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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5대 경덕왕릉/ⓒ문화컨텐츠닷컴

[당나라에서] <덕경德經, 도가의 창시자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말하며 모두 5,000자로 이루어져 있다.> 등을 보내오자 대왕은 예를 갖추어 받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 효성왕 2년' 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어 경덕왕 대의 일이 아니라고도 하나, 리상호는 경덕왕 대의 일이 맞다고 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이 되던 해에 오악삼산(五岳三山, 오악은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 북악 태백산, 중악 팔공산이며, 삼산은 경주 남산, 영천 금강산, 청도 부산이다. 윤영옥 교수는 오악이 통일신라의 상징적 존재이자 전제왕권의 상징이라고 했다.)의 신들이 때때로 나타나 궁전 뜰에서 대왕을 모셨다.

3월3일 왕은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올라가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가 길거리에서 대덕(大德, 중에게 부여하는 직위 명칭인데 덕망이나 풍모가 높은 중을 일컫는다.) 한 명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

이때 마침 위엄과 풍모가 깨끗한 고승이 배회하며 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리고 와 뵙게 하니 왕이 말했다.

"내가 말한 위엄과 풍모가 있는 승려가 아니다."

그리고 돌려보냈다.

다시 한 승려가 가사를 걸치고 앵통(櫻筒, 중이 물건을 넣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통)을 지고(삼태기를 메고 있었다고 한 곳도 있다.)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그를 보고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통 안을 살펴보니 다구(茶具, 차를 다려 마시기 위한 도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왕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승려가 아뢰었다.

"소승은 충담(忠談)이라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승려가 아뢰었다.

"소승은 매년 중삼일(重三日, 세시풍속에 액을 막는 제의祭儀가 있는 날로 3월3일이다.), 중구일(重九日, 중양일重陽日 이라고도 하며 액을 막는 제의가 있는 날로 9월9일이다.)에 차를 끓여 남산 삼화령(三花嶺, 경주 남산에 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데, 이 위에 연꽃 모양의 불상 대좌가 있다고 한다.)의 미륵세존(彌勒世尊, 뒷 세상에 나타날 부처)께 올리는데, 지금도 차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왕이 말했다.

"나에게도 차 한 잔 나누어 줄 수 있겠는가?

승려는 이에 차를 끓여 바쳤는데, 찻잔 속에서 향내가 풍겼다. 왕이 말했다.

"짐은 일찍이 대사가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 향가를 일컫는 가사의 별칭인데 '기이 제1'에는 사뇌격詞腦格이라고 했다.)의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짐을 위해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보라."

왕이 말했다.

충담은 곧바로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 왕의 불교 수행을 돕는 승려)로 봉했으니, 그는 삼가 재배하며 간곡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안민가(安民歌)는 다음과 같다.

 

君隱父也

군은부야(임금은 아버지요)
臣隱愛賜尸母史也
신은애사시모사야(신하는 사랑을 주는 어머니라)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민언광시한아해고위사시지(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로 여기면)
民是愛尸知古如
민시애시지고여(모든 백성들이 사랑을 알리라)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굴리질대힐생이지소음물생(꾸물거리며 사는 중생)
此肹湌惡支治良羅

차힐식악지치량나(이들을 먹여 다스려라)

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차지힐사유지어동시거어정위시지(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라고 하면)
國惡支持以支知右如

국악지지이지지고지(이 나라가 보전될 줄 알리라)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후구군여신다지민은여위내시등언(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國惡太平恨音叱如

국악태평한음질여(나라는 태평을 지속하리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김상억 교수는 '찬讚'이 게송류偈頌類의 '찬'이 아니고 한시의 '송찬頌讚' 류와 맥이 같다고 했다. 양주동 박사는 이 작품의 기상천외한 시법에 감탄하면서 문답체의 구조로 보았다.)는 다음과 같다.

 

咽嗚爾處米
열오이처미(열어젖히자)
露曉邪隱月羅理
로효야은월라리(벗어나는 달이)
白雲音逐干浮去隱安支下
백운음축간부거은안지하(흰구름 좇아 떠간 언저리)
沙是八陵隱汀理也中
사시팔릉은정리야중(백사장 펼친 물가에)
耆郞矣皃史是史藪邪
기랑의모사시사수야(기파랑 모습이 잠겼어라)
逸烏川理叱磧惡希
일오천리질적악희(일오천 자갈벌에서)
郞也持以支如賜烏隱
랑야지이지여사오은(낭의 지니신)
心未際叱肹逐內良齊
심미제질힐축내량제(마음 좇으려 하네)
阿耶栢史叱枝次高支好
아야백사질지차고지호(아! 잣나무 가지 높아)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설시모동내호시화판야(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이여!)

 

왕은 옥경(玉莖, 남자의 성기)의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는데, 자식이 없어 왕비('왕력'에는 삼모부인三毛夫人으로 되어 있다.)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했다. 후비 만월부인(滿月夫人)은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각간(角干, 신라 17간등 중 최고 관직) 의충(依忠)의 딸이었다.

 

왕이 하루는 표훈대사(表訓大師)를 불러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했으니 원하건대 대사께서 하느님(上帝)에게 청하여 사내아이를 점지하게 해 주시오."

표훈대사가 하늘로 올라가 천제에게 말하고 돌아와 아뢰었다.

"천제께서는 '딸을 구하는 것은 되지만 사내아이는 마땅치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말했다.

"딸을 아들로 바꿔 주시오."

표훈대사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청했다.

천제가 말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사내아이가 태어난다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표훈대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려 할 때 천제가 다시 불러 말했다.

"하늘과 인간 사이를 어지럽혀서는 안 되는데 지금 대사는 이웃 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고 있으니 지금 이후로는 오는 것을 금하노라."

표훈대사가 와서 천제의 말을 전하니 왕이 말했다.

"나라가 비록 위태롭게 되더라도 아들을 얻어 후사를 삼고 싶소."

달이 차서 왕후가 태자를 낳으니('삼국사기'에는 경덕왕 17년 7월23일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왕은 매우 기뻐했다.

태자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했으니, 이 사람이 혜공대왕(惠恭大王, 신라 제36대 왕, 재위 765~780)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태후가 섭정에 나섰으나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았고(그는 16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반란이 다섯 번이나 일어났다.),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도 막지 못했으니, 표훈대사의 말이 사실이었다. 태자는 원래 여자였다가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돌 때부터 즉위하기까지 항상 부녀자들의 놀이를 일삼고 비단 주머니 차는 것을 좋아하며 도사(道士)들과 희롱했다. 그래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 결국 선덕왕(宣德王)과 김양상(金良相, 김양상은 선덕와으이 이름이다. 김경신金敬信의 오기라는 설도 일리가 있다.-이가원 설)에게 시해되었다. 표훈대사 이후로 신라에 성인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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