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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당의 모습/ⓒ한국전통서당문화진흥회

서당은 서원과는 달리 관으로부터 설립허가를 얻어야 하는 기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백범일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설치가 자유로웠다.

집안이 가난하여 좋은 선생을 찾아가 배울 형편이 못되자 아버님이 무척 걱정을 하셨다. 그러던 중 마침 글공부할 길이 하나 열렸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쪽으로 십 리쯤 되는 학명동(鶴鳴洞)에 정문재(鄭文哉)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이지만 과거하는 글로는 지방에서 알아주는 선비였고, 더구나 큰어머니와는 6촌 남매간이었다. -중략- 그의 집에는 여러 곳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시와 부(賦, 작자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한문문체)를 짓고, 한쪽에는 서당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백범일지 中-

수요자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자유롭게, 다양한 수준의 서당을 설립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으나, 설립주체나 운영방식에 따라 구분하면 대략 다음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훈장 자영(自營) 서당'으로, 훈장이 소일거리나 생계 유지를 위해 자신의 집에 개설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서원은 대부분 이른바 '촉학구(村學究)' 도는 '궁생원(窮生員)'이라 불리는 시골의 선비들이 설립하였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빈한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학동들로부터 일종의 수업료인 학채를 쌀이나 나락, 또는 곡물이나 돈으로 받았다. 이들은 학동을 가르치는 일이 없을 때에는 마을사람들의 소장(訴狀)이나 편지를 대신 써 주고 그 대가를 받아 생활하기도 했다.

 

둘째, '유지 독영(獨營) 서당'으로, 유지나 부자가 자신의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해 훈장을 초빙하고 그에 다른 경비 일체를 부담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자제 교육을 위해 많은 경비를 들이면서 '독선생'을 초청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훈장의 학식이나 교육경력이 출중했다. 흔하지는 않지만 이때 제한적으로 서당을 개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일가친척이나 인근의 자제들에게는 '어깨너머 공부' 혹은 '동냥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서당 운영 경비를 유지나 부자 혼자서 감당하지 못할 경우에는 서너 명이 협동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는 유지 독영 서당의 한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마을 공영(共營) 서당'으로, 마을 전체의 구성원이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서당을 설립하고 훈장을 초빙하는 형태이다. 서당 운영을 위해 학계를 조직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학전을 구입하여 여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서당을 운영하였다. 마을에 동계(洞契)가 조직되어 잇을 경우, 굳이 학계를 조직하지 않고 동계에서 직접 서당 운영을 담당하기도 했다. 훈장을 초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마을의 원로 중에 학식이 높은 인물이 있을 경우에는 그를 선정하기도 했다. 마을에 거주하는 호수(戶數)가 많지 않거나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할 경우에는 인근의 서너 마을과 합동하여 서당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마을 공영 서당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문중 공영 서당'으로, 문중이 주도하여 서당을 운영하는 형태이다. 따라서 서다으이 학동은 문중의 자제들로만 구성되었으며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모두 문중에서 지출하였다. 조선 후기에 문중이 크게 번성하면서 이러한 형태의 서당이 성행하였다. 훈장은 위의 '마을 공영 서당'처럼 대부분 외부에서 초빙하였으나 문중 구성원 중 학식이 뛰어난 원로가 있을 경우에는 그를 추대해서 학동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아들이나 조카 및 손자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서당도 있으나, 이러한 경우 대부분 친척의 자제들도 함께 배웠기 때문에 이는 '문중 공영 서당'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다섯째, '관립(官立) 서당'으로, 관의 자원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형태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학교를 진흥시키는 것(興學校)'은 수령이 관심을 쏟아야 할 7가지 업무(守令七事) 중 하나였는데, 조선 후기의 수령 중에는 백성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인물이 많았다. 이들은 향교와 서원뿐만 아니라 서당에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서당은 수령이 교체된 후 후임수령이 이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면 곧바로 운영이 어려워져 폐쇄되고 말았다. 향촌의 사족과 수령이 함께 설립한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의 서당도 있었으나 이는 '관립 서당'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학문에 뜻을 둔 몇 명의 선비들이 모여 독서와 강학 및 토론의 공간으로 서당을 설립하는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인(門人) 송흥주(宋興周), 최명룡(崔命龍) 등이 황산(黃山)에 서당 몇 칸을 지어 강학하는 장소로 삼았던 것이라든지, 정온(鄭蘊, 1569~1641)의 아버지인 정유명(鄭惟明)이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역천서당(嶧川書堂)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는 곳으로 삼았던 것 등이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서당은 초등교육을 위해 만들었다기보다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학자들이 강학공간으로 마련한 것이었기 때문에 위의 구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조선시대 서당의 모습/ⓒ국가기록원

다음으로 서당의 구성에 대해 살펴보면, 서당의 인적 구성은 훈장과 접장(接長) 및 학동으로 이루어진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매우 다양한 서당이 존재했기 때문에 훈장의 학문 수준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훈장의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경(經) 사(史) 자(子) 집(集)에 두루 통달한 훈장은 거의 드물었으며, 언해(諺解)를 보고서 경전의 대강의 뜻을 겨우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훈자으이 출신신분도 다양하여 몰락한 양반과 평민 출신의 유랑 직식인이 대부분이었고, 심지어는 도망노비 출신도 종종 있었다. 따라서 훈장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었으며, 경우에 다라서는 멸시나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훈장의 대우에 대해서는 다음의 탄원서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해볼 수 있다. 탄원서는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내산내면 저동리에 사는 박영식(朴永植)과 한인교(韓仁敎) 등이 1884년에 수령에게 제출한 것이다.

사인(士人) 김양렬(金養烈)은 나이가 50세로 아내를 잃고 홀아비로 살면서 어린 아들을 거느린 채 사방을 떠돌아다니면서 글을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금년 봄에 그를 우리 마을로 초청해서 일 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 대가로 받은 곡식(舌耕)은 겨우 나락 5가마에 불과했는데 그는 이를 잘 아는 제자의 집에 유치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번 봉고(封庫, 지방관의 비위 사실을 확인한 뒤 창고를 봉하는 제도)할 때 감관(監官)과 색리(色吏)가 관의 명령을 받고 집집마다 수색하다가 이 나락 5가마를 발견하고서 압류하여 봉고하고서 읍내로 가버렸습니다. 이는 전무후무한 일대 변괴입니다. 홍산(鴻山)이 비록 땅이 좁고 가난한 고을이라고 하지만 어찌 꼭 가난한 선비의 양식을 압류해야 만족하겠습니까? -중략-
진대(賑貸, 관곡을 어려운 백성에게 꾸어주던 것)를 받아야 할 이때에 오히려 글을 가르치고 받은 나락 5가마를 빼앗아 봉고하니, 저 슬프고 가난한 선비가 굶주림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략- 저희들은 그 사람에게 아이들의 교육을 부탁했기에 차마 그가 굶주림 때문에 떠돌이생활을 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절박한 사연을 수령님께 사실대로 하소연하니 봉고한 나락 5가마를 즉시 지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영식 등은 자신의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양반 출신의 김양렬을 훈장으로 맞아들였다. 그는 50세의 홀아비로 자식까지 딸려 있었으나 먹고살기 위해 훈장 노릇을 하느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가 일 년 내내 학동을 가르치고 받은 대가는 겨우 나락 5가마였는데, 그것조차도 별감과 색리의 착오로 관에 몰수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부모인 박영식 등이 수령에게 타원서를 제출하여 몰수된 나락 5가마를 훈장에게 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위 탄원서에 훈장노릇을 하는 것을 설경(舌耕), 즉 '혀로 밭을 간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훈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남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행위를 수치로 여겼다. 돈을 받고 남을 가르친다는 것을 글을 파는 행위, 즉 천(賤)하기 짝이 없는 상업행위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농업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혀로 밭은 간다'고 표현했으며, 수업료인 '학채'나 '강미(講米)'도 '폐백(幣帛)'이라 칭했던 것이다.

 

훈장에 대한 인식이나 대우가 이와 같았기 대문에 자연히 훈장에 취임하는 인물의 학식이나 인품이 탁월할 수 없었다. 그저 그런 인물들이 훈장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학동들의 눈에도 훈장이 훌륭해 보이지 않았다. 김구는 어린 시절 그를 가르쳤던 훈장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열네 살이 되고 보니 만나는 선생이 대개 고루해서 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아무개 선생은 '벼 열 섬짜리', 아무개 선생은 '다섯 섬짜리' 하고 수강료가 많고 적은 것으로 선생의 할격을 짐작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선생들의 마음 씀씀이나 처신이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어 보였다.

훈장 아래에는 오늘날의 조교 또는 보조교사의 역할을 하는 접장이 있었다. 물론 모든 서당에 접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규모가 큰 서다으이 경우, 훈장 한 사람이 많은 학동의 교육을 모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제자 가운데 우수한 자를 접장으로 선발하여 초보 학동의 지도를 맡겼던 것이다. 접장은 학동들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과제를 해 오지 않았을 경우에 훈장을 대신해서 이들을 체벌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따라서 접장은 한편으로는 훈장으로부터 수업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초보 학동의 지도를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접장에게는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대신 수업료가 면제되었다. 이들은 초보 학동들에게 선생님이자 동문 사형(師兄)이었기 대문에 초보 학동에게 미치는 영향이 훈장보다 큰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서당의 모습/ⓒ국가기록원

학동들의 연령층이나 계층은 매우 상이하였다. 일반적으로 양반 서당에는 양반 자제만이 출입하였으며 평민 서당에는 평민 자제만 입학하였다. 평민이 양반 서당에 다닐 경우, 양반층 자제의 텃세에 견디기 힘들었다는 사실 또한 <백범일지>에 잘 나타나 있다. 양반 자제는 평민 서당에 출입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자신들의 체모가 손상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서당에 출입하는 학동들의 연령은 매우 다양하나 7~8세에 입학하여 15~16세에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선비였던 구상덕(仇相德, 1706~1761)이 농사와 농촌에서의 일상생활을 37년간 빠짐 없이 기록한 일기책인 <승총명록>을 살펴보면 '생원'이라 불리던 중장년도 서당에 출입하였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을 들은 뒤로 글 공부할 마음이 간절했다. 아버지께 서당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버님은 주저하셨다. 우리 동네에는 서당이 없어서 다른 동네 서당에 다녀야만 하는데, 양반의 서당에서는 나 같은 상놈은 잘 받아 주지도 않거니와, 설혹 받아 준다고 해도 양반의 자식들이 업신여길 터이니 그 꼴은 차마 못보겠다는 것이다.
-백범일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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