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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천도 과정/ⓒ우리역사넷

 

부여군(扶餘郡)은 전백제의 수도인데, 혹은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백제 성왕(聖王, 백제 제26대  왕, 재위 523~554) 26년 무오년(538년) 봄에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했다.(그 지명은 소부리인데, 사비란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고 소부리란 부여의 별칭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제4에는 성왕 26년이 아닌 16년으로 되어 있다. 도읍을 사비로 옮긴 이유는 고구려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비좁은 웅진熊津보다는 넓은 평지에 기틀을 다지려는 의도로 보아야 한다.)

 

또 토지측량대장에는 이렇게 말했다.

"소부리군 농부의 주첩(柱貼, 농사 짓는 일꾼의 대장)이다."

 

그러므로 지금 부여군이라 말하는 것은 아주 옛날의 이름을 회복한 것이며 이는 백제 왕의 성이 부씨(扶氏)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혹은 여주(餘州)라고도 하는데 군의 서쪽 자복사(資福寺) 고좌(高座, 승려가 대중에게 설법할 때 앉는 대좌를 말한다.) 위에 수놓은 휘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말했다.

"통화(統和,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성종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의 연호로 983년에서 1012년까지 사용했다.) 15년 정유년(997년) 5월 어느 날 여주 공덕대사수장(功德大師繡帳)."

 

또 옛날 하남(河南)에서 임주자사(林州刺史)를 두었는데, 그때 지도책 안에 여주라는 두 글자가 있으니, 임주는 지금의 가림군(佳林郡)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백제지리지]에는 [후한서]의 말을 인용하여 "삼한은 모두 78국인데 백제는 그 가운데 한 나라다."라고 했고, [북사北史, 당나라 이연수李延壽가 지은 역사서로 위魏나라부터 수나라까지 역사를 기록했다.]에는 "백제의 동쪽 끝은 신라고 서남쪽은 큰 바다와 닿아 있으며, 북쪽 끝은 한강(漢江)인데 그 군(郡)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고 하며, 그 밖에 또 오방성(五方城)이 있다."라고 했다.

 

[통전通典]에는 "백제는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가 위치하고 서쪽으로 큰 바다와 경계해 있다."라고 했고, [구당서舊唐書]에는 "백제는 부여의 다른 종족으로 그 동북쪽은 신라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월주(越州)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왜(倭)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다. 그 왕이 거처하는 곳에는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이 있다."라고 했으며, [신당서新唐書]에는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고 남쪽은 왜인데 모두 바다 건너편이고, 북쪽은 고구려다."라고 했다.

 

[삼국사(삼국사기를 말한다.)] '본기本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북부영에서 난리를 피해 달아나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주(州)의 왕에게는 왕자가 없고 단지 세 딸만 있었다. 왕은 주몽이 비상한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부여 주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沸流)라고 하고 둘째는 온조(溫祚)라고 했다.

 

두 왕자가 후에 태자(太子, 주몽의 아들로 나중에 유리왕이 되었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烏干)과 마려(馬黎) 등 10여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니, 많은 백성들이 따라갔다. 마침내 한산(漢山)에 도착하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려고 하니, 10명의 신하가 말했다.

'오직 하남의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를 끼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그 천연의 요새와 이로운 땅은 또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 지금의 인천 지역)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慰禮城, 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동이며 풍납토성에서 백제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했으니, 이때가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게 되자 위례성으로 돌아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도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후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 고쳤다. 그 조상의 계보가 고구려와 똑같이 부여에서 나왔다 하여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사비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군이다.(미추홀은 인주仁州며 위례성은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고전기古典記]를 살펴보면 이렇게 말했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前漢) 홍가 3년 계유년(기원전 18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년(기원전 5년)에 한산(漢山, 지금의 경기도 광주)으로 도읍을 옮기고 389년을 지나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함안(咸安) 원년(371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취하고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105년이 지나 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고 원휘(元徽, 유송劉宋 후폐제後廢帝 유욱劉昱의 연호로 473년에서 477년까지 사용했다.) 3년 을묘년(475년)에 이르러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겼고, 63년이 지나 26대 성왕에 이르러 소부리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이 지났으니, 당나라 현경 5년(660년)이었다. 이때는 의자왕이 즉위한 지 20년으로, 신라의 김유신과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여 평정시켰다.

 

백제국에는 옛날부터 다섯 부(部)가 있어 37군, 200여 성, 76만 호를 나누어 다스렸는데, 당나라에서 그 땅에 웅진, 마한, 동명(東明), 금련(金蓮), 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를 나누어 두고, 그 추장을 도독부 자사(都督府刺史)로 삼았다. 얼마 후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하여 웅(熊), 전(全), 무(武)의 세 개 주 및 여러 군현을 설치했다.

 

또 호암사(虎巖寺)에는 정사암(政事巖, 지금은 천정대天政臺라고 부른다.)이 있었다. 국가에서 장차 재상을 선출할 때 뽑힐 사람 서너 명의 이름을 적어서 상자에 넣고 바위 위에 둔다. 얼마 후 상자를 가져다 보고는 이름 위에 인(印)이 찍힌 흔적이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정사암이라 한 것이다.(이는 귀족 연합적인 삼국 시대의 정치 성격을 나타내는 실례로서 오늘날의 선거 방식과 비슷하여 주목할 만하다.)

 

사비하 가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이 바위에 앉아 물고기와 용을 낚았기 때문에 바위에 용이 꿇어앉았던 자취가 남아 있어서 용암(龍巖)이라 한다. 또 고을 안에는 일산(日山), 오산(吳山), 부산(浮山) 등 세 개의 산이 있었는데 나라가 흥성하던 시기에는 각기 신인(神人)이 있어 그 위에 살면서 서로 날아서 왕래하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비하 절벽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열 명이 앉을 정도로 컸다. 백제 와이 왕흥사(王興寺)에 행차하여 예불하려면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를 바라보며 절을 했는데, 그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이름을 온돌석(㷝石, 구들돌, 부여에서 보령 쪽으로 가다 보면 큰 다리를 지나 왼쪽에 있다.)이라 했다.

또 사비하 양쪽 절벽이 마치 병풍을 드리운 듯했는데, 백제 왕이 매일 유희하고 잔치를 베풀어 노래와 춤을 추었기 대문에 지금도 이곳을 대왕포(大王浦)라고 부른다. 또 시조인 온조는 바로 동명왕의 셋째 아들로서 몸집이 크고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또 다루왕(多婁王)은 너그럽고 후했으며 위엄과 인망이 있었다. 사비왕(沙沸王 혹은 사이왕沙伊王이라고도 한다.)은 구수왕(仇首王)이 죽자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보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즉시 폐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세웠다. 간혹 지락(至樂, 경초景初의 오기인데, 경초는 위魏나라 명제明帝 조예曺叡의 연호로 237년에서 239년까지 사용했다.) 3년 기미년(239년)에 사비왕이 죽어 고이왕이 즉위했다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함께 읽기: 북부여(北扶餘), 동부여(東扶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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