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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남구만 초상은 네 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네 본 모두 생김새와 양식이 같다. 보물 1484호 남구만 초상 외에 남구만이 영의정 재직 시절에 모사한 영정이 현재 경기도 용인시 파담마을에 있는 사당에 남아있다.


남구만( 南九萬, 1629~1711, 조선시대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또는 미재(美齋), 조선 개국공신 재(在)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식(烒)이고, 아버지는 현령 일성(一星), 어머니는 권박(權瞨)의 딸이다.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51년(효종 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헤 가주서, 전적, 사서, 문학을 거쳐 이듬해에 정언이 되었다.

1659년 홍문록에 오르고 곧바로 교리에 임명되었다.

1684년에는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으며, 1694년 갑술옥사 때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어, 1696년 중추부영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 장씨의 처벌에 대해 경형을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퇴관, 경사(經史), 문장을 일삼았다.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으며,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그의 작품 유명하다. 문집에는 '약천집(藥泉集)'이 있다.


보물 1484호 남구만 초상은 관복을 입고 앉아 있는 전신좌성으로, 사모에 서대를 착용하고 쌍학문 흉배를 부착한 현록색 단령을 입고 정면을 향해 앉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조선시대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모는 높아지고 폭은 약간 좁아졌으며 18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구름과 학이 포함되어 있다.

얼굴 살결은 이전에 비해 붓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 특징을 보이며, 중국초상화의 형식 요소들을 받아들인 것들도 엿볼 수 있는데, 정면관, 표피 깔린 교의 족좌대 위의 팔자형 신발 등이 바로 그것으로 지적된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이렇게 정면관을 취한 초상화가 나타나는데,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다시 칠, 팔분면으로 제작이 된다.

정면으로 그려진 이 초상화는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얼굴을 윤관선이 거의 없는 듯이 보여 몰골기법에 가가우며, 얼굴 전체적으로 미묘한 선염을 구사하며 높낮이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그리기 가장 어려운 정면상을 소화할 정도로 초상화 기법이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점이기도 하다.

그림의 크기는 전체 224cm X 107cm, 그림 162.1 X 87.9c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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