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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경천묘 신라 제56대 경순왕 어진/ⓒ한민족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소재 신라 제56대 경순왕릉/ⓒ한민족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부는 경순왕의 성과 이름이다. 본문에서 경순왕이라고 해야 하지만 시호를 쓰지 않았다. '왕력' 편에는 경순왕이라고 되어 있다. 내용은 '삼국사기'와 비슷하다.

 

제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은 시호가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후당後唐 명종明宗 이사원李嗣源의 연호로 926년에서 930년까지 사용했다.) 2년 정해년(927년) 9월, 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하여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북 영천)에 도착했다. 경애왕은 고려 태조(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날랜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는데, 구원병이 이르기도 전인 11월 겨울에 견훤이 서울(지금의 경주다.)로 엄습해 왔다. 왕은 비빈 및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이르던 말로, 높은 벼슬 자리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과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느라 적병이 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져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과 공경대부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견훤에게 모두 엎드려 노비로 삼아 줄 것을 애원했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조정과 민간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왕궁으로 들어가 거처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왕을 찾게 했다. 왕과 왕비 및 빈첩 여러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군중(軍中)으로 끌려나왔다. 견훤은 왕에게는 자진하도록 핍박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풀어 빈첩들을 겁탈하게 했다. 그리고 왕의 족제(族弟, 성과 본이 같은 사람들 중 유복친-상복을 입을 수 있는 가까운 친척-안에 들지 않는 같은 항렬의 아우뻘 남자)인 부(傅)를 왕으로 세웠으니, 왕은 견훤에 의해 즉위하게 된 것이다. 왕은 전왕의 시신을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신하들과 통곡했다. 태조는 사신을 보내 조상했다.

 

이듬해 무자년(928년) 봄 3월에 태조가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서울 근교에 도착했다. 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태조를 영접하여 궁궐로 들어가 서로 마주하면서 마음과 예의를 다했다. 임해전(臨海殿, 월지-안압지- 서쪽에 있던 전각)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왕이 말했다.

 

"과인이 부덕하여 환란을 불러들이고 견훤이 불의를 자행하여 국가를 잃게 되었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그러고 눈물을 흘리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목메어 울었으며, 태조 역시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수십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부하 군사들이 정숙하여 추호도 법을 범한 일이 없었다. 도성 사람과 사녀들이 서로 축하하면서 말했다.

 

"지난번 견훤이 왔을 때는 이리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이 온 것은 부모를 만난 것 같다."

 

8월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비단 저고리와 말안장을 선물하고, 여러 신하와 장사(將士)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내려주었다.

 

청태(淸泰, 후당 폐제廢帝 이종가李從珂의 연호로 청태 2년 태조 18년에 해당한다.) 2년 을미년(935년) 10월에 사방의 국토가 전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고, 국력이 쇠약하고 형세가 고립되어 스스로 버틸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왕은 신하들과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신하들의 가부(可否)가 분분해지자 태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存亡)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충신과 의사(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힘써 본 뒤에 할 수 없으면 그만두어야지, 어찌 천 년의 사직을 경솔히 남에게 넘길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고립되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아 이미 보전할 수 없는 형세다. 이미 강성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수도 없는데, 나로서는 차마 무고한 백성들에게 더 이상 도탄의 괴로움을 맛보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시랑(侍郞, 신라시대 관직으로 집사부(執事部)·병부(兵部)·창부(倉部)의 차관직이다.) 김봉휴(金封休) 편에 편지를 보내어 태조에게 항복을 요청했다.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곧장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을 말한다.)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 '화엄경'을 받드는 불교 종파로서 두순杜順, 지엄智儼, 법장法藏의 순서로 계승되었다.)에 귀속해 승려가 되었는데, 이름을 범공(梵空)이라고 했다. 범공은 후에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고도 한다.

 

태조는 편지를 받아 보고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 맞이했다.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 귀순했는데, 아름다운 수레와 훌륭한 말이 30여 리를 연달아 뻗쳐 도로의 길목이 막히고 구경꾼들로 담을 이루었다. 태조는 교외로 나가 그를 맞아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고려)의 정승원政丞院이다.)을 내리고,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주었다. 경순왕은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살게 되었기 때문에, 어미와 떨어져 사는 난새에 비유하여 낙랑공주의 호칭을 신란공주(神鸞公主)로 고쳤다. 시호는 효목(孝穆)이다. 김부를 정승(政丞)에 봉하니 지위는 태자 위에 있었으며, 녹봉 1,000석을 주고 시종과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임용했다. 그리고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고 공의 식읍(食邑,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조세 수입을 독점하도록 한 고을이다.)으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와서 항복하자 태조는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접하고 산신을 보내 말했다.

 

"이제 왕이 나라를 과인에게 주셨으니 그것은 큰 것을 주신 것입니다. 바라건대 종실과 결혼하여 영원히 장인과 사위 같은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의 백부 억렴(億廉, 왕의 아버지인 각간 효종은 추봉된 신흥대왕新興大王의 아우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과 용모가 모두 아름다우니 이 사람이 아니면 내정(內政)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태조는 억렴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이 여인이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다. 우리 왕조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엮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성왕후 이씨의 본은 경주다.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俠州 지금의 경남 합천이다.)의 군수로 있을 때 태조가 이 주에 행차했다가 비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이곳을 협주군(俠州郡)이라고도 한다.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며, 3월 25일을 기일忌日로 하여 정릉(貞陵)에 장사 지냈는데,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바로 안종(安宗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욱郁으로 그의 아들이 고려 제 8대 왕인 현종이다.)이다." 이 밖에 25명의 비와 주(主) 가운데 김씨의 일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논의 역시 안종을 신라의 외손이라 했으니, 사전(史傳)이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조의 손자 경종(景宗) 주(伷)는 정승공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으니, 바로 헌승왕후(憲承王后)다. 이리하여 정승을 봉하여 상보(尙父, 아보亞父와 같은 말로 아버지에 버금간다는 의미다.)로 삼았는데, 태평흥국(太平興國, 북송 태종太宗 조경趙炅의 연호로 976년에서 984년까지 사용했다.) 3년 무인년(978년)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했다. 상보를 책봉하는 고문(誥文)에 이렇게 말했다.

 

"칙(勅)하노니, 희씨(姬氏)의 주(周)나라가 나라를 세운 처음에는 먼저 여망(呂望, 주나라의 어진 신하 강태공姜泰公으로 무왕이 상보로 정한 인물이다.)을 봉했고, 유씨(柳氏)의 한(漢)나라가 시작될 때는 먼저 소하(蕭何, 한나라 고조를 도와 승상이 되었던 공신으로 한신을 고조에게 추천한 일화가 유명하다.)를 책봉했다. 이로부터 천하가 크게 평정되고 기업(基業)이 널리 열렸다. 용도(龍圖, 용마龍馬가 가지고 나온 그림으로, 제왕 출현을 알리는 부서符瑞다.)는 30대를 세웠으며 인지(麟趾, 본래 '시경-주남'의 편명으로 한나라 왕실의 국운이 계승됨을 말한다.)는 400년을 이었으니 해와 달이 아주 밝고 천지가 평안했다. 비록 무위(無爲, 노자는 '무위이치無爲而治'라고 말하며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야지 작위나 형벌 등으로 백성들을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의 군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보좌하는 신하로 말미암아 대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8,000천 호(觀光順化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 政丞 食邑 八千戶)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살고 관직은 왕의 작위를 나누어 받았다. 그 영특한 기상은 하늘에 닿고 문장의 재능은 땅을 흔들 만하다. 풍요로움은 춘추에 있고 귀함은 봉토에 누렸으며, 가슴속에는 육도(六韜)와 삼략(三略, 병서兵書 '육도'는 강태공이 지었고 '삼략'은 황석공黃石公이 지었다고 한다.)이 들어 있고 칠종오신(七從五申, 칠종은 제갈량이 남만의 맹획을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놓아주었다는 고사로 전략의 탁월함을 비유한 것이다. 오신은 삼령오신三令五申의 준말로 군령이 엄한 것을 말한다.)을 손바닥에서 움직였다.

 

우리 태조가 처음으로 우호를 맺어 일찍부터 그 풍도를 알아 때를 가려 부마의 혼인을 맺어 안으로 큰 절의에 순응했다. 국가가 통일되고 군신이 완연히 삼한으로 합쳤으니,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고 아름다운 법은 빛나고 높았다. 상보(尙父) 도성령(都省令)의 칭호를 더하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의 칭호를 주니, 훈봉(勳封)은 과거와 같고 식읍은 이전의 것과 합쳐 모두 1만 호다. 유사는 날을 택하여 예를 갖추어 책명하고 맡은 사람은 시행하라. 개보(開寶, 북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연호로 968년에서 976년까지 사용했다.) 8년(975년) 10월 어느 날."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내의성內議省의 최고직으로 조선의 영의정에 해당한다.)겸 총한림(摠翰林) 신(臣) 핵선(翮宣)은 위와 같이 칙명을 받들어 직첩(職牒)이 도착하는 대로 받들어 시행하라. 개보 8년 10월 어느 날."

 

"시중(侍中, 문하성門下省의 최고직이다.) 서명(署名), 내봉령(內奉令, 내봉성의 최고직이다.) 서명, 군부령(軍部令) 서명, 군부령 무서(無署, 서명이 없다는 뜻), 병부령 서명, 광평시랑(廣評侍郞) 서명, 광평시랑 무서, 내봉시랑(內奉侍郞) 무서, 내봉시랑서명, 군부경(軍部卿) 서명, 병부경(兵部卿) 무서, 병무경 서명,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 상보도성령 상주국 낙랑도왕(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 尙父都省令 上柱國 樂浪都王)식읍 1만 호 김부에게 고하노니 위와 같이 칙서를 받들고 부(符)가 이르거든 받들어 시행하라.

주사(主事) 무명(無名, 이름이 없다는 뜻), 낭중(郎中) 무명, 서령사(書令史) 무명, 공목(孔目, 회계와 공문서를 맡은 아전으로 '서령사'도 마찬가지다.) 무명, 개보 8년 10월 어느 날 내림."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의 박씨(朴氏)와 석씨(昔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 김씨는 금궤에 담겨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고 혹은 금수레를 타고 내려왔다고 하니, 이는 더욱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서로 전하여 실제로 있었던 일로 여기고 있다 다만 그 처음에는 위에 있는 자가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관대했으며, 관직의 설치는 간략했고, 일을 간단하게 시행했으며,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배를 타고 조공하는 사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항상 자제들을 보내 중국 조정(宋)에 숙위(宿衛, 황제를 숙위하는 직무를 말한다.)하게 하고, 공부하게 했다. 성현의 풍토를 이어받고 거친 풍속을 고침으로써 예의의 나라가 되게 했다. 또 당나라 군사의 위엄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여 영토를 취해 군현으로 삼았으니 진실로 그 시절에는 성대했다. 그러나 불법을 숭상하면서도 그 폐단을 알지 못했고, 심지어는 여염 마을에까지 탑과 절을 즐비하게 세우고, 백성들은 달아나 승려가 되어 군사나 농민이 점점 줄어들고 나날이 쇠미해졌으니, 어찌 나라가 어지럽지 않겠으며 또 망하지 않겠는가?

 

이러할 때, 경애왕은 더욱 못되고 음탕하여 궁인 및 신하들과 포석정에 놀이를 나가 술자리를 마련하여 연회를 열면서 견훤이 쳐들어온 것을 알지 못했으니, 문밖의 한금호(韓擒虎, 수나라 노주총관盧州摠管으로 날랜 기마 500명을 이끌고 진나라 공격의 선봉에 섰으며 진나라 후주-숙보叔寶와 장려화를 사로잡았다.)와 누각 위의 장려화(張麗華, 진나라 후주의 귀비貴妃로 지혜로워 후주에게 총애를 받았다.)의 일과 차이가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투항한 것은 어쩔 수 없어서였지만 잘한 일이었다. 그때 만약 힘써 싸워 죽을 각오로 왕사(王師, 고려 태조의 군사를 뜻한다.)에게 대항하다 힘이 미치지 못하고 형세가 곤궁하게 됐다면, 반드시 그 가족은 멸망했을 것이고 무고한 백성에게 해를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궁궐 창고를 봉쇄하고 군현의 문서를 기록해 귀의했으니, 고려 조정에 공이 있고 백성들에게 덕을 크게 베푼 것이다.

 

옛날 전씨(錢氏, 오월왕 전숙錢叔으로, 자기가 다스리던 13개 주를 송나라에 바쳤다.)가 오월(吳越)을 가지고 송나라로 들어가자 소자첨(蘇子瞻,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字다. 소식은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송대의 정치가이자 대문호다.)이 그를 충신이라고 일컬었는데, 지금 신라 왕의 공덕은 그보다 더욱 크다. 우리 태조는 비빈이 아주 많아 자손도 번창했다.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자로 보위에 올랐고, 이후로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음덕이 아니겠는가?"

 

신라가 국토를 바치고 멸망한 후에 아간 신회(神會)가 외직(外職)을 그만두고 돌아와 황폐해진 도성을 보고는 서리리(黍離離)의 탄식(주나라 대부가 주나라 왕실의 몰락을 보고 탄식하여 지은 시로 '시경'의 편명이다.)이 있어 노래를 지었지만, 그 노래는 유실되어 알 수 없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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