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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에서 필수적인 것이 공동회연(共同會宴)으로, 대표적인 것은 '호미모듬', ;호미씻이' '풋굿'이다. 김매기를 마친 뒤 공동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여 음식과 술을 먹고 농악에 맞추어 여러 가지 연희를 곁들여 뛰고 놀면서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결속을 재확인하는 의례이자 행사였다. 호미는 가장 기본적이고 다용도로 활용된 농구였다. 두레가 노동조직이었기 때문에 호미를 상징적 행사에 동원한 것이었다.


호미모듬은 두레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두레꾼들이 농청에 모여 역원을 선출하고 공동의 조직을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작업을 준비하는 날로, 저마다 자기의 호미를 한 개씩 농청에 모아 거두는 의식이다. 이 호미는 대개 첫 두레일까지 걸어 두는 것이 관례였고, 그 시기는 대개 2월 하리아드랫날(2월 초하루), 혹은 2월의 머슴날이었다.


호미씻이는 세조연(洗鋤宴), 세조회(洗鋤會)라고도 하고, 호미걸이라고도 한다. 호미씻이는 두레 최고의 축제로서, 세벌매기가 끝나 재배기의 농사가 실제적으로 마무리되는 7월 15일을 전후하여 날을 잡아 잔치를 벌이던 행사이다. 농민들의 일년 영농주기를 보면, 크게 농번기와 농한기가 교차하면서 그 중간중간에 준농한기가 끼여 있다. 호미씻이는 여름철의 최대 농작업이던 논매기뿐만 아니라 밭매기를 마치는 시점에 형성되는 준농한기에 하루를 잡아서 온 동민이 모여 놀던 농경세시였다.


[연산백중놀이/ⓒ한국민속대백과사전]



호미씻이는 농민들이 중노동의 중압감을 씻어 내고 전반부의 재배기에서 후반부의 수확기로 이행하는 과정에 설정된 시간적 통과의례였다. 동시에 호미씻이는 매년 결성되던 두레와 같은 공동협업노동조직이 제 기능을 다했다고 판단되는 시점에 그런 노동조직을 해체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호남지역은 호미씻이라고 하는데, 이는 농사가 끝나 호미를 씻는다는 의미이며, 경기지역에서는 호미걸이라고 하는데, 두레기의 버릿줄에 호미를 걸어 두기 때문이다.


호미씻이는 지역별로 그 명칭이 매우 다양한데, 풋구(혹은 풋꾸, 풋굿)와 초연(草宴), 두레 먹기, 장원례, 머슴잔치 등으로도 불렸다. 풋구, 곧 초연(草宴)은 들판의 잡초(풀:草)를 제거한 다음에 하는 굿(잔치:宴)이라는 뜻으로, '풋구 먹는다' '풋구먹이 한다' '초연 먹는다'라고 하며, 주로 영남지방에서 사용된다. 그리고 호미씻이를 '두레 먹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호남과 충남, 경남 남부에서 주로 쓰인다. 특히 호남지방에서는 두레 먹기라 하는데, 이는 두레꾼의 공동작업인 제초작업이 끝난 후에 모여서 놀고 먹는다는 의미이며, 간혹 '두레잔치'라고도 했다. 그리고 두레 먹기를 할 때, 두레꾼 가운데서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뽑아 소에 태워 주인집에 가서 후하게 대접받고 즐겁게 논다고 하여 장원례(壯元禮)라고도 하였다. 또 머슴들이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이므로 이 행사를 머슴잔치, 머슴생일 또는 머슴날이라고도 했다.


모이는 장소는 강변이나 개울가의 그늘, 또는 마을 주변의 그늘진 곳이었다. 호미씻이를 하러 나갈 때는 집집마다 성의껏 음식과 술을 준비해 갔다. 대체로 부잣집에서 더 풍성하게 마련하는 것이 관례였다. 참여한 사람들은 온종일 먹고 마시며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면서 놀았느넫, 머슴들은 주인집에서 만들어 준 음식과 술을 가지고 나가서 은근히 과시하면서 흥겹게 놀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집집마다 마련해 준 음식물을 늘어놓고 머슴들 스스로 품평회를 하기도 했다. 주인집에서 많은 음식을 제공받은 머슴은 주인한테 그만큼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제공된 음식물로 주인의 인심이 얼마나 후한지도 헤아려졌다. 그런가 하면 농사가 잘된 집의 머슴을 뽑아 시상하기도 하고, 삿갓을 씌워 소등에 태워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곳도 있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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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의 공동노동 내용과 방식

두레가 맡아서 하는 공동노동은 모내기, 물 대기, 김매기, 벼 베기, 타작 등 논농사의 전 과정이다. 특히 일시적으로 많은 품이 요구되는 모내기와 김매기에는 반드시 두레가 동원되어야 했다.


[함께 보기: 전통 공동노동조직, 두레의 발생과 명칭]



[사진 모내기 두레/한국학중앙연구원]


김매기는 농사일 중 가장 힘든 것이어서 공동으로, 그리고 풍물로 흥을 돋우며 일을 하였다. 김매기는 모내기가 끝나고 15일이 지나 모와 함께 잡초가 자라는 오뉴월의 더위와 겹쳐서 시작되는데, 음력 5~6월(양력 6~7월)에 이루어진다.

김매기는 논바닥에 물기가 있어 흙이 마르기 전에 빨리 해야 하므로 두레 공동작업이 필요하며, 김을 매는 간격은 초벌 도는 애벌매기를 한 후 10일 뒤에 두벌매기, 다시 보름 후에 세벌매기(만두레라고도 함)를 한다.

두레작업(두레공사)은 엄격한 규율 아래 진행되었다. 현지 조사된 두레작업의 한 예시를 간략하게 묘사하여 두레 일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두레꾼들은 두레작업을 하는 날 아침 동이 틀 무렵부터 마을 동각이나 모정 혹은 도가집 앞마당에 모였다. 모이는 신호로 종고를 울리거나 징을 쳤다. 어떤 두레는 아예 늦게 모일 것을 염려하여 공동취침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두레꾼들이 다 모이면 두레기를 앞세우고 풍물(길 군악)을 치면서 일터로 나간다. 농기와 영기를 세우고 상쇠가 앞장서 위세를 보이면서 행군하면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줄지어 따라가기도 했고, 일단 일터에 도착하면 두레기를 넓은 곳에 세우고 간단한 풍물 고사를 지냈다.

풍물꾼들이 먼저 논으로 들어간다. 김매는 순서와 요령을 잘 알고 있는 영좌나 좌상의 지시에 따라 일꾼들은 논으로 들어가 앞잽이와 뒷잽이가 원을 지어 돌아가면서 김을 맨다. 이 과정에서 경험이 많은 좌상이나 공원의 지시가 매우 중요하며, 풍장에 따라 고된 노동을 흥겹게 진행한다. 이 같은 일과 놀이의 순환이 바로 두레의 뚜렷한 특징이라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삼복더위에 뙤약볕 아래서 김매기를 하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앞잽이 선소리꾼과 논북에 따라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래서 중간중간에 논두렁에서 한바탕 놀아야만 그 고통을 덜 수 있었다. 이러한 일과 놀이의 순환은 내용적으로 보면 노동의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미중의 지혜로운 선택이었던 것이다.

작업시간은 좌상이 정하는데, 시계가 없을 때는 구멍 뚫린 초롱에 물을 채워 그것이 다 없어지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일하는 중간에 두렁 넘기라 하여 옆 논으로 연이어 이동하기도 하고, 몬들이라 하여 원을 모아 마지막 쌈을 싸게 되는데, 이것이 두레작업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두레의 공동식사 관행은 또 다른 문화적 특징이었다. 두레의 공동식사는 새참과 식사로 구분되는데, 새참은 술이 주종이었고, 비록 빈약한 차림이었으나 일꾼들 모두가 바가지에 들밥을 먹으면서 공동체로서의 동질감과 친밀감을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레 일이 끝나면 두레꾼들은 풍장을 치면서 마을로 돌아온다. 일꾼들은 도랑에서 몸을 씻은 뒤 도가집[도가(都家), 농사(農舍), 농청(農廳)]에 준비한 술을 마시고 즐기면서 하루 일을 마친다. 일종의 뒤풀이 형태로 놀이판이 벌어지고, 여기에 술과 음식, 다양한 여흥이 어우러지면 한판 굿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두레작업에서 과부, 노인, 환자가 있는 집안이나 어린아이만이 있는 집의 농사를 두레가 거들어 주는데, 이처럼 마을 전체적인 노역에 인력을 제공함으로써 공동체적 삶의 유지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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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두레/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두레는 물론 공동노동, 생산조직이라는 1차적 목적을 가진다. 그러나 그와 함께 그 구성원들이 바로 전근대시기 피지배 농민층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과연 이들 민중의 의사결정과정이나 내용이 어떠했었는지 매우 궁금하기만 하다. 구레의 회의는 두레숙의 제의와 결부된 대동(大同)회의로서, 파제 후 음복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두레회의의 내용은 두레가 기본적으로 농업 생산조직이었으므로 조직의 구성과 임원의 선출, 농사의 방식과 회계, 결산 등 조직과 농사 관련 내용이 주가 되었다. 그러나 두레의 구성원들이 바로 마을의 공동체적인 운영에 실질적으로 기능하는 청장년집단이었기 때문에 마을 관련 사항도 함께 논의하기 마련이었다. 회의는 유사집(도가집-都家집. 동업자들이 모여서 계나 장사에 대한 의논을 하는 집, 계나 굿 따위의 마을 일을 도맡아 하는 집)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조사되지만, 원래는 두레꾼의 집회소인 농청(農廳)에서 이루어졌다.

두레회의는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하나는 호미모듬이며 농사 준비회의로서 2월경에 이루어졌다. 여기서는 1년 농사의 대소사를 결정하였다. 두레의 재조직 및 역원 선출, 신입례와 신참례, 농사 순서 결정, 두레 셈이 기본원칙 확인, 농악기의 보수나 구입, 품앗이와 품삯 결정, 호미모듬 의례준비 등이었다. 두레농사 후의 회의는 호미씻이가 끝난 후에 한 해의 결산, 상호부조, 농악기 보수, 마을살림, 마을의 대소 공사(길닦기, 풀베기)해결 등으로 이루어졌다.

두레는 마을단위의 매우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조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노동력을 단위로 결성되는 공동체조직이었기 때문에 가입과정에서 노동력의 수준을 점검하는 재미있는 심사절차가 있었다. 흔히 주먹다음이로 통칭되는 가입례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것이 들돌 들기와 진세턱이다.

[들돌 들기/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마을의 미성년자가 16~17세가 되면 성녕으로서 자연스럽게 두레에 가입하게 되는데, 이때 사용되는 것이 바로 들돌(전라도는 들독, 제주도는 뜽돌)이다. 들돌은 둥그럼 돌로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며, 보통사람이 들기에는 약간 힘에 겨운 무게이다. 들돌은 대개 당산나무나 동간의 밑에 보존되어 있으며, 대 , 중, 소로 무게가 다른 둥근 돌을 모셔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는 경우도 있다. 이 들돌을 들거나 들어서 어깨 위로 넘기면 당당한 가입의 자경을 얻는데, 이는 노동 담당자로서 생산활동에 참가할 자격을 인정받는 의미를 지닌다. 마을에 따라서는 7월 백중에 청장년들이 모여 힘을 겨루고 장사(수머슴)를 뽑는 데에 이용되기도 한다. 이 경우에 장사는 두레의 대표가 되거나 임금을 갑절로 받는 특혜를 부상으로 받는다.

다음으로 신입례는 신입자들이 주로 술이나 가벼운 안주를 대접하는 것인데, 이를 진세턱이라고 한다. 진세턱의 기록이 문서로 남은 경우도 있다. 이 신입례는 두레에서 1인의 동등한 노동력 인정 절차이자 성년식 통과의례라고도 할 수 있다. 들돌 들기와 신입례는 두레조직의 세대 교체와 생산력 제고, 구성원 사이의 연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성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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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의 발생과 명칭

두레는 농사일이나 마을 일 등을 협업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공동노동조직의 대표명칭으로 지역마다 명칭이 다양하다.


[사진 모내기 두레/한국학중앙연구원]


 두레는 상부상조와 공동노동조직으로 촌락조직의 상징이기도 하다. 두레는 조선 후기의 농업 생산과 관련된 공동노동조직으로, 이앙법의 확산에 따른 노동집약 형태의 농법을 반영한 마을단위의 공동노동조직이었다. 조선 후기에 두레 조직이 일반화하는 것은 17세기 이래 노동력의 집중도를 증가시킨 이앙법과 도맥 2작 체계라고 하는 답작농업의 기술과 형태 변화, 그리고 이에 따른 집약적 농업 생산방식, 공동노동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두레는 밭농사 지역보다는 논농사 지역에서 발달하였다. 

 '두레'라는 명칭은 대표명칭일 뿐 실제 생산형태와 지역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문헌기록에는 두레가 농사(農社), 농계(農契), 농청(農廳)으로 표현된다. 또 두레는 동두레, 대두레, 농사두레, 길쌈두레 등으로 서로 다르게 불리며, 지역에 따라서 영남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풋굿이 두레와 같은 조직이다. 협동작업을 하기 위해 두레를 조직하는 것을 '두레 짠다'고 하고, 지역에 따라서는 '두레를 낸다', '두레농사'라고도 한다. 그리고 일하는 도중에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두레 먹는다'고도 한다. 또 두레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으로 농악을 들 수 있다. 두레작업을 나갈 때에는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친다. 농악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없애고, 흥을 돋우며, 협동심을 복돋우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를 '두레 논다'고 하고 '두레풍장'이라고도 한다.

 두레와 유사한 조직으로 평안도 일대의 건답(乾沓)지역에는 황두라 불리는 노동조직이 있었다. 황두는 20~30명의 농민이 한 작업단위가 되어 김매기 작업만을 수행한 공동노동조직이었다. 황두의 어원은 향도에서 변이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두레와 거의 유사한 형식이지만 건답지역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각 집에서는 반드시 1호당 1명씩 장정을 내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조직상의 강제성도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행동이 빠른 사람을 '황두꾼 같다'고 하였다.

 제주도의 특수한 노동조직인 수놀음도 두레와 유사한 조직형태이다. 농번기에 김을 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집을 지을 때, 지붕을 이을 때, 산에서 큰 나무를 끌어내릴 때, 방앗돌을 굴릴 때, 발을 밟아 줄 때, 마을 길을 닦을 때와 같이 마을의 공동노역에 힘을 합하는 관행이다. 제주도에는 소를 키우는 수눌음인 '번쇠'가 있어 이웃끼리 소를 한데 모아 목야에 방목하고, 그 임자들이 순번제로 감시하며 키운다. 그런가 하면 해녀들의 그물접도 수눌음의 일종으로, 해녀계원들은 몇 개의 접으로 나누어 공동으로 노동, 분배하였다. 이러한 노동 교환은 서로의 우의를 두텁게 하고, 유대감을 강화시켜 주며, 능률과 일의 신명을 부추기는 노래도 생겨났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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