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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455호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금제 태환 이식)/ⓒ국립중앙박물관
보물 455호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금제 태환 이식)/ⓒ국립중앙박물관
보물 455호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금제 태환 이식)/ⓒ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455호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慶州 路西洞 金製耳飾, 金製太環耳飾)'는 신라 5~6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로 귀에 거는 중심고리(主環)인 태환(太環)에 크고 작은 2개의 노는 고리(遊還)로 연결하고, 아래에 긴 이파리 모양을 한 여러개의 달개가 달린 샛장식(中間飾, 귀걸이의 중심고리 아래 달리는 꾸미개장식)을 달았는데, 샛장식은 작은 고리를 연접시켜 만든 구체에 새김눈(‘目’자처럼 가로 또는 세로로 조각한 눈금선문양)이 장식된 달개로 이를 여러개 붙여 방사형으로 펼쳐져 있어 매우 화려해 보이며, 그 아래 테두리와 중심선에 모두 새김눈을 2줄로 겹쳐 붙여 입체감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심엽형(하트 모양 또는 그와 비슷한 나뭇잎 모양)의 드림(垂下飾, 귀걸이의 가장 아래 매달리는 드리개 장식)을 달아 장식하였다.

 

전형적인 경주식 태환이식(太環耳飾, 금으로 만든 굵은 고리의 귀걸이)이라는 점과 제작기법과 조형성이 우수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는 점, 이후 금조총 및 보문동 부부총 금귀걸이로의 양식사적 발전과정을 보여준다는 점 등에서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최초 발견 당시 경주 노서동 215호 고분에서 출토되었으나 귀걸이 1쌍 중 하나가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1965년 체결한 한일협정으로 1966년 국내로 반환되어 국립중앙박물에 소장되었으며, 유사한 유물로 창녕 계성고분군 등지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한편, 보물 제455호는 그동안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2018년10월30일 문화재청에서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는 보물 제2001호로 재지정하고, 기존 보물 제455호의 이름을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로 바꾸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1967년 보물 455호로 지정 당시 펴낸 각종 자료에 경주 노서동에서 발굴한 금귀걸이가 아닌 황오동 52호분에서 출토된 금귀걸이를 실수로 올려 바뀌면서 시작되었는데, 다행히 2000년 어느 날 일본학자인 '가즈오(藤井和夫)'가 신라 황금전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에게 유물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준 덕이라고 하며, 그동안 실수로 인해 잘못 알려졌던 것을 보물 지정 당시로부터 51년만에 각자 제이름을 찾은 것입니다. 

 

[보물 제2001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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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댁대왕신종(에밀레종)/ⓒ국립경주박물관

신라 제35대 경덕대왕(景德大王, 재위 742~765)이 천보(天寶, 당나라 대종代宗 이예李豫의 연호로 766년에서 779년까지 사용했다.) 13년 갑오년(754년)에 황룡사의 종을 주조했는데, 길이가 열 자 세 치고 두께는 아홉 치며 무게는 49만 7581근이었다. 시주(施主)는 효정이왕(孝貞伊王) 삼모부인(三毛夫人, 경덕대왕의 선비先妃)이며, 공장은 이상택(里上宅) 노복이었다. [당나라] 숙종(肅宗, 재위 756~762) 때 다시 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여섯 자 여덟 치였다. 또 다음해인 을미년(755년)에 분황사의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동상을 주조했는데, 무게는 30만 6700근이고 공장은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참고: 신라시대 1근의 무게는 성덕대왕신종의 무게인 18.9톤을 통해 신라시대 당시 1근의 무게는 약 250g으로 추정

 

또 경덕왕은 황동 12만 근을 들여 선친 성덕왕을 위해 큰 종 하나를 주조하려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아들 혜공대왕(惠恭大王, 재위 765~780) 건운(乾運)이 대력(大歷, 당나라 대종 때의 네 번째 연호로 766~779까지 사용) 경술년(770년) 12월에 유사(有司, 어떤 단체에서 사무를 맡아보는 직책의 벼슬아치 또는 담당관리)에게 명하여 공장을 모아 종을 완성한 뒤 봉덕사에 모셨다. 이 절은 바로 효성왕(孝成王, 제34대 왕 재위 737~742)이 개원(開元 26년 무인년(738년)에 성덕대왕의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래서 종의 이름을 '성댁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칭으로 봉덕사종 별칭으로 에밀레종'이라 했다. 성덕대왕은 바로 경덕왕의 아버지 흥광대왕(興光大王)이다. 종은 본래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대왕을 위해 시주한 금으로 주조했기 때문에 성덕대왕의 종이라 한 것이다.

 

조산대부(朝散大夫) 전태자사의랑(前太子司議郞) 한림랑(翰林郞) 김필해(金弼奚, 김필오金弼奧라고도 한다, 생몰미상)가 왕명을 받들어 종의 이름을 지었는데 글이 번잡하여 싣지 않는다.

 

-삼국유사 권 제4 塔像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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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631호 황남대총 남분 은관/국립중앙박물관]


[보물 631호 황남대총 남분 은관/국립중앙박물관]


[보물 631호 황남대총 남분 은관/국립중앙박물관]


[보물 631호 황남대총 남분 은관/국립중앙박물관]


보물 631호 '황남대총 남분 은관'은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은제 관으로 높이 17.2cm, 머리띠 너비 3.2cm, 지름 16,6cm의 크기로 되어 있다.

머리띠 위의 장식은 세 갈래로 가지가 뻗어있는 형태로 전통적인 신라 관모에서는 보지 못하던 독특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은관의 전체 모양을 보면 가운데 가지의 위에는 돌기가 있고, 활처럼 휘어지며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마름모 형태의 은판이 붙어 있고, 좌우에는 반달형 은판을 붙이고, 바깥쪽을 일정한 폭으로 오려낸 다음 하나 하나 꼬아 마치 새의 깃털을 꽂아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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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총 금귀걸이/국립중앙박물관]


[부부총 금귀걸이/국립중앙박물관]


[부부총 금귀걸이/국립중앙박물관]


국보 90호 부부총 금귀걸이는 1915년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합장분의 돌방무덤에서 발굴된 유물이다. 금으로 된 작은 알갱이와 금실을 이용해 정교하게 장식하였고, 화려한 모양의 달개가 특징이다. 부부총 금귀걸이는 삼국시대 귀걸이 중 단연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는 보물로, 천 오백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반짝거리는 황금색과 화려한 무늬는 신라인의 금속공예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름 0.5mm도 채 되지 않는 수백 개의 금 알갱이를 얇은 금실로 거북등 모양으로 구획을 나누고 다시 그 안에 정교한 꽃무늬를 표현했다. 샛장식은 작은 고리로 연결해 둥근 형태로 만들었으며, 가장자리에는 37개의 나뭇잎 모양의 달개를 달아 풍성하면서도 화려해 보이도록 했다. 또한 나뭇잎 모양의 달개 장식이 끝나는 아래쪽에는 나뭇잎 모양 보다 큰 하트모양의 장식을 매달아 조형미를 더했다. 부부총 금귀걸이는 5세기 부터 이어져 온 신라 귀걸이 제작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유물로 이와 유사한 금귀걸이로는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귀걸이(보물 557호)와 양산 금조총에서 출토된 귀걸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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