렬에서 기럭아비(雁夫)는 빨간 보에 싼 목기러기(木雁)를 안고 행렬의 앞장을 선다. 요즈음 흔히 신부가 혼수품으로 가져와 신혼부부의 살림방에 두는 쌍기러기는 예전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목기러기는 신부가 아니라 신랑이 마련하는 것이며, 두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만 가져간다. 기러기는 신랑의 신부에 대한 신의의 표시로 가져간다고 전해진다. 신부 집에 도착하여 이 기러기를 상 위에 올려놓는 것을 전안(奠雁)이라고 하는데, 혼인날을 전안일이라고 부른 것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단원풍속도첩 '신행길'/ⓒ국립중앙박물관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집에 오면 신부는 신랑 집에서 첫날밤을 치르고 다음날 아침에 시부모를 뵙는 현구고례(見舅姑禮)를 올리는데, 이때 이른바 폐백(幣帛)을 올린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신랑은 신부 집에 가서 처부모와 처가 친척들을 뵙는 것으로 친영의 절차를 모두 마친다.

본래 혼례식에 관직이 있는 남자는 사모(紗帽, 조선시대 백관(百官)이 주로 상복(常服)에 착용하던 관모)와 품대(品帶, 벼슬아치의 품계 및 옷에 따라 갖추어 두르는 띠를 이르던 말)를 착용하는 것을 허락하고, 지위가 높은 여자는 원삼(圓衫, 부녀의 예복으로 갖추는 웃옷의 하나)을 입을 수 있었지만, 관직이 없는 사람은 일반적인 사대부의 옷차림에 갓을 쓰고 조아(條兒)라는, 색실을 꼬아 ㅏㄴ든 가는 띠를 띠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관습적으로 일반백성들도 사모와 품대를 띠고 혼인하게 되었던 듯하다. 혼인 당일만은 호사를 해 보고 싶은 마음에 너도나도 일반적인 격식을 어기고 화려한 혼례를 치르게 되자 나라에서도 어느 정도 묵인한 결과로 짐작된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 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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