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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나무위키

 

옛 책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제30대 무왕(武王, 재위 600~641, 이 무왕은 제30대 무왕이 아니라는 설이 있다. 이병도 박사는 무녕武寧의 동의이사同義異寫임을 모르고 쓴 것이라 하여 제25대 무녕왕을 말하는 듯하다고 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武王' 조에는 이름이 장璋이고 법왕法王의 아들이며 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홀로 수도 남쪽 못 가(南池, 부여군 동남리에 있으며 궁남지라고 한다. 여기서 무왕이 태어났다는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 속의 용과 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 이병도 박사는 "서동은 내가 아는 바로는 무왕의 아명이 아니라 훨씬 이전의 동성왕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서동이 마를 캐어 팔며 살았던 이유를 왕위 계승과 관련된 권력 투쟁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이며, 재주와 도량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항상 마(薯蕷)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라고 쓴다.)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신라의 수도로 가서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러고는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이재선 교수는 이 동요가 서동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백제에 퍼져 있던 구전 설화를 의도적으로 개작하여 경주 지역에 전파시킨 것이라고 보았다.)

 

善化公主主隱 他 密只 嫁良 置古

선화 공주님은 남몬래 짝지어 두고

薯童房乙 夜矣 卯乙 抱遣 去如

서동(薯童)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동요는 수도에 가득 퍼져 궁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백관들은 힘껏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게 했다. 공주가 떠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여비로 주었다. 공주가 유배지에 도착할 즈음, 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몰랐으나, 우연한 만남을 기뻐하며 그를 믿고 따라가 몰래 정을 통했다. 그런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징험을 믿게 되었다. 그러고는 함께 백제에 도착하여, 어머니가 준 금을 꺼내며 앞으로 살아갈 계책을 세우자고 했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물건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인데, 한평생의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서동이 말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이런 것이 흙덩이처럼 쌓여 있소."

공주가 이 말을 듣고는 매우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당신이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보물을 부모님의 궁궐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말했다.

"좋소."

그래서 금을 모았는데, 마치 구릉처럼 쌓였으므로 용화산(龍華山, 지금의 익산 미륵산)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있는 곳으로 가서 금을 운반할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말했다.

"내가 신통력으로 옮겨 줄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의 궁궐에다 금을 날라다 놓았다.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하게 여겨 서동을 더욱 존경했고, 항상 글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 일로 인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도착했는데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속에서 나와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했다. 왕비가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제 간곡한 소원입니다."

 

왕이 절을 세우는 일을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 메우는 일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미륵법상(彌勒法像) 세 개와 회전(回殿)과 탑(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미륵사 터가 있는데 4미터 높이의 당간지주가 남아 있어 그 규모를 유추할 수 있다. 미륵사의 창건은 백제 불교가 미륵신앙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국사>에는 왕흥사라고 했다.)라고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들을 보내 돕게 했는데, 지금까지 그 절이 남아 있다.(<삼국사>에 "이는 법왕의 아들이다."라고 했는데 이 전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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