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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다이어트, 섹스, 도박, 운동, 비디오 게임, 초콜릿, 카페인..., 현대인의 중독 목록을 보노라면 우리가 어떻게 쾌락 탐닉자가 되었는지를 고발하는 기소장 같은 느낌이 든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오늘날의 과잉 탐닉을 설명할 때마다 왜곡된 방식으로 거론되곤 한다. 사실 그는 에피쿠로스라는 이름 하면 언뜻 떠오르는 전형과는 전혀 딴판인 사람이었다. 이 철학자는 와인보다는 물을 선호했고 소박한 음식을 즐겨 먹었으며 오직 행복해지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전념했을 뿐이다. 알고 보면 에피쿠로스가 생각한 행복한 삶은 여러 가지 면에서 러셀의 생각과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에피쿠로스가 과잉 탐닉 내지는 강박적 소비와 어느 정도 연관돼 있긴 하다. 어쩌면 이런 면은 우리가 흔히 즐거움과 연관시키는 보편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권을 사면서 소소하게 5등 당첨을 꿈꾸진 않는다. 꿈에 그리는 자동차는 매끈한 몸체에 바람처럼 빠르며 굉음을 낼 줄 아는 근사한 물건이다. 꿈같은 휴가는 현실에서 잊고 지내온 온갖 휘황찬란한 사치품으로 가득하다. "꿈꾸던 바를 실제처럼 경험한다는 것"은 에피쿠로스가 쾌락과 연관시켰을 법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서구 공동체가 중독에 빠지기 쉽다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이전엔 어림도 없었지만 지금은 무엇에든 중독될 만큼 수입과 여가 시간 면에서 여유가 있다. 이제 집에서 편히 앉아 도박을 즐길 수 있는 세상이 됐다. 현대의 성(性)문화는 누군가가 푹 빠져들지 않고는 못 배길 자극 요소와 표현물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아이들은 강박 충동에 사로잡힐 때까지 마음껏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는 자유와 기회를 얻어냈다.

 

복잡하고 심각하며 난해한 충동이란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다. 대신 러셀은 우리더러 모든 충동을 감상적으로 해석하지는 말라고 경고한다. 또 충동 안에서 괜히 무모한 숭고함 따위를 찾으려 들지 말라고 타이른다. "고대인들은 중용을 필수 미덕 중 하나로 여겼다"고 러셀이 짚어준다. 우리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러셀이 보기에 문제의 일면은 "대단히 위압적인 열정이 높이 평가받았다"는 낭만주의적 이상에 있다.

 

어떻게 중용을 찾을 수 있을까? 적당한 게 얼마만큼인지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러셀이 제시하는 원칙은 이것이다. 탐닉의 정도가 "건강을 해치지 않아야 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애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우리가 사는 사회에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러셀은 체스를 하고 싶은 충동을 예로 든다. 요즘 우리 중에 체스를 붙잡고 씨름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으니 러셀이 온라인 카드 게임을 얘기한다고 가정하자. 하루 종일 게임하기만을 고대하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게임하기 위해 일을 그만두는 사람은 중용의 미덕을 잃은 사람이다".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된다. 꿈을 따르려는 충동, 강박을 뒤쫓고자 안락한 상황을 포기하려는 충동에 관한 물음이다. 러셀은 다시 구별을 지어 답한다. 더 높은 이상이 있는 사람은 이상을 위해 매진하라. 단순히 자극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가 결국 탐닉이다. 등반가도 아닌데 왜 자꾸 더 높은 단계를 찾아 오르려 드는다.

 

탐닉과 과잉 탐닉 사이에 선을 긋기란 쉽지 않다. 탐닉은 단순히 누군가가 열정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열정이 평범한 일상생활로는 충족되지 않으나 건강한 에너지 배출구 역할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탐닉하고픈 낭만적 욕구를 따르는 건 전혀 유익하지 않다.

(러셀의 행복철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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