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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식 시계가 없던 옛날, 일반 민가에서의 시간 측정 방법


[사진 고려시대 해시계/네이버지식백과]


 서울이나 몇몇 중요한 도시에서는 새벽이나 저녁에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 그렇지만 일반고을에는 시계가 없었고 시간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스스로 시간을 알아 내야 했다. 시간을 알아 내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시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민간에서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해시계(sundial)였다. 해시계는 가장 만들기 쉬운 시계였으므로 지금도 꽤 많이 남아 있다.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김정희의 옛집에도 해시계 받침 기둥돌이 남아 있듯이, 양반집에서는 종종 해시계를 놓아 시간을 쟀다. 또, 성냥갑처럼 작은 휴대용 해시계도 많았고, 때로는 작은 해시계를 부채자루에 매달아 선추(扇錘)로 쓰기도 하였다. 이런 휴대용 해시계는 어디서나 방향을 알아낼 수 있도록 대개 나침반이 함께 붙어 있었다.


[사진 고려시대 일영의(해시계)/높이9.5cm/합천 해인사 소장/한국한중앙연구원]


 그렇지만 해시계는 밤이나 궂은 날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향시계(香時計)였다. 향시계는 주로 절에서 많이 썼는데, 참나무에서 나는 버섯을 잿물에 삶은 뒤 가루를 내어 돌 따위에 글자 모양으로 파놓은 홈에 채워 놓은 것인데, 여기에 불을 붙여 그 타들어가는 정도에 따라 시각을 판별하는 것이다. 비슷한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는 서양에 초시계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도 과거시험 가운데 초가 다 탈 때까지 시권(試券:답안지)을 내게 하는 각촉시(刻燭試)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면 궂은 날 향시계도 없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시간을 알았을까? 하고 궁금하겠지만 이때는 어림짐작으로 시간을 판별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대개는 시간을 몰라도 그만이었다.

 그러면 시계가 없을 때에는 어떻게 시간을 쟀을까? 우선 낮시간을 아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해가 어느 곳에 떠 있는가를 보고 알아내는 방법이다. 해의 높이가 아니라 해가 정남쪽에 떠 있는 시각을 오정으로 하여 해가 얼마나 남쪽에 가까이 있는가를 판별해서 시간을 알아 내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어느 정도 인지능력이 생겨나면 곧바로 동서남북을 가르쳤다고 한다. 소혜왕후 한씨의 '내훈(內訓)'에서도 '예기'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여섯 살이 되면 셈과 방위이름을 가르칠지니'라고 하였다. 방위를 아는 것은 아이들에게 공간감각과 함께 시간감각을 익히는 가장 기초적인 방편이었다.

 방위를 알아 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물론 나침반을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풍수지리가 유행하여, 지관들이 항상 패철(佩鐵) 또는 나경(羅經)이라 부르는 나침반을 가지고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사실 지관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나침반은 마음만 먹으면 구하기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또, 굳이 나침반을 이용하지 않아도 대강의 방위는 알아낼 수 있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북극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공해가 거의 없고 밤이 칠흑같이 어두웠던 예전에는 날만 맑으면 어디서나 별이 또렷하게 보였으므로 북극성을 바라보고 서서 팔을 벌리면 오른쪽이 동쪽, 왼쪽이 서쪽이 된다. 이 방법이 미덥지 않으면 마당에 기다란 막대기를 세워 놓고 낮에 그림자를 관찰하여 그림자가 가장 짧아졌을 때의 그림자 방향을 남북으로 정하면 된다.


[사진 북두칠성/위키백과]


 남북이 정해지면 해시계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원반 모양의 돌에 방사선 모양으로 시간을 그리되, 남북방향에 자시와 오시를, 동서방향에 묘시와 유시를 넣으면 되기 때문이다.

 해가 사라진 밤에는 별이 교대했다. 하늘의 별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 시간을 판별했던 것이다. 북극성은 찾기 어렵지 않았다. 북두칠성의 국자 모양 끝자리의 별 메라크(Merak)와 두베(Dubhe) 두 개를 직선으로 이어서 두 별의 거리 다섯 배를 한 연장선상에 북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동서양이 똑같이 사용했다.


[사진 북극성 찾는방법/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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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먹는 일은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먹을 것을 유달리 중시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속담뿐 아니라 대표적인 예로 진달래꽃을 참꽃, 철쭉꽃을 개꽃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철쭉꽃이 진달래꽃보다 아름다워도 먹지 못하는 철쭉꽃은 '개꽃', 먹을 수 있는 진달래꽃은 '참꽃'이라고 불렀다. 꽃 자체의 아름다움의 기준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가와 없는가가 중요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루의 시각을 밥 먹을 때로 구분했는데, 그래서 저녁밥을 먹는다고 하지 않고 통상 '저녁'을 먹는다고 말한다. 또 인사말로 '밥 먹었느냐'는 말을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예전에 너무 가난하고 굶주리고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인사말이 생겼다고 오해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영어에서 '굿 모닝', '굿 이브닝'이라는 말을 우리는 "아침밥 먹었습니까?", "저녁밥 먹었습니까?"로 인사했던 것이다. 시간을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밥 먹는 때로 생각했던 관습이 매우 오래 된 것이라는 것은 '끼'라는 말에서도 그대로 보인다. '끼'와 '때'는 본래 같은 말이었다. 16세기 중종 때 편찬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時'를 'ㅂㅅ기니 시'라 풀이했다. 요즘도 노인들은 '세 끼 밥'이라 하지 않고 '세 때 밥'이라는 표현을 쓴다. 어원으로 살펴보더라도 '끼'는 '때'와 함께 하나의 낱말에서 갈라져 나온 말이다. 또 우리는 뭐든지 먹는다고 표현했다. 여러가지 다양한 의미의 말들이 먹는다는 말 한마디로 표현된다. 영어에서는 물이나 술을 마시는 것을 'drink' 담배 피우는 것을 'smoke'로 표현하지만 우리말에서는 모두 먹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마음도 먹고, 욕도 먹고, 나이도 먹고, 귀도 먹고, 겁도 먹고, 잊어먹고, 떼어먹고 등의 표현이 보여 주듯 우리의 오래된 언어생활에도 먹는 것을 중요시 했다는 것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 우리는 예전부터 다른 민족에 비해 많이 먹었다. 성인 남자는 한 끼에 420cc의 곡물을 먹었는데, 이는 지금의 식사량에 비하면 3배에 이르는 것으로, 일본인은 물론 중국인에 비해서도 꽤 많은 양을 먹었다. 끼니는 예전에는 '조석(朝夕)끼니'라는 말 처럼 한 두 끼를 먹었으며, 해가 긴 여름철이나 힘든 일을 할 때에는 간단한 점심(點心)을 포함하여 세 끼를 먹기도 했다. 예전에는 어린이도 180cc를 먹어 지금의 어른 보다도 더 많이 먹었던 셈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먹었을까? 그 원인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가난해서 그랬다는 지적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전에 너무나 어렵게 살아서 먹을 것이 생기면 정신없이 허겁지겁 많이 먹는 습성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전의 가난이나 기근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이전에는 중국, 일본, 서양 어디나 흉년, 기근이 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심지어는 영아 살해 등의 풍습이 횡행했다. 우리민족이 많이 먹었다는 것은 늘 많이 먹었다는 것이지 어쩌다가 한 번 먹을 것이 생겼을 때 닥치는 대로 많이 먹었다는 말이 아니다. 가난하면 늘 많이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었다. 조선시대에 쌀이 가장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쌀을 주식으로 삼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수출, 공출 등으로 쌀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 남한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쌀의 완만한 증산, 보리의 급격한 증산이 식생활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쌀은 칼로리가 높고, 고른 영양소를 갖추고 있는 우수한 식품이다. 또, 벼는 파종량에 비해 수확량이 많고, 벼농사는 토지 이용도가 높아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훌륭한 곡식이었다.

 가장 중요한 부식인 김치는 무, 오이, 가지 등으로 만들었는데, 18세기부터 고춧가루가 양념으로 쓰여 지금처럼 빨간 김치가 생겨났으며, 19세기에는 배추가 주재료로 부상했다.

 식사도구로는 밥상과 수저를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작은 소반을 써서 식사를 했고 성인은 각자 따로 상을 받아 먹었다. 집 구조가 조리를 하는 부엌과 밥을 먹는 방으로 분리되어 있고, 부엌에서 방에 이르는 동선이 복잡하여 소반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중국이나 일본이 13, 14세기부터는 젓가락만으로 밥을 먹었던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젓가락과 함께 숟가락을 써서 식사를 하고 있다. 이는 우리 상차림에는 항상 국이 있었는데, 그 국이 건더기가 많고 뜨거웠기 때문에 숟가락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통사회와생활문화/이해준 송찬섭 전경목 정연식 정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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