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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삼형제/ⓒ울산매일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축복할 만한 일이며 온 가족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엄격하기 짝이 없던 유학자들도 아이, 그중에서도 특히 손자가 탄생했을 때에는 체면과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기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러한 사실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1796년 3월에 쓴 다음과 같은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초사흘에 관가의 하인이 돌아오면서 기쁜 소식을 가져왔더구나. "응애응애" 하는 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다. 인간의 즐거운 일이 이것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게다. 육순의 늙은이가 이제부터 엿을 물고 구슬을 희롱할 뿐 달리 무엇을 구하겠느냐?...

오늘이 바로 내 손자의 삼칠일이로구나. 이백여 명의 관속(官屬)들에게 아침에 국과 밥을 먹였더니 좋아하며 떠들썩하게 축하해 주더구나. 그제서야 나도 경술년에 순조(純祖) 임금께서 막 태어나셨을 때 산해진미로 기쁨에 넘쳐 즐거워하면서 억조창생을 고무케 하시던 성심(聖心)을 가늠하겠더라. 다 쓰지 못한다.


아이의 탄생을 전하는 편지를 읽고서 박지원이 "응애응애" 하고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편지에 가득하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가 아이의 탄생을 얼마만큼 기다려 왔고, 또 그것을 어느 정도 기뻐하고 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박지원은 얼마나 기뻤던지, 아이가 태어나 21일째 되던 삼칠일에 200여 명이나 되는 관속들에게 밥을 먹이고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박지원과 같이 아이의 탄생을 크게 축하해야 하는 경사로 여겼기 때문에 갓 태어난 손자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재산을 분배하는 일도 허다하였다.


?... 장손에게 명문(明文)을 성급(成給)해 주는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오늘은 네가 태어난 지 7일이 되어 너를 대립(大立)이라 이름 지으니 종사(宗祀)가 이로부터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에 내가 매우 기쁠 뿐만 아니라 이는 가문의 적지 않은 경사이다.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전래된 사내종 권막(權莫)의 다섯째 소생 계집종 끝지와 온계(溫溪) 집 앞 우물가의 밭[井田] 10마지기를 영영 별급(別給)한다. ...


위 문서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이황(李滉, 1501~1570)이 1559년 6월에 그의 맏조카 이완(李完)이 아들을 낳자 7일 만에 재산을 분배하면서 작성해 준 것이다. 이호아은 손자가 태어난 일이 가문의 경사라고 말하면서 손수 이름을 '대립'이라 지어주고, 말 그대로 문전옥답인 집 앞 우물가의 밭과 이를 경작할 수 있는 계집종을 특별히 분배해 주고 있다.

온 가족의 관심은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고 축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이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성장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박지원이 위의 손자를 얻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60세로, 경상도 안의현감에 재임 중이었다. 그는 마음 같아서는 곧장 서울로 달려가서 손자를 안아 보고 싶었을 것이나 그럴 수가 없었다. 관찰사나 국와의 허락 없이 임지(臨地)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자가 어떻게 생겼을지 더욱 궁금해지고, 또 누구를 닮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집으로부터 아이의 소식이 담긴 편지가 어서 오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나 오는 편지에는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잔뜩 화가 난 박지원은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손자의 용모에 대해 직접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다.


네 첫 번째 편지에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미목(眉目)이 밝고 수려하다 하고, 두 번째 편지에서는 점점 충실해져서 그 사람 꼴을 갖춤이 자못 초초(艸艸)하지 않다고 하더니, 종간(宗侃)의 편지에도 골상이 비범하다고 했더구나. 대저 이마는 넓고 솟았으며, 정수리는 평평하고 둥근지, 어째서 하나하나 적어 보이지 않는 게냐? 답답하구나.


박지원은 아이를 키우는 데 대해서도 일일이 관심을 기울이고 지시하였다. 어느 아이든지 조금 자라서 걸어다니게 되면 그때부터 말썽꾸러기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비록 어리지만 이때에 기본적인 성격이 형성되기 때문에 누가 어떻게 돌보느냐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차례 제사에 날씨가 아직 더워 방구들이 찌는 듯하니, 아이들도 조양(調養)하기가 몹시 어려운데, 하물며 모든 게 입에 들어갈 물건임에야 어떻겠느냐? 반드시 모름지기 경고(京橋)의 어린 계집종을 빌려 정성껏 바깥채에서 돌보게 하고, 안채 쪽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귀봉(貴奉)이의 술주정은 요즘은 심하지 않으냐? 그 사람은 술만 취하면 망령된 사람이다. 절대로 아이를 안게 해서는 안 된다.


날씨가 더운데다가 제사를 지내느라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 안이 찌는 듯할 것이니 아이를 기르는데 유의해야 하며, 또 모든 물건을 입에 넣을 나이이므로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기를 당부하고 있다. 또 계집종을 빌려 바깥채에서 아이를 돌보게 하고 안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며, 술주정이 심한 귀봉이에게 아이를 안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소한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박지원의 모습을 통하여 조선시대 양반들이 후손의 성장과 교육에 얼마나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생후 1년을 무사히 넘기면 돌잔치를 크게 열었다. 이때 온 가족이 모여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돌이 된 것을 축하하고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를 점치기도 하였다. '돌잡이'가 그것인데, 돌상 앞에 필묵, 옥환(玉環), 인장 등을 늘어놓고 아이가 무엇을 잡는지를 보아 장래 어떠한 인물이 될 것인가를 판단하였다. 아이가 필묵을 잡으면 문인이 되어 문명을 널리 떨칠 것이고, 옥환을 집으면 덕성을 갖춘 인물로 성장할 것이며, 인장을 만지면 관리가 되어 이름을 날릴 것이라 전망하였다. 아이가 무엇을 잡든지 아이에 대한 가족들의 기대가 반영된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김홍도, 초도호연(初度弧宴)/ⓒ국립중앙박물관

색동옷을 입은 아이가 돌잡이를 하는 모습 


조선시대에는 돌잔치에서 책을 써 주는 풍속이 있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아이가 덕성을 갖춘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정성을 담아 아들이나 손자에게 손수 책을 필사해 주었다. 또 돌잔치에 초대된 유명한 하객에게 한두 글자씩을 써 달라고 부탁해서 '천자문'을 제작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돌잔치는 한 아이가 태어나서 무사히 한 해를 넘긴 것을 축하하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이 아이와 유명한 하객이 일종의 연망(聯網)을 맺는 자리였는데, 이때 하객들이 한 글자씩 써서 만들어 준 '천자문'이 바로 그 증표였던 것이다.

실제로 아이에게 '효경(孝經)'이나 '동몽선습(童蒙先習)'과 같은 책을 제작해 주는 사례를 충청도 서산에 세거했던 경주김씨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김노응(金魯應), 1757~1824)은 아들 김도희(金道喜)가 1784년에 돌을 맞이하자 인륜에 밝은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직접 

'효경'을 써 주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아들 김도희가 이제는 아버지가 되어서 자신의 아들 김상준(金商濬)이 돌을 맞이하자 어린 나이부터 오륜을 엄중히 체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몽선습'을 써 주었다. 이는 그가 이 책의 끝에 쓴 다음과 같은 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내아이가 태어난 날에 책을 써서 내려 주는 것은 동방의 풍속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제 삼복더위를 당하여 '동몽선습' 한 책을 땀 흘려 가며 쓰노니, 네 아버지의 애태우는 마음을 생각하고 오륜(五倫)이 가장 엄중함을 체득하고 끊임없이 전진하여 그치지 말며 쉼 없이 부지런하여 더함이 있도록 하라.


돌에 별급문서를 작성해 주는 경우도 많았다. 전라도 부안현에 세거하던 부안김씨 김명열(金命說, 1613~?)은 60세가 다 되도록 친손자를 얻지 못하자 자손이 끊어질까 근심하였다. 그러던 중 둘째 아들 김문(金璊)이 마침 사내아이를 낳으니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어느덧 한 해를 무사히 넘겨 돌을 맞이하자 기뻐서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돌을 맞은 손자에게 써 준 아래의 별급문서에 자세히 쓰여 있다.


나이가 육십이 되었는데도 친손자를 얻지 못하여 슬하가 무료할 뿐만 아니라 후사가 끊어지지 않을까 항상 크게 근심하여 왔다. 막내아들 문(璊)이 비로소 아들을 낳아 이름을 수종(壽宗)이라 하였다. 태어난지 겨우 한 돌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눈썹이 뚜렷한데다 살결이 백옥(白玉)과 눈처럼 뽀얘서 사랑스러우며 용모가 준수하여 장차 크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만일 맏아들 번(璠)이 끝내 자식을 낳지 못하면 당연히 봉사손(奉祀孫)이 될 것이니 그 경사스럽고 다행함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 경사나 즐거움이 있을 때 특별히 재산을 분배하는 것은 관례이다. 다행히 이와 같이 손자를 얻었으니 어찌 별급이 없을 수 있겠는가.


'김수종 별급문기'

전라도 부안에 살던 김명열이 1672년에 손자 김수종의 돌을 맞이하여 약간의 재산을 나누어 주고서 작성한 문서이다. 손자를 얻은 기쁨이 절절히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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