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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7대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문화컨텐츠닷컴

제27대 덕만(德曼/德萬)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불법의 수입에 남달랐으며 경주 남산 신유림에 능이 있다.)이고, 성은 김씨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貞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 사용했으며 치세로 유명하여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말이 있다) 6년 임진년(632년)에 즉위하여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세 가지 일을 미리 알았다.

첫째는,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씨앗 세 되를 보내 왔다(신라의 삼국 통일에 기여한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보여 주는 예다). 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했다.

"이 꽃은 정녕코 향기가 없을 것이다."

명을 내려 씨를 뜰에 심도록 했더니 그 꽃이 피었다가 질 때까지 과연 그 말과 다름이 없었다(모란꽃이 향기가 없다는 말은 수사적 비유다).

둘째는, 영묘사(靈妙寺, 선덕여왕 즉위 원년인 632년에 세워진 절로 찰간지주刹竿支柱만 남아 있다.) 옥문지(玉門池)에서 한겨울에 수많은 개구리들이 모여 사나흘 동안 울어 댔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정예 병사 2000명을 이끌고 서둘러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 여인의 생식기 모양이라는 뜻으로 경주에서 대구로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건산과 아화 사이에 있다.)을 물어보면 그곳에 틀림없이 적병이 있을 테니 습격하여 죽이라고 말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나서 각기 1000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서 물었더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00명이 그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그들을 에워싸서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亏召)는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는데, 포위하여 활을 쏘아 죽였다. 백제 후원병이 1200여 명이 왔지만 역시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죽였다.

 

경주 여근곡/ⓒ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셋째는, 왕이 병도 없을 때인데 모든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이 되면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불가에서 말하는 욕계육천欲界六天의 둘째 하늘이다.) 가운데 장사 지내라."

신하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물었다.

"어디입니까?"

왕이 말했다.

"낭산(狼山, 높이가 몇십 미터에 불과한 나지막한 언덕이다. 사천왕사 터와 가까이 있다.)의 남쪽이다."

과연 그달 그날에 이르러 왕이 죽었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 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지금의 경주시 배반동에서 불국사로 가다 보면 나오는데 터만 남아 있다.)를 지었다. 불경에 말했다.

"사천왕천(四天王天, 육계육천의 하나로서, 동방은 지국천持國天, 서방은 광목천廣目天, 남방은 증장천增長天, 북방은 다문천多聞天이라 한다.) 위에 도리천이 있다."

이에 대왕이 신령스럽고 성스러웠음을 알게 되었다.

왕이 살아 있을 당시 신하들이 왕에게 말했다.

"모란꽃과 개구리의 두 가지 일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왕이 말했다.

"꽃 그림에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는 것을 알았다. 이는 당나라 황제가 배필이 없는 나를 놀린 것이다. 개구리의 성난 모습은 군사의 형상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인의 음부로서 여인은 음이 되며 그 색깔이 흰데, 흰색은 서쪽을 나타내기 때문에(이러한 해석은 그 당시 신라에 음양오행설이 보편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았다.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된다. 다라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안 것이다."

신하들은 모두 여왕의 그 성스러운 지혜에 감탄했다.

세 가지 색의 꽃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인가? 세 여왕은 선덕(善德), 진덕(眞德), 진성(眞聖)이니 당나라 황제의 놀라운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세운 것에 관해서는 '양지사전(良志師傳)에 모두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는 이 선덕여왕 시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경주시 인왕동에 있으며 반월성에서 바라보인다. 첨성대는 평지에 세워져 있어 실제 관측에는 부적당한 구조물이고 선덕여왕 시절에 천문 관측 기록이 없다는 점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를 쌓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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