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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시각이 멍청할 정도로 젊망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일종의 지적 신뢰성이 있다며 추종하는 희한한 습성이 우리 주변 어딘가에 존재한다. 러셀은 이 기묘한 습성에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그리고 해피엔딩을 보장할 수 없는 곳에서도 여전히 희망을 가질 이유는 있다고 말한다.

러셀은 '바이런식 불행'이라는 표현을 쓴다. 모든 인생은 고통과 불행을 특징으로 삼고 있으며 앞으로도 늘 그 같은 특징을 지닐 것이므로 이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대처 방안은 그저 불행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바이런식 불행을 표현다. 그런데 러셀은 이런 이유 없는 불행을 '우주의 속성'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본다.

바리런 경(George Gordon Byron 1788~1824, 영국 낭만파 시인)/ⓒ Thomas Phillips/wikipedia Public Domain

평소에 러셀이 바리런 경(George Gordon Byron 1788~1824, 영국 낭만파 시인)의 열정과 활기에 존경을 표했던 사실을 생각한다면, 바이런 경의 이름을 불행과 짝지어 이렇게 표현하는 게 다소 심한 건 사실이다.

전쟁, 가난, 자연재해, 가족과 친구들을 해코지하는 범죄불공평 등의 개별 사건들이 보여주는 소스라칠 잔인함에 대해 우리가 불행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끔찍한 사건에 관해 들었을 때 어깨 으쓱하며 겨우 "그게 인생이지, 뭐"라는 말을 던진다면 당신은 세상일에 초탈한 행복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세상일과 아예 인연을 끊은 무감각한 사람이다. 특히 불행이 당신 자신에게 닥쳤을 때조차 심드렇안 반응을 보인다면 어딘가 중요한 나사 하나가 빠진 게 분명하다.

그러므로 살면서 때때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러셀이 말하듯 불행함 속에 '우월한 순리성'이라는 건 없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게 뭔가 고차원적이고 근사한 건 아니라는 말이다.

러셀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고군분투에 적합한 존재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주어진 일보다는 힘써서 쟁취하는 일을 통해 더 큰 기쁨을 얻는다. 이건 생물학적 명령이나 다름없다.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이 정도면 적당한 욕망이라고 느끼면서 그 욕망의 대상을 손쉽게 획득하는 사람은, 바라는 바를 이룬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실망, 불행, 좌절 등도 엄연히 행복한 삶의 요소라고 봐야 한다. 이런 감정들로 인해 우리는 보다 더 애쓰게 되지 않겠는가. 낙담하고 절망감을 느낀다는 게 우리의 고군분투가 부질없다는 뜻으로 해석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고군분투가 마냥 만족감을 가져다 주는 건 아니다. 러셀의 지적대로 삶은 대본에 다라 진행되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엄청난 불행이라 할지라도 종국에는 해피엔딩으로 보상받게 될 것이므로 그 불행을 거뜬히 겪어내는 남녀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가 아니다.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미리 정해두고 희망하는 건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그럼 우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행복의 정복'이 출판된 1930년에 이미 58세였던 러셀은 독자들에게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한껏 들떠보라고 권고한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즉 초고층 빌딩, 첨단 방송, 비행기 등이 선사하는 변화는 충분히 세상을 좋은 쪽으로 이끌 것이며 우리를 보다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여겼다. 러셀이 보았던 세상의 변혁에 현재의 우리는 항생제, 텔레비전, 로큰톨, 축구 등을 더 보탤 수 있다. 새로운 사건은 우리에게 행복한 삶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킨다. 휴가를 즐기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해서 그 휴가 기간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 아니다.

우리가 바이런식 불행에 처할 운명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생각은 어쩌면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쪽 면만 보는 이 시각에 기대는 건 깊이나 진중함이 없는 태도다. 그 어떤 보장도 없지만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품으면서 인생의 기쁨을 만끽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러셀의 행복 철학' 中)

 

[함께 보기: 바이런적 불행의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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