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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는데, 응소(應邵, 후한 여남汝南 사람으로 원소袁紹 밑에서 벼슬을 했고 고대의 예의, 풍속, 관직 등에 밝았다.)는 "옛날 조선국" 이라고 했다.

'신당서(新唐書)'의 주에 이렇게 말했다.

"평양성은 옛날 한(漢)나라의 낙랑군이다."

'국사(國史)'에 이렇게 말했다.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와서 투항했고,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에 고구려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을 정벌하여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帶方), 북대방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

또 무휼왕 27년에 광무제(光武帝)가 사신을 보내 낙랑을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예속되었다. 이상의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은 바로 평양성이어야 마땅하다. 어떤 사람들은 낙랑은 중두산(中頭山) 아래 말갈과의 경계고 살수는 지금의 대동강이라고 하는데, 어느 말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낙랑예관‘樂浪禮官」이 새겨진 수막새/ⓒ국립중앙박물관

 

또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이는 아마 옛날 한나라 때의 낙랑군 속현의 땅이었을 것이다."

신라 사람 역시 낙랑이라 불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지금 고려에서도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한다. 또 태조가 김부(金傅,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며 태조는 왕건王建을 말한다.)에게 딸을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공주라고 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1, 낙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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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과 백제

남부여라고도 하며 곧 사비성이다.





 신라시조 혁거세가 자리에 오른지 19년 임오년에 변한( 卞韓)사람이 나라를 바쳐 투항했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

 '후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한은 남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진한은 동쪽에 있다."

 최치원이 말했다.

 "변한은 백제(百濟)다."

 '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다. 에 의하면, 온조가 일어난 것은 홍가( 鴻嘉)-서한 성제 유경의 연호다. 4년 갑진년(기원전 17년)이었으니, 혁거세나 동명왕의 세대보다 40여년 뒤의 일이 된다.

 '당서'에서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라고 말한 까닭은 온조왕의 계통이 동명왕에게서 나왔기 때문일 뿐이다. 간혹 어떤 사람이 낙랑 땅에서 나와 변한에 나라를 세워 마한 등과 대치한 적이 있었다고 한 것은 온조 이전에 있었던 일로, 도읍이 낙랑의 북쪽에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이는 구룡산(九龍山) 역시 변나산(卞那山)으로 불렀다는 이유로 함부로 고구려를 변한이라 하는데, 이는 아마도 잘못된 것이다. 마땅히 옛 현인(최치원)의 견해가 옳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땅에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한 것이다. 백제 전성기에 15만 2300호였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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