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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공동체 조직은 시기별로 변모와 변천을 거듭하였다. 예를 들면 성리학적 지배질서가 확립되면서 실시된 향약이나, 사족들의 동계, 동약 조직의 보급으로 기층민 조직이었던 촌락조직은 축소되고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난후 복구와 자구책으로 상하합계(上下合契)의 동계가 나타났으며, 또 사족의 동계조직이 와해되거나 사족 간의 상호부조 역할로 한정되자,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촌락민들이 주도하는 대동계(大同契)가 운영되었다.


[함께보기: 대동계(大同契) 촌계]


과거 대동계(촌계)는 마을조직을 대표하는 가장 규모가 크고 우위에 있는 상징조직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대동계의 존재는 대표성과 상징성까지 잃지는 않았지만 생활문화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감소되었다. 특히 다음에서 보는 특수목적을 가지고 결성, 운영되는 계조직들에 비하면, 일견 결속력과 조직력이 느슨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들 목적계도 조선 후기에는 대동계(촌계)의 상대적 우위를 인정하면서 상하, 내외, 본말의 관계 속에서 운영되었다. 동족마을의 경우는 대동계와 함께 문중조직인 족계(화수계, 종중) 조직이 별도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1) 농계(農契)

농계는 계원 중에서 농잠(農蠶, 農桑)에 정통한 사람을 유사로 임명하고, 우마(牛馬) 등을 계원끼리 공동으로 사용하거나 농기구 구입, 종자 대여, 공터에 뽕나무, 잣나무 등의 유실수(有實樹, 먹을 수 있거나 유용한 열매가 열리는 나무) 심기 장려, 농한기에 유휴지 개간 등 농사에 관련된 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다. 동시에 각종 풍교에 필요한 자치활동과 길흉상구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계조직으로는 농계, 농사(農社), 몽리계(蒙利契, 수리시설의 수축과 관리를 위하여 지역 농민들의 조직한 계), 농구계, 우계, 마계 등이 있다.


2) 서당계(書堂契)

서당계는 마을단위로 건립되었던 서당의 운영과 조직에 관한 자료들이다. 훈장선생안, 서당규약, 강첩, 선악적, 치부기(재산)가 함께 전해지는 경우가 있다. 특히 서당 건립에 동원(출연)되는 인력과 물자의 기록은 촌락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문중별로 서재나 강사 등도 이와 유사한 성격으로, 촌락 내에서 족적의 기반을 살피는 데 이용될 수 있다.


3) 송계(松)

송계는 삼림의 보호와 이용을 목적으로 한 계조직으로, 금송계(禁松契)라고도 한다.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결성되며, 범위는 한 동리나 수개의 동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송계는 삼림 보호를 직접 관장하는 역원을 두고 교대로 이를 맡아 순찰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삼림 보호는 국가의 중요한 관심사였기 때문에 관청과 밀접한 관련하에 운영되었다.


4)상여계(喪輿契)

상여계는 마을과 상여의 규모에 따라 20~30가구 안팎으로 이루어지는데, 상여의 운반 및 무덤 터 다지기, 묘 쓰기 등 장례에 관계되는 일에 두레 형식을 모방한 공동조직이다. 운구와 산역에 드는 많은 인력 등 노동력을 직접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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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의 발생과 명칭

두레는 농사일이나 마을 일 등을 협업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공동노동조직의 대표명칭으로 지역마다 명칭이 다양하다.


[사진 모내기 두레/한국학중앙연구원]


 두레는 상부상조와 공동노동조직으로 촌락조직의 상징이기도 하다. 두레는 조선 후기의 농업 생산과 관련된 공동노동조직으로, 이앙법의 확산에 따른 노동집약 형태의 농법을 반영한 마을단위의 공동노동조직이었다. 조선 후기에 두레 조직이 일반화하는 것은 17세기 이래 노동력의 집중도를 증가시킨 이앙법과 도맥 2작 체계라고 하는 답작농업의 기술과 형태 변화, 그리고 이에 따른 집약적 농업 생산방식, 공동노동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두레는 밭농사 지역보다는 논농사 지역에서 발달하였다. 

 '두레'라는 명칭은 대표명칭일 뿐 실제 생산형태와 지역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문헌기록에는 두레가 농사(農社), 농계(農契), 농청(農廳)으로 표현된다. 또 두레는 동두레, 대두레, 농사두레, 길쌈두레 등으로 서로 다르게 불리며, 지역에 따라서 영남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풋굿이 두레와 같은 조직이다. 협동작업을 하기 위해 두레를 조직하는 것을 '두레 짠다'고 하고, 지역에 따라서는 '두레를 낸다', '두레농사'라고도 한다. 그리고 일하는 도중에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두레 먹는다'고도 한다. 또 두레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으로 농악을 들 수 있다. 두레작업을 나갈 때에는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친다. 농악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없애고, 흥을 돋우며, 협동심을 복돋우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를 '두레 논다'고 하고 '두레풍장'이라고도 한다.

 두레와 유사한 조직으로 평안도 일대의 건답(乾沓)지역에는 황두라 불리는 노동조직이 있었다. 황두는 20~30명의 농민이 한 작업단위가 되어 김매기 작업만을 수행한 공동노동조직이었다. 황두의 어원은 향도에서 변이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두레와 거의 유사한 형식이지만 건답지역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각 집에서는 반드시 1호당 1명씩 장정을 내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조직상의 강제성도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행동이 빠른 사람을 '황두꾼 같다'고 하였다.

 제주도의 특수한 노동조직인 수놀음도 두레와 유사한 조직형태이다. 농번기에 김을 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집을 지을 때, 지붕을 이을 때, 산에서 큰 나무를 끌어내릴 때, 방앗돌을 굴릴 때, 발을 밟아 줄 때, 마을 길을 닦을 때와 같이 마을의 공동노역에 힘을 합하는 관행이다. 제주도에는 소를 키우는 수눌음인 '번쇠'가 있어 이웃끼리 소를 한데 모아 목야에 방목하고, 그 임자들이 순번제로 감시하며 키운다. 그런가 하면 해녀들의 그물접도 수눌음의 일종으로, 해녀계원들은 몇 개의 접으로 나누어 공동으로 노동, 분배하였다. 이러한 노동 교환은 서로의 우의를 두텁게 하고, 유대감을 강화시켜 주며, 능률과 일의 신명을 부추기는 노래도 생겨났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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