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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문헌에 김치 제조법이 대강이나마 처음 기록된 것은 고려 후기에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은 '가포육영(家圃六詠)'이라는 시이다. 이규보는 여기서 순무를 여름 석 달 동안에는 장에 절여 먹고, 겨울 석 달 동안은 소금에 절여 먹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채소를 장이나 소금에 절여 발효시켜서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치를 소금에 절여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김치의 종류와 재료, 제조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요리서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으로는 15세기 중엽에 국왕의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가 쓴 '산가요록(山家要錄)'이 처음이다.


오이지/© 깊은나무-다음백과


'산가요록'에는 여러 종류의 김치가 소개되어 있다. 순무김치[청침채(菁沈菜)], 오이김치[과저(瓜菹)], 가지김치[가자저(茄子菹)], 파김치[생총침채(生蔥沈菜)]는 물론이고 토란김치[우침채(芋沈菜)], 고사리김치[침궐(沈蕨)], 마늘김치[침산(沈蒜)] 등 여러 가지 김치 담그는 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여름에 속성으로 만들어 먹는 물김치[즙저(汁菹)], 겨울에 무를 이용한 동치미[동침(凍沈)]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15세기의 김치는 지금의 김치와 사뭇 달랐다. 우선 김치의 재료를 살펴보면, 지금은 김치의 가장 일반적인 주재료인 배추가 당시에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농서(農書)나 요리서에서 채소 재배법이나 요리법을 소개할 때에도 배추는 오이, 무, 가지, 동아(冬瓜) 등에 비해 아주 소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고문헌에서 배추는 '숑(숭(崧)]', '숑채[숭채(崧菜)]' 또는 '배채[백채(白菜)]'로 기록되었는데, 16세기의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도 '숭저(崧菹)'가 보이고 '산가요록'에도 '배추김치 담그기'라는 뜻의 '침백채(沈白菜)'가 보이지만 단 한 번 등장 할 뿐이다. 이처럼 김치의 주재료로는 배추보다 오이, 가지, 순무, 동아, 파 등의 채소가 널리 쓰였다.


배추의 품종이 꾼준히 개량되어 제대로 결구가 된 품종이 생산되어 김치 재료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쯤으로 짐작된다. 1800년경에 간행된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 오늘날의 배추김치와 같은 통배추김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과 추위에 강하면서도 맛과 질감이 좋은 배추가 만들어져 본격적으로 김치의 주재료로 쓰이게 된 것은 20세기에 우장춘이 개발한 원예 1호, 원예 2호 배추부터였다.


순무/ⓒ위키백과


그리고 무도 지금과 같은 무가 아니라 순무 종류가 더 많이 쓰였다. 지금의 무는 '댓무'라고 하여 나복(蘿葍)이라고 썼다. 그러므로 나박김치라는 말은 본래는 무김치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댓나무보다는 청(菁)이라고 쓰는 '쉿무', 즉 순무가 더 많이 쓰였고, 기록에도 나복보다는 청이 훨씬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통상 김치라 하면 채소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것을 연상하지만, '산가요록'에는 과일도 김치의 주재료가 되고 있다. 즉 수박, 복숭아, 살구 등의 과일이 김채재료로 쓰인 것이다. 사실 과일과 채소는 식물학의 분류방법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즉 과학이 아니라 문화적인 분류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파파야를 익지 않아 파란 상태에서는 채소로 먹고, 노랗게 익으면 과일로 먹는다. 우리도 토마토를 굳이 채소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토마토는 과일일 뿐이다. 서양사람들은 토마토를 스파게티나 햄버거, 샌드위치의 재료로 쓰니까 채소라고 하지만, 우리는 토마토를 과일로 먹지 조리 재료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15세기의 우리 조상들은 수박, 복숭아, 살구를 채소로도 썼던 것이다. 이때의 김치는 반찬으로 과일을 조리하기 위한 것으로도 쓰였지만, 과일을 오래 저장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전기의 김치에 대한 기록에는 젓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젓갈이 김치에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그전에도 젓갈이 전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5세기 세종 때에 기록에 어린 오이에 곤쟁이젓[자하해(紫蝦醢)]을 넣은 오이김치가 보이고,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쓴 '어우야담(於于野譚)'이라는 책에서도 곤쟁이젓으로 담근 오이김치를 세상에서 '감동(感動)'이라고 부른다고 소개하고 있다. 흔치는 않지만 김치에 젓갈을 넣은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가요록'에는 곡물을 넣어 발효시킨 김치가 보인다. 여름에 물김치를 담글 때에 날콩이나 기울을 찧어 만든 덩어리를 가루를 내어 쓰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특별한 김치 외에는 거의 모든 김치에 고춧가루가 쓰이지만 이때는 양념 중에 고춧가루가 없다. 고추는 17세기에 도임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던 김치가 18세기에 접어들어 고춧가루가 양념으로 쓰이고 젓갈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19세기에 배추김치가 크게 확산되면서 다른 나라의 김치와 다른 독특한 김치가 만들어졌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정승모,정연식,전경목,송찬섭]


[함께보기: 초기 김치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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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발효음식, 김치! 우리나라 식탁이라면 빠질 수 없는 김치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어디에 어떻게 남아 있을까? 역사속 김치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김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다. 삼국지 위서 30권에 동이전(東夷傳) 중 고구려 편에 나타나는데-삼국지 위서 동이전(東夷傳)은 비록 중국측의 기록이지만 고대사 기록이 대부분 소실된 우리민족의 고대사를 연구할 때 귀중한 사료 중 하나로써 동이(東夷) 즉,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왜 등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내용을 보면 "고구려인은 술 빚기,장 담그기, 젓갈 등의 발효음식을 매우 잘한다" 고 기록돼 있다. 이는 이미 이 시기에 저장발효식품이 보편화 되고 생활화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이 언제부터 김치를 만들어 먹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김치를 주로 '저(菹)'로 표기했으며 그밖에도 여러가지 한자어가 사용되었다. 침채(沈菜), 염채(鹽菜), 함채(鹹菜), 엄채(醃菜), 저채( 菹菜), 침저(沈菹), 침지(沈漬) 등이 그것이다.

 김치를 뜻하는 낱말이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은 10세기 고려시대이다. 즉 983년(성종 2년)에 환구(圜丘)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에 차려 놓는 음식 가운데 미나리김치[근저(芹菹)], 죽순김치[순저(筍菹)], 순무김치[청저(菁菹)], 부추김치[구저(韭菹)] 등이 보이는데, 이것들이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으로 분명히 보이는 김치이다.

 하지만 10세기에 처음으로 김치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10세기 전에, 오래전부터 김치를 만들어 먹었는데 지금까지 남은 기록에 그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김치를 '저(菹)'로 기록하여, 오이를 깎아 절여서 만든 '저(菹)'가 '시경'에  처음으로 보인다. 그때의 저는 공자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먹었다는 것으로 보아 오이를 시큼하게 절인 것으로서, 아마도 지금의 오이피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는 8세기의 동대사(東大寺) 정창원(正倉院)의 문서에 제조방법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된 '츠케(漬)'가 등장한다. 그것은 김치를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도 일본에서는 김치를 '츠케모노(漬物)'라고 부른다.

 중국의 경우 오래전부터 김치가 있었고, 6세기에 편찬된 '제민요술( 濟民要述)'이라는 책에 김치 제조법이 소개되어 있으며, 일본에도 8세기에 김치가 있었으므로, 중국과 일본의 문화적 가교 역할을 했던 한반도에도 일본에 김치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김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정창원 문서에 수수보리지(須須保理漬)라는 순무김치 만드는 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수수보리는 일본에 누룩으로 술 만드는 법을 알려 준 백제사람 이름이므로 그 순무김치도 백제에서 제조법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치가 수천 년 전부터 중국에 있었고 8세기 일본의 기록에 김치가 등장하므로 우리나라에도 김치가 그 전부터 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김치는 꼭 다른 나라에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도 있다.

 김치의 종류가 수백 가지가 넘는다는 말도 있듯이, 어떤 채소든 절여서 먹을 수만 있다면 김치가 될 수 있다. 음식물이 풍부하지 않던 시절에 생선은 바닷가에서나 구할 수 있고, 고기는 충분하지 않으므로, 먹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음식은 곡식과 채소였다. 그런데 김치의 재료는 꼭 밭에서 나는 채소뿐이 아니었다. 고려 말의 시에도 여뀌풀에 마름을 넣어 소금에 절였다는 말이 있듯이 야생초도 절여 먹으면 김치가 된다. 흉년이 들면 나라에서 진휼식품으로 나누어 주었던 것이 쌀, 콩, 장, 미역국이었는데, 장을 나누어준 것은 야생초를 그냥 먹으면 탈이 나기 때문에 장으로 조리를 해서 먹으라는 것이었다. 결국 김치는 가장 널리 퍼져 있던 음식이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정승모,정연식,전경목,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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