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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유적 효충사(朴堤上遺跡 孝忠祠) 박제상 영정/ⓒ양산시립박물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에는 박제상(朴堤上)으로 되어 있어 박제상으로 교쳐야 한다. '제상'은 '모말毛末'이라고도 했다.

 

제17대 나밀왕(那密王)이 왕위에 오른지 36년 경인년(390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 말했다.

 

"저희 임금은 대왕의 신성하심을 듣고 신 등에게 백제가 지은 죄를 대왕께 아뢰도록 하셨습니다. 대왕께서는 왕자 한 명을 보내 저희 임금께 성심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왕이 셋째 아들 미해(美海, 미토희未吐喜-라고도 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미사흔未斯欣으로 되어 있다. 미사흔과 박제상 이야기는 <일본서기> 권7에도 전한다.)를 왜국(신라에게 위협을 주었던 왜국의 성립은 대체로 4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런 왜국은 신라 왕을 눈물 흘리게 만들 만큼 강한 힘이 있었다.)에 보냈다. 이때 미해의 나이는 열 살로 말과 행동이 아직 반듯하게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내신 박사람(朴娑覽)을 부사(副使)로 삼아 딸려 보냈다. 그런데 왜왕이 30년 동안 그를 붙잡아 두고는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訥祗王)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기미년(419년)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사신을 보내 말했다.

 

"저희 임금께서는 대왕의 아우 보해(寶海, <삼국하기> '신라본기'에는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다.)가 지혜가 빼어나고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며 특별히 소신을 보내 간청하도록 했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매우 다행스러워하면서 서로 화친을 맺어 왕래하기로 했다. 그래서 동생 보해에게 고구려로 가도록 명령하고 내신 김무알(金武謁)을 보좌로 삼아 보냈다. 그런데 장수왕 역시 그를 억류하고는 돌려보내지 않았다.

 

10년 을축년(425년)에 이르러 왕은 여러 신하들과 나라 안의 호걸들을 불러모아 직접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세 순배 돌고 다양한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자 왕이 눈물을 떨구면서 신하들에게 말했다.

 

"과거 선친께서는 백성들의 일이라면 성심을 다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 왜국으로 보냈다가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또 짐이 보위에 오른 이래 이웃 나라의 군사가 대단히 강성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고구려만이 화친을 맺자는 말을 하였으므로 짐이 그 말을 믿고 아우를 고루려에 보냈다. 그런데 고구려 역시 그를 붙잡아 두고는 돌려보내지 않고 있다. 짐이 비록 부귀한 위치에 있지만 일찍이 하루 한 순간이라도 아우들을 잊거나 생각하고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만약 두 아우를 만나 보고 함께 선왕의 묘를 뵙게 된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겠는데, 누가 이 계책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때 모든 관료들이 다 함께 아뢰었다.

 

"이 일은 진실로 쉽지 않습니다. 반드시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데, 신들의 생각으로는 삽라군 태수 박제상(朴堤上)이라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제상을 불러 물었다. 제상은 두 번 절하고 대답했다.

 

"신이 듣건대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그 일을 위해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어려운가 쉬운가를 따져 보고 나서 행동하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고, 죽을지 살지를 따져 보고 나서 움직이면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명을 받들어 가겠습니다."

 

왕은 그를 매우 가상히 여겨 그와 잔을 나누며 술을 마시고 손을 잡고는 헤어졌다.

 

제상은 왕 앞에서 명을 받들고 곧장 북해(北海)의 길을 달려 변복을 하고 고구려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해가 있는 곳으로 가 함께 탈출할 날짜를 의논하여 우선 5월 15일로 정하고, 고성(高城) 수구(水口)로 돌아와 묵으면서 기다렸다. 보해는 기일이 다가오자 병을 핑계로 며칠 동안 조회하지 않다가 밤중에 도망쳐서 고성 바닷가까지 이르렀다. 고구려 왕이 이을 알고는 수십 명을 보내 뒤쫓아 고성에 이르러 따라잡게 되었다. 그러나 보해가 고구려에 머무는 동안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고 활을 쏘았다. 그래서 마침내 죽음을 면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왕은 보해를 만나 보자 미해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슬퍼하며 눈물을 머금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마치 몸 하나에 팔뚝이 하나뿐이고 얼굴 하나에 눈이 하나뿐인 것 같소.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없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소?"

 

이때 제상이 이 말을 듣고는 두 번 절한 후 하직하고 말에 올랐다.

 

그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길을 떠나 곧바로 율포(栗浦) 바닷가에 도착했다.

 

제상의 아내가 이 일을 듣고는 말을 달려 뒤쫓아가 율포에 이르러 보니,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 뒤였다. 아내가 간곡하게 불렀으나,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떠났다. 그러고는 왜국에 도착해서 거짓으로 말했다.

 

"계림의 왕이 무고한 내 아버지와 형을 죽였기 때문에 이곳까지 도망쳐 왔습니다."

 

왜왕은 그를 믿고서 집을 주고 편안히 살게 해 주었다.

 

제상은 항상 미해를 모시고 바닷가에 나가 노닐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았다. 잡은 것을 항상 왜왕에게 바치니, 왜왕이 매우 기뻐하여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때마침 새벽 안개가 짙게 끼자 제상이 말했다.

 

"도망가실 만합니다."

 

미해가 말했다.

 

"그렇다면 함께 갑시다."

 

제상이 말했다.

 

"만약 신까지 달아난다면 아마도 왜인들에게 발각되어 추격을 받을 것입니다. 신이 남아서 추격을 막겠습니다."

 

미해가 말했다.

 

"지금 그대는 나에게 아버지나 형과 같은 존재인데, 어찌 그대를 버려 두고 혼자 돌아갈 수 있겠소?"

 

제상이 말했다.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여 대왕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만 있다면 만족할 따름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리고 술을 가져다 미해에게 바쳤다. 이때 계림 사람 강구려(康仇麗)가 왜국에 있었으므로 그를 딸려 보냈다.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 있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주변 사람들이 들어와 보려고 했으나 제상이 밖으로 나와서 저지하며 말했다.

 

"어제 말을 달려 사냥을 하느라 병이 깊어 아직 일어나지 않았소."

 

그러나 날이 저물자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다시 묻자 대답했다.

 

"미해는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소."

 

주변 사람들이 급히 왜 왕에게 알렸다. 왜왕은 기병을 시켜 뒤쫓게 했으나 따라잡지 못했으므로 제상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몰래 너희 나라 왕자를 돌려보냈느냐?"

 

제상이 대답했다.

 

"나는 계림의 신하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한 것뿐인데 어찌 감히 당신에게 말하겠는가?"

왜왕이 노하여 말했다.

 

"이제 너는 내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말하니, 오형(五形, 중국 고대 다섯 가지 형벌로서 대체로 먹물로 얼굴에 글씨를 새기고[墨], 코를 베고[劓], 발뒤꿈치를 베고[刖], 성기를 절단하고[宮], 목을 베는[斬] 것을 말한다.)에 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신하라고 말하면 후한 녹을 주겠다."

 

제상이 대답했다.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차라리 계림 왕에게 볼기를 맞는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지 않겠다."

 

왜왕은 노하여 제상의 발바닥 살갗을 도려 낸 후 갈대를 베어다 놓고 구 위를 걷게 했다.(오늘날 갈대에 있는 핏자국을 세속에서는 제상의 피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제상이 대답했다.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또 뜨거운 철판 위에 세우고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역시 제상이 대답했다.

 

"계림의 신하다."

 

그러자 왜왕은 제상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는 목도(木島) 가운데서 불태워 죽였다.

 

미해는 바다를 건너오자 강구려를 시켜 먼저 나라에 알리게 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백관들에게 굴헐역(屈歇驛)에서 맞도록 명하고, 자신은 친동생 보해와 함께 남쪽 교외에서 맞았다. 그리고 대궐로 들어와서 잔치를 베풀고 나라 안에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제상의 아내는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봉하고 딸을 미해의 부인으로 삼았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옛날 한(漢)나라의 신하 주가(周苛)가 형양(滎陽)에 있을 때 초(楚)나라 군사의 포로가 되었다.  항우(項羽)가 주가에게 '네가 내 신하가 되면 만록후(萬祿侯)로 봉하겠다.'라고 했으나, 주가는 욕을 하며 굽히지 않다가 초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제상의 충렬(忠烈)이 주가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다."

 

처음에 제상이 떠나갈 때, 소식을 들은 부인이 뒤쫓았으나 만나지 못하자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의 모래밭에 드러누워 오래도록 울부짖었는데, 이 때문에 그 모래밭을 장사(長沙)라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하여 돌아오려는데 부인이 다리가 풀려 일어나지 못했으므로 그 땅을 벌지지(伐知旨)라 했다. 오랜 뒤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경주시 외동읍과 울주군 두동면 경계에 있으며 해발 754미터다. 그 아래에 박제상 사당이 있다. 아직도 이곳 주민들은 치술령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낸다고 한다.)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다 삶을 마쳤다. 그 뒤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으며, 지금도 사당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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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오릉/3대 유리이사금 외에 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일영, 제2대 남해차차웅,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이라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노례이질금(朴弩禮尼叱今, '이사금'이라고도 하며 윗사람, 족장,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나중에 임금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노례왕'은 '유례왕儒禮王'이라고도 한다.)이 처음에 매부 탈해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탈해가 말했다.

 

"무릇 덕이 있는 자는 치아가 많다고 하니, 마땅히 잇금으로 시험해 봅시다."

 

이에 떡을 깨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잇금이 많았기 때문에 먼저 즉위했다. 이런 연유로 왕을 잇금이라고 했다. 이질금이란 칭호는 노례왕에서 시작되었다. 유성공(劉聖公, 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족형 유현劉玄이다.) 경시(更始) 원년 계미년(23년)에 즉위하여(연표에는 갑신년에 즉위했다고 했다.) 여섯 부의 호를 고쳐 정하고 여섯 성(姓, 이씨李氏, 최씨崔氏, 손씨孫氏, 정씨鄭氏, 배씨裵氏, 설씨薛氏다.)을 하사했다.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는데, 차사(嗟辭, '슬퍼하는 말' 이라는 뜻인데, 가사에 자주 나오는 '아으'와 유사하며 향가의 기원과 관련된다.)와 사뇌격(詞腦格, 향가 중에서 감탄사를 가진 10구체를 말한다.)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쟁기와 보습과 얼음 저장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무(建武) 18년(42년)에는 이서국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해에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왔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함께보기: 제2대 남해왕(차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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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이사금 왕릉/ⓒ경주문화관광
탈해이사금 왕릉/ⓒ경주문화관광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이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 '탈'은 '토吐'와 동음이며 '치'는 '이', '니'의 훈차자로서 치질금은 이사금, 이질금과 같은 뜻이다.)은 남해왕 때에(고본古本에 임인년에 왔다고 했으나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일연은 '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술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했다. 가까운 임인년이면 노례왕이 즉위한 뒤일 것이므로 서로 왕위를 양보하려고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앞의 임인년이라면 혁거세의 시대다. 때문에 임인년이라 한 것은 틀렸음을 알 수 있다.) 가락국(駕洛國) 바다 한가운데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수로왕(首露王)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북을 시끄럽게 두드리며 맞이하여 그들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배는 나는 듯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 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과 하서지촌下西知村이라는 이름이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도 나오며 대왕암에서 3~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포구 가에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노파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있었다.

 

[노파가] 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는 원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일로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가?"

 

배를 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 있었고 배 안에는 길이가 스무 자에 너비가 열세 자나 되는 상자가 하나 있었다. 아진의선이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아래 매어 두고는 길흉을 알 수가 없어 하늘을 향해 고했다. 잠시 후에 열어 보니 반듯한 모습의 남자 아이가 있었고, 칠보(七寶, 불가의 일곱 가지 보물로서 금, 은, 유리琉璃, 마노瑪瑙, 호박琥珀, 산호珊瑚, 차거硨磲)와 노비가 가득 차 있었다.

 

이레 동안 잘 대접하자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입니다. (또는 정명국正明國 사람이라고도 하고 완하국琓夏國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완하는 화하국花夏國이라고도 한다. 용성국은 왜倭의 동북쪽 1,000리 지점에 있다. '삼국사기'에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이라고 했는데 일연의 주석처럼 일본과 관련 있는 나라이다.) 우리나라에 일찍이 스물여덟 용왕이 있는데, 사람의 태(胎)에서 출생하여 대여섯 살 때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온 백성을 가르치고 성명(性命)을 바르게 닦았습니다. 8품의 성골(姓骨)이 있으나 간택을 받지 않고 모두 큰 자리(大位, 왕위를 말한다.)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없자 아들 구하기를 빌어 7년 만에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대왕이 군신을 모아 묻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으니 길상(吉祥)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고, 궤짝을 만들어 나를 넣고 또한 칠보와 노비까지 배에 싣고 띄워 보내면서, '아무 곳이나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이루어라.'라고 축원했습니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말을 끝내자 아이는 지팡이를 짚고 노비 두 명을 데리고 토함산으로 올라가 돌무덤을 만들었다. [그곳에] 이레 동안 머물면서 성안에 살 만한 곳을 살펴보니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오래도록 살 만했다. 그래서 내려가 살펴보니 바로 호공(瓠公,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그의 혈족과 성씨가 자세하지 않고 박을 허리에 매고 있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보았다.)의 집이었다. 이에 곧 계책을 써서 몰래 그 옆에 숫돌과 숯을 묻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그 집에 가서 말했다.

 

"여기는 우리 조상이 대대로 살던 집이오."

 

호공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이들의 다툼이 결판이 나지 않아 관청에 고발했다. 관청에서 물었다.

 

"무슨 근거로 너의 집이라고 하느냐?"

 

아이가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깐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가 빼앗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 보십시오."

 

탈해의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그는]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고 맏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니, 이 사람이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토해(吐解, 여기서 '토해'는 '탈해'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가 동악(東岳)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인[白衣]에게 마실 물을 떠오게 했다. 그런데 하인이 물을 길어 오면서 도중에 먼저 맛보려 하자 입에 잔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하인이 맹세했다.

 

"이후로는 가깝든 멀든 감히 먼저 물을 맛보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입에서 잔이 떨어졌다. 그 뒤로 하인은 두려워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에 세속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 부르는 우물이 바로 그곳이다.

 

노례왕이 죽자 광무제(光武帝) 중원(中元) 2년 정사년(57년) 6월 탈해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옛날 내 집이었다고 하여 다른 사람의 집을 빼앗았기 때문에 성을 석씨(昔氏)라 했다. 어떤 사람은 까치로 인해 상자를 열었기 때문에 작(鵲)자에서 조(鳥)자를 버리고 성을 석(昔)씨로 했으며(이병도설에 의하면 까치는 길조요 예지豫智의 새이므로 이를 토템으로 삼은 것 같기도 하다.), 상자 속에서 알을 깨고 출생했기 때문에 탈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째인 건초(建初, 후한 장제章帝 유달劉炟의 연호다.) 4년 기모년 79에 죽은 뒤 소천구(疏川丘)에 장사 지냈다. 그 이후에 신(神)이 말했다.

 

"내 뼈를 조심해서 묻으라"

 

두개골의 둘레가 세 자 두 치, 몸통뼈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에 치아는 하나로 엉켜 있었으며, 뼈마디는 사슬처럼 이어져 있어 이른바 천하에 둘도 없는 장사의 골격이었다.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안치하니, 신이 또 말했다.

 

"내 뼈를 동악에 두라.(탈해왕릉은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의 길가에 큰 소나무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 받들어 모셨다.

이런 말도 있다. [탈해왕이] 죽은 뒤 27대 문무왕 대 조로調露 2년 경신년(680년) 3월 15일 신유일辛酉日 밤, 태종의 꿈에 매우 위엄 있고 사나워 보이는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탈해왕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라고 했다. 왕이 그의 말대로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국사國祀가 끊이지 않았으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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