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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나무위키

 

옛 책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제30대 무왕(武王, 재위 600~641, 이 무왕은 제30대 무왕이 아니라는 설이 있다. 이병도 박사는 무녕武寧의 동의이사同義異寫임을 모르고 쓴 것이라 하여 제25대 무녕왕을 말하는 듯하다고 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武王' 조에는 이름이 장璋이고 법왕法王의 아들이며 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홀로 수도 남쪽 못 가(南池, 부여군 동남리에 있으며 궁남지라고 한다. 여기서 무왕이 태어났다는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 속의 용과 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 이병도 박사는 "서동은 내가 아는 바로는 무왕의 아명이 아니라 훨씬 이전의 동성왕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서동이 마를 캐어 팔며 살았던 이유를 왕위 계승과 관련된 권력 투쟁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이며, 재주와 도량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항상 마(薯蕷)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라고 쓴다.)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신라의 수도로 가서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러고는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이재선 교수는 이 동요가 서동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백제에 퍼져 있던 구전 설화를 의도적으로 개작하여 경주 지역에 전파시킨 것이라고 보았다.)

 

善化公主主隱 他 密只 嫁良 置古

선화 공주님은 남몬래 짝지어 두고

薯童房乙 夜矣 卯乙 抱遣 去如

서동(薯童)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동요는 수도에 가득 퍼져 궁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백관들은 힘껏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게 했다. 공주가 떠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여비로 주었다. 공주가 유배지에 도착할 즈음, 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몰랐으나, 우연한 만남을 기뻐하며 그를 믿고 따라가 몰래 정을 통했다. 그런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징험을 믿게 되었다. 그러고는 함께 백제에 도착하여, 어머니가 준 금을 꺼내며 앞으로 살아갈 계책을 세우자고 했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물건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인데, 한평생의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서동이 말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이런 것이 흙덩이처럼 쌓여 있소."

공주가 이 말을 듣고는 매우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당신이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보물을 부모님의 궁궐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말했다.

"좋소."

그래서 금을 모았는데, 마치 구릉처럼 쌓였으므로 용화산(龍華山, 지금의 익산 미륵산)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있는 곳으로 가서 금을 운반할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말했다.

"내가 신통력으로 옮겨 줄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의 궁궐에다 금을 날라다 놓았다.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하게 여겨 서동을 더욱 존경했고, 항상 글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 일로 인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도착했는데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속에서 나와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했다. 왕비가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제 간곡한 소원입니다."

 

왕이 절을 세우는 일을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 메우는 일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미륵법상(彌勒法像) 세 개와 회전(回殿)과 탑(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미륵사 터가 있는데 4미터 높이의 당간지주가 남아 있어 그 규모를 유추할 수 있다. 미륵사의 창건은 백제 불교가 미륵신앙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국사>에는 왕흥사라고 했다.)라고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들을 보내 돕게 했는데, 지금까지 그 절이 남아 있다.(<삼국사>에 "이는 법왕의 아들이다."라고 했는데 이 전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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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천도 과정/ⓒ우리역사넷

 

부여군(扶餘郡)은 전백제의 수도인데, 혹은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백제 성왕(聖王, 백제 제26대  왕, 재위 523~554) 26년 무오년(538년) 봄에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했다.(그 지명은 소부리인데, 사비란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고 소부리란 부여의 별칭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제4에는 성왕 26년이 아닌 16년으로 되어 있다. 도읍을 사비로 옮긴 이유는 고구려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비좁은 웅진熊津보다는 넓은 평지에 기틀을 다지려는 의도로 보아야 한다.)

 

또 토지측량대장에는 이렇게 말했다.

"소부리군 농부의 주첩(柱貼, 농사 짓는 일꾼의 대장)이다."

 

그러므로 지금 부여군이라 말하는 것은 아주 옛날의 이름을 회복한 것이며 이는 백제 왕의 성이 부씨(扶氏)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혹은 여주(餘州)라고도 하는데 군의 서쪽 자복사(資福寺) 고좌(高座, 승려가 대중에게 설법할 때 앉는 대좌를 말한다.) 위에 수놓은 휘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말했다.

"통화(統和,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성종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의 연호로 983년에서 1012년까지 사용했다.) 15년 정유년(997년) 5월 어느 날 여주 공덕대사수장(功德大師繡帳)."

 

또 옛날 하남(河南)에서 임주자사(林州刺史)를 두었는데, 그때 지도책 안에 여주라는 두 글자가 있으니, 임주는 지금의 가림군(佳林郡)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백제지리지]에는 [후한서]의 말을 인용하여 "삼한은 모두 78국인데 백제는 그 가운데 한 나라다."라고 했고, [북사北史, 당나라 이연수李延壽가 지은 역사서로 위魏나라부터 수나라까지 역사를 기록했다.]에는 "백제의 동쪽 끝은 신라고 서남쪽은 큰 바다와 닿아 있으며, 북쪽 끝은 한강(漢江)인데 그 군(郡)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고 하며, 그 밖에 또 오방성(五方城)이 있다."라고 했다.

 

[통전通典]에는 "백제는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가 위치하고 서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해 있다."라고 했고, [구당서舊唐書]에는 "백제는 부여의 다른 종족으로 그 동북쪽은 신라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월주(越州)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왜(倭)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다. 그 왕이 거처하는 곳에는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이 있다."라고 했으며, [신당서新唐書]에는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고 남쪽은 왜인데 모두 바다 건너편이고, 북쪽은 고구려다."라고 했다.

 

[삼국사(삼국사기를 말한다.)] '본기本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북부영에서 난리를 피해 달아나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주(州)의 왕에게는 왕자가 없고 단지 세 딸만 있었다. 왕은 주몽이 비상한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부여 주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沸流)라고 하고 둘째는 온조(溫祚)라고 했다.

 

두 왕자가 후에 태자(太子, 주몽의 아들로 나중에 유리왕이 되었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烏干)과 마려(馬黎) 등 10여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니, 많은 백성들이 따라갔다. 마침내 한산(漢山)에 도착하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려고 하니, 10명의 신하가 말했다.

'오직 하남의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를 끼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그 천연의 요새와 이로운 땅은 또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 지금의 인천 지역)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慰禮城, 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동이며 풍납토성에서 백제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으니, 이때가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게 되자 위례성으로 돌아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도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후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 고쳤다. 그 조상의 계보가 고구려와 똑같이 부여에서 나왔다 하여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사비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군이다.(미추홀은 인주仁州며 위례성은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고전기古典記]를 살펴보면 이렇게 말했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前漢) 홍가 3년 계유년(기원전 18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년(기원전 5년)에 한산(漢山, 지금의 경기도 광주)으로 도읍을 옮기고 389년을 지나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함안(咸安) 원년(371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취하고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105년이 지나 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고 원휘(元徽, 유송劉宋 후폐제後廢帝 유욱劉昱의 연호로 473년에서 477년까지 사용했다.) 3년 을묘년(475년)에 이르러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겼고, 63년이 지나 26대 성왕에 이르러 소부리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이 지났으니, 당나라 현경 5년(660년)이었다. 이때는 의자왕이 즉위한 지 20년으로, 신라의 김유신과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여 평정시켰다.

 

백제국에는 옛날부터 다섯 부(部)가 있어 37군, 200여 성, 76만 호를 나누어 다스렸는데, 당나라에서 그 땅에 웅진, 마한, 동명(東明), 금련(金蓮), 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를 나누어 두고, 그 추장을 도독부 자사(都督府刺史)로 삼았다. 얼마 후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하여 웅(熊), 전(全), 무(武)의 세 개 주 및 여러 군현을 설치했다.

 

또 호암사(虎巖寺)에는 정사암(政事巖, 지금은 천정대天政臺라고 부른다.)이 있었다. 국가에서 장차 재상을 선출할 때 뽑힐 사람 서너 명의 이름을 적어서 상자에 넣고 바위 위에 둔다. 얼마 후 상자를 가져다 보고는 이름 위에 인(印)이 찍힌 흔적이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정사암이라 한 것이다.(이는 귀족 연합적인 삼국 시대의 정치 성격을 나타내는 실례로서 오늘날의 선거 방식과 비슷하여 주목할 만하다.)

 

사비하 가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이 바위에 앉아 물고기와 용을 낚았기 때문에 바위에 용이 꿇어앉았던 자취가 남아 있어서 용암(龍巖)이라 한다. 또 고을 안에는 일산(日山), 오산(吳山), 부산(浮山) 등 세 개의 산이 있었는데 나라가 흥성하던 시기에는 각기 신인(神人)이 있어 그 위에 살면서 서로 날아서 왕래하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비하 절벽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열 명이 앉을 정도로 컸다. 백제 와이 왕흥사(王興寺)에 행차하여 예불하려면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를 바라보며 절을 했는데, 그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이름을 온돌석(㷝石, 구들돌, 부여에서 보령 쪽으로 가다 보면 큰 다리를 지나 왼쪽에 있다.)이라 했다.

또 사비하 양쪽 절벽이 마치 병풍을 드리운 듯했는데, 백제 왕이 매일 유희하고 잔치를 베풀어 노래와 춤을 추었기 대문에 지금도 이곳을 대왕포(大王浦)라고 부른다. 또 시조인 온조는 바로 동명왕의 셋째 아들로서 몸집이 크고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또 다루왕(多婁王)은 너그럽고 후했으며 위엄과 인망이 있었다. 사비왕(沙沸王 혹은 사이왕沙伊王이라고도 한다.)은 구수왕(仇首王)이 죽자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보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즉시 폐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세웠다. 간혹 지락(至樂, 경초景初의 오기인데, 경초는 위魏나라 명제明帝 조예曺叡의 연호로 237년에서 239년까지 사용했다.) 3년 기미년(239년)에 사비왕이 죽어 고이왕이 즉위했다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함께 읽기: 북부여(北扶餘), 동부여(東扶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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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는데, 응소(應邵, 후한 여남汝南 사람으로 원소袁紹 밑에서 벼슬을 했고 고대의 예의, 풍속, 관직 등에 밝았다.)는 "옛날 조선국" 이라고 했다.

'신당서(新唐書)'의 주에 이렇게 말했다.

"평양성은 옛날 한(漢)나라의 낙랑군이다."

'국사(國史)'에 이렇게 말했다.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와서 투항했고,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에 고구려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을 정벌하여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帶方), 북대방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

또 무휼왕 27년에 광무제(光武帝)가 사신을 보내 낙랑을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예속되었다. 이상의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은 바로 평양성이어야 마땅하다. 어떤 사람들은 낙랑은 중두산(中頭山) 아래 말갈과의 경계고 살수는 지금의 대동강이라고 하는데, 어느 말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낙랑예관‘樂浪禮官」이 새겨진 수막새/ⓒ국립중앙박물관

 

또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이는 아마 옛날 한나라 때의 낙랑군 속현의 땅이었을 것이다."

신라 사람 역시 낙랑이라 불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지금 고려에서도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한다. 또 태조가 김부(金傅,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며 태조는 왕건王建을 말한다.)에게 딸을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공주라고 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1, 낙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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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43호 산수 봉화무늬 벽돌/국립중앙박물관]



충청남도 부여군 외리에서 출토된 7세기 백제 사비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총 8종류의 문양전 중 산수 산수문전은 2종류가 출토되었는데, 보물 343호  '산수 봉화무늬 벽돌'은 자연풍경을 소재로 하여 도식화된 산, 나무, 물, 바위, 구름이 잘 표현돼 있다.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의 안정된 구도와 산과 구름의 곡선적 표현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표현 기업에 원근법이 나타나는 등 백제 회화의 단면을 볼 수 있는 백제미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두 전돌이 기본적으로 자연풍경을 소재로 하고, 표현 기법 또한 유사하지만 상단의 봉황무늬와 구름의 표현 및 배치가 달라 각각 색다른 느낌을 준다.

처음 발견 당시 바닥에 깔린 상태였으며, 문양의 위와 아래가 엇갈린 채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후대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재배치한 것으로 보이며, 함께 발견된 8종류의 문양전과 함께 크기는 대체로 한 변이 29cm 정도이고, 두께가 4cm 내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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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57호, 무령왕비 금귀걸이/국립중앙박물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비 금귀걸이'는 6세기 백제시대 유물이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3)과 왕비의 무덤으로써 1971년에 처음 발굴이 진행되었는데, 벽돌로 만든 무덤에서는 금제관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국보 157호로 지정된 '무령왕비 금귀걸이'는 모두 네쌍이 출토되었으며, 머리쪽에서 출토된 두쌍은 중심고리, 중간장식, 끝장식 등을 갖추었고, 발치 쪽에 출토된 두쌍은 중심고리와 끝장식만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머리 쪽에서 출토된 것은 노는 고리에 2점의 귀걸이를 매달아 만들었는데, 길쭉한 귀걸이는 영략을 붙인 사슬모양 연결 금구에 현재의 총탄과 흡사한 모양의 끝장식을 매달았다.

짧은 귀걸이는 중간 장식으로 투작 반 구체를 덮어씌운 담녹색 유리구슬을 사용했으며, 사슬형 금구에 사익형의 끝장식을 연결했다.

한편 발치쪽에서 출토된 것은 왕비의 발치 북쪽에서 팔찌와 함께 출토되었는데, 그 크기는 아주 작으며, 중심 고리에 금실을 두 번 감은 다음 횡으로 두세 번 감아 마무리를 한 것이 특징이다.


전체 길이 11.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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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과 백제

남부여라고도 하며 곧 사비성이다.





 신라시조 혁거세가 자리에 오른지 19년 임오년에 변한( 卞韓)사람이 나라를 바쳐 투항했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

 '후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한은 남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진한은 동쪽에 있다."

 최치원이 말했다.

 "변한은 백제(百濟)다."

 '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다. 에 의하면, 온조가 일어난 것은 홍가( 鴻嘉)-서한 성제 유경의 연호다. 4년 갑진년(기원전 17년)이었으니, 혁거세나 동명왕의 세대보다 40여년 뒤의 일이 된다.

 '당서'에서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라고 말한 까닭은 온조왕의 계통이 동명왕에게서 나왔기 때문일 뿐이다. 간혹 어떤 사람이 낙랑 땅에서 나와 변한에 나라를 세워 마한 등과 대치한 적이 있었다고 한 것은 온조 이전에 있었던 일로, 도읍이 낙랑의 북쪽에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이는 구룡산(九龍山) 역시 변나산(卞那山)으로 불렀다는 이유로 함부로 고구려를 변한이라 하는데, 이는 아마도 잘못된 것이다. 마땅히 옛 현인(최치원)의 견해가 옳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땅에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한 것이다. 백제 전성기에 15만 2300호였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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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초기 여러나라의 성장과정/두산백과]


 마한(馬韓)

 '삼국지( 三國志) 위지(魏志)' 에서 이렇게 말했다.

 (삼국지 위지는 진(晉)나라 역사가 진수(陳壽)가 편찬한 위, 촉, 오 삼국의 정사 '삼국지' 중 위나라 부분으로 '위서(魏書)'가 정확한 말이다. 여기에 마한 50여 국의 이름이 있으며 백제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 왕 준(準)은 궁중 사람들과 측근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남쪽 한(韓)나라 땅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했다."

 견훤(甄萱)이 태조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나자, 이에 백제가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습니다.(금마산은 지금의 전북 익산에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요, 진한은 신라다.

 (삼국사기 본기에 이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는 그 뒤 갑신년에 일어났다고 했는데, 이것은 왕 준(準)을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왕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마한을 합병했음을 알 수 있고, 이 때문에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간혹 금마산을 마한으로 알고 백제라고 하는 것은 잘못되고 황당한 일이다. 고구려 땅에 본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사이(四夷)는 구이(九夷)와 구한(九韓), 예(穢), 맥(貊)이 있으니, '주례(周禮)에서 "직방씨(職方氏)가 사이와 구맥을 관장했다."라고 한 것은 동이족 즉 구이를 말한 것이다.(사이四夷는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을 일컫는다. 직방씨는 주나라 때의 관직명으로 천하의 지도와 토지에 관한 일을 했다.)

 '삼국사(三國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주(溟州)는 옛날 예국(國)이었는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印章)을 얻어 바쳤다."

 또 이렇게 말했다.(명주는 지금의 강릉이다.)

 "춘주(春州)는 옛날 우수주(牛首州)며 옛날의 맥국인데, 어떤 이는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라고 한다."(삭주는 지금의 평안북도 삭주군)

 '회남자(淮南子)'의 주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동방의 이(夷)는 아홉 종류나 있다."

 '논어정의(論語正義)' 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구이란 첫째 현도, 둘째 낙랑, 셋째 고려, 넷째, 만식(滿飾), 다섯째 부유(鳧臾), 여섯째 소가(素家), 일곱째 동도(東屠, 여덟째(倭), 아홉째 천비(天鄙)다."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 에서는 이렇게 말했다.(해동안홍기는 신라의 승려 안홍이 지은 책이다.)

 "구한이란 첫째 일본, 둘째 중화(中華), 셋째 오월(吳越), 넷째 탁라, 다섯째 응유(鷹遊), 여섯째 말갈(靺鞨), 일곱째 단국(丹國), 여덟째 여진(女眞), 아홉째 예맥(貊)이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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