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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오릉/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알영, 제2대 남해차차웅, 3대 유리이사금,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이라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라의 개국 시조면서 경주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출생에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서술했다. 혁거세란 명왕明王, 성왕聖王, 철왕哲王의 뜻이며 존호다.-이병도설)

 

진한 땅에는 예부터 여섯 마을이 있었다.(다음 신화를 서대석 교수는 육촌장 신화라고 이름지었다. 내용은 씨족 집단의 거주 지역과 족장의 이름을 이야기한 것으로서 천신 숭배 집단의 부계 혈연을 중심으로 집단 생활을 하던 사정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 여섯 마을 사람들을 조선의 유민으로 보았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으로,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며, 촌장은 알평(謁平)이라고 한다.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峯, 경주시 동천동의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인데 그 아래에 석탈해왕릉이 보인다.)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에 부部를 설치하고 급량부라 했는데 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년에 중흥부中興部로 고쳤다. 파잠波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으로,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사량부(沙梁部, 양梁은 도道로 읽어야 하며, 간혹 탁涿으로 쓰는데 역시 음은 도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며, 구량벌(仇良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은'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이며 아래의 예도 그렇다.)

 

셋째는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으로, 촌장은 구례마(俱禮馬, 구俱를 구仇로 표기하기도 한다.)라고 한다. 처음에 이산(伊山 혹은 개비산皆比山이라 한다.)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점량부(漸梁部, 양梁은 탁涿이라고도 한다.)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 진지촌(觜山 珍支村 혹은 빈지賓之, 빈자貧子, 빙지氷之라고도 한다.)으로,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라고 한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와서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으며,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한다.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皇龍寺)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터가 있는데 여기가 최치원이 옛 집이라는 설이 거의 확실하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지금의 금강산-현재의 경주 북쪽에 있는 산-백률사栢栗寺 북쪽산)으로 촌장은 지타(祗沱 혹은 지타只他라고도 한다.)라고 한다. 처음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활아(活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으로, 촌장은 호진(虎珍)이라고 한다.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로,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彌村), 궐곡(闕谷 혹은 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여섯 부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다. 노례왕 9년(132년)에 처음으로 여섯 부의 명칭을 고쳤고, 또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 하는데 그 실상은 자세하지 않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서한 선제宣帝 유순劉詢의 연호다.) 원년(기원전 69년) 임자년(고본古本에는 건무建武 원년이라고도 하고 또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남쪽 언덕에 모여 다음과 같이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군주가 없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덕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고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우물은 이 부족이 농경 생활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지금은 신라정新羅井이라고 하는데 경주의 탑정동 솔밭에 있따.) 옆에 번갯불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을 뒤덮었고 백마(하늘을 나는 천마의 의미가 있으며 하늘의 사자다.)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자주색 알(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태양신의 정기를 받아 고귀하게 태어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서대석 설) 그 알을 깨뜨려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모습과 거동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빛이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아졌다. 그래서 혁거세왕(赫居世王, 이 말은 향언鄕言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박'은 우리말 '밝光明'에 대한 음차자音借字며, '혁赫'의 훈'밝'에 대한 음차자인 '박'자로 성을 삼은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양주동, 이동환-해설가들에 다르면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선도성모와 같은 존재며, 중국 황실의 공주로서 성도산에 와서 깃들었다는 신모다. -이동환-가 낳은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는 말에 어진 사람을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기에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은 것 역시 서술성모가 나타났음을 뜻함이 아니겠는가."라고 한다.)이라 이름하고 위호(位號)는 거슬한(居瑟邯) (또는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 스스로 "알지 거서간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했으므로 그 말에 따라 일컬은 것인데, 이후부터 왕의 존칭이 되었다.)이라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축하하며 말했다.

 

"이제 천자가 이미 내려왔으니, 덕이 있는 왕후를 찾아 짝을 맺어드려야 한다."
(이하는 왕비 알영 부인을 맞이하는 이야기인데, 고운기의 고증에 의하면 부인이 태어난 해는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 5년 뒤라고 기록하고 있어 여기와는 다르다.)

 

그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이도흠에 의하면 '알'은 사물의 핵심이나 근원을 말하며, '씨'의 대칭어로 여성에게만 쓰였다고 한다. 서대석은 알영정을 나정에 대응되는 마을의 중심지로 보았다.-英井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도 한다.)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혹은 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갈라 얻었다고도 한다.) 여자 아이의 얼굴과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부리와 같았다.(닭은 새로운 태양의 도래를 알리는 새다. 이러한 닭 토템은 신성 관념의 반영이며 신라 전체의 토템으로 확장된다.) 아이를 월성(月城) 북천(北川)에서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 때문에 시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했다.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이다.)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남자 아이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향인들이 바가지를 박(朴)이라 했기 때문에 성을 박씨로 했다. 여자 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이 열세 살이 되는 오봉(五鳳) 원년 갑자에 남자 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여자 아이를 왕후로 세웠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의 풍속에 경京 자를 서벌이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계룡이 상서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자, 숲 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후세에 이르러 국호가 신라로 정해졌다.

 

박혁거세는 6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후 시신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왕후는 경주의 오릉五陵에 혁거세와 같이 묻혀 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한 곳에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쫓아다니며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머리와 사지[五體]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사릉(蛇陵 '삼국유사'에 나오는 '뱀'을 긍정적으로 본다면 뱀이야말로 합장을 막고 오릉을 만든 매개자이다.)이라고도 한다. 담엄사 북쪽의 능이 바로 이것이다. 그 후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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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경주 오릉(五陵)/네이버지식백과]


 신라시조 혁거세왕의 죽음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더니 이레 후에야 유해가 흩어져서 땅 위로 떨어졌고 왕후 역시 작고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합해서 장사를 지내려고 하였더니 큰 뱀이 쫓아다니면서 금(禁)하므로 다섯 부분을 다 각각 장사 지내어 다섯 능으로 되었다. 또 사릉(蛇陵)이라고 부르니 담엄사 왕릉이 바로 그것이다.[삼국유사/권1 기이 신라시조 혁거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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