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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왕릉/ⓒ한국콘텐츠진흥원

제13대 미추이질금(未鄒尼叱今, 재위 262~284, 혹은 미조未組 또는 미고未古라 한다.-여기서 미조, 미고는 근저根抵, 원본元本이라는 뜻인 '및', '및'의 사음寫音이라는 설이 있다.)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 대대로 벼슬이 높았고 여전히 성현의 덕이 있어 이해(理解, '삼국사기'에는 점해沾解라고 되어 있다.)로부터 자리를 이어받아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지금 세상에서는 미추왕의 능을 시조당始祖堂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대개 김씨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며, 후대에 김씨의 여러 왕들이 모두 미추를 시조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위에 오른지 23년 만에 죽었는데, 왕릉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儒理王) 대에 이서국(伊西國, 지금의 경북 청도 지역에 있던 나라)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우리 [신라]는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막았으나 오랫동안 대항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귀에 댓잎을 꽂은 군대[竹葉軍]가 도우러 와서 우리 군대와 힘을 합쳐 적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적이 물러간 후에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선왕이 음덕으로 도와 공을 세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능을 죽현릉(竹現陵, 여기서 '현現'이 '엽葉'과 음이 통하므로 '죽엽릉'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이라 불렀다.

 

그 후 37대 혜공왕(惠恭王) 대인 대력(大曆) 14년 기미년(779년) 4월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무덤 속에서 어떤 사람이 준마를 타고 나타났는데, 장군과 같은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또 갑옷 차림에 무기를 든 마흔 명가량의 군사가 뒤를 따라와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능 안에서 진동하고 소리내어 우는 듯한 소리가 나고, 어떤 때는 호소하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 말은 이런 내용이었다.

 

"신은 평생을 시대의 환란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태어 통일을 이룩한 공이 있고, 이제는 혼백이 되어서까지 나라를 지키고 재앙을 물리쳐 환란을 구하려는 마음을 잠시도 고쳐먹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혜공왕 6년)에는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으니, 그것은 군주나 신하가 저의 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이제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 다시는 [나라를 위해] 힘쓰지 않으려 하니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미추왕이 대답했다.

"나와 공이 이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공은 다시 예전처럼 힘써 노력해 주시오."

 

[김유신의] 세 차례 부탁에 세 차례 다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회오리 바람은 곧 돌아갔다.

 

혜공왕은 그 말을 듣고는 두려워 즉시 대신 김경신(金敬信)을 보내 김유신의 공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서른 결(結)을 취선사(鷲仙寺, 취선사는 경북 경주에 있던 절로 '삼국사기' '김유신열전하'에 이 내용이 있다.)에 하사하여 명복을 빌게 했다. 그 절은 김공이 평양을 토벌한 후에 복을 심기 위해 세운 절이다. 미추왕의 혼이 아니었다면 김유신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이니, 나라를 지키는 마음이 크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미추왕의 혼은 호국령에 속한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기려 삼삼(三山, 신라의 제전 중에서 대사大祀에 속하며 내림奈林, 골화骨化, 혈례穴禮의 세 곳이다.-이동환 설)과 함께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제사 차례를 오릉(五陵, 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초기의 왕릉으로 제2대 남해차차웅 외에 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일영, 3대 유리이사금,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 보다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함께보기: 이서국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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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문화컨텐츠닷컴

 

만파식적(萬波息笛)

[삼국사기] '잡지(雜誌)'편에 나오는데, 김부식은 "괴이쩍어 믿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그 존재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만파식적'을 풀이하면 '거센 물결을 잠재우는 피리'라는 의미다.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 재위 681~692)의 이름은 정명(政明)이고, 성은 김씨며, 개요(開耀, 당나라 고종의 12번째 연호로 681년에서 682년까지 사용했다.) 원년 신사년(681년) 7월 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 가에 감은사(感恩寺,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으나 12미터에 달하는 두 탑은 건하다.)를 지었다.

[사중기寺中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처음 지었으나 완정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개요 2년(682년)에 완성했다. 금당(金堂) 섬돌(집채와 뜰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든 돌층계) 아래를 파고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었는데, 바로 용이 절 안으로 들어와 서리도록 마련한 것이라 한다. 대개 유조에 따라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大王岩,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바닥가에서 보이는 돌무더기다.)이라 하고,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했다. 후에 용이 나타난 모습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했다.

이듬해 임오년 5월 초하루(어떤 본에는 천수天授 원년이라 했으나 잘못된 것이다.)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湌, 신라 시대 17관등 중 제4위로 해간海干, 파미간波彌干이라고도 한다.)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가운데 있던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와 파도를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일관(日官, 삼국시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하던 관원) 김춘질(金春質 혹은 春日이라고 했다.)에게 점을 치도록 명령했다.

일관이 왕께 아뢰었다.

"돌아가신 임금(문무대왕文武大王)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며, 또 김유신 공이 33천(天)의 한 아들이 되어 지금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께서 덕을 같이하여 성을 지킬 보배를 내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폐하꼐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를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며 그달 7일에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신을 보내 살펴보게 했다. 산의 형세는 거북이 머리처럼 생겼고, 그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혹은 산 역시 대나무처럼 밤자으로 합쳐졌다 떼어졌다 했다고 한다.

사신이 와서 아뢰자 왕은 감은사로 가서 묵었다. 이튿날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까지다.)에 대나무가 하나로 합치자, 천지가 진동하고 이레 동안 폭풍우가 치면서 날이 어두워졌다가 그달 16일에야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가라앉았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으로 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가져다 바쳤다. 왕은 용을 영접하여 함께 자리에 앉았다.

왕이 물었다.

"이 산과 대나무가 떨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용이 말했다.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친 후에야 소리가 나게 되어 있으니,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얻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께서는 바닷속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또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께서 한 마음이 되어 값으로는 정할 수 없는 이런 큰 보물을 내려 저에게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며 오색 비단과 금옥으로 답례하고는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오니,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었다. 17일에 지림사(祗林寺, 기림사라고도 하며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에 있다.)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다.)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말을 달려와 축하하고 천천히 살펴본 다음 아뢰었다.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물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한 쪽을 떼서 물에 넣어 보십시오."

태자가 아뢰었다.

그래서 왼쪽에서 두 번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그 자리는 못이 되었따. 그래서 용연(龍淵)이라 불렸다.

왕은 궁궐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으므로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대왕 때 이르러 천수(天授, 주周나라 측천제則天帝의 연호로 천수라는 연호는 2년밖에 안 썼으므로, 천수 4년은 장수長壽 2년을 말한다. 중국 최초의 여황제로 690년에서 705년까지 재위했다.) 4년 계사년(693년)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 돌아온 기이한 일이 있었으므로 다시 만만파파식적(萬息笛)이라 불렀다. 자세한 것은 그 전기(傳記)에 있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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