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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혼인이란 남녀 간의 성적 결합이 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독점적, 배타적 성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함으로써 핏줄로 맺어진 가족을 이루고 사는 첫 단계가 혼인이다.

그러나 혼인은 단순한 남녀 간의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기도 하다. 혼인(婚姻)이라는 글자는 혼례를 저녁에 치른다 하여 저녁 혼(昏)이 변한 혼(婚)자와, 인척관계를 의미하는 인(姻)자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글자이다. 그러므로 혼인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라는 개인적 관계이기도 하지만,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라는 사회적 관계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양가 집안의 사회적 지위, 경제력 등이 혼인의 성사 여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러한 경햡이 더 심했다. 조선시대의 통혼권(通婚圈)은 매우 폐쇄적이었다.

첩을 두는 것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혼인은 같은 신분끼리만 행해져 이를 동색혼(同色婚)이라 하였다. 이렇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혼인으로 인한 혈연의 계승이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데 여러 부문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호적에는 호주와 처의 사조가 기록되었고, 과거를 치를 때에는 사조단자(四祖單子)를 제출하여야 했다. 여기서 사조란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를 말한다. 그러므로 남녀 모두 상대방 집안의 신분, 지위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살펴보아야 할 상대방 친족의 범위는 더 넓어진다. 예컨대 왕비가 될 사람의 가문을 심사할 때에는 팔고조도(八高祖圖)를 보는데 팔고조도의 경우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또는 그 가운데 아버지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아버지처럼 아버지와 어머니가 뒤섞인 경우까지 모두 포함하여 고조부모에 16명, 증조부모에 8명, 조부모에 4명, 부모에 2명 등 30명이 열거되는 복잡한 가계도였다.


팔고조도(八高祖圖)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증曾
조祖
모母

증曾
조祖
부父

증曾
조祖
모母

증曾
조祖
부父

증曾
조祖
모母

증曾
조祖
부父

증曾
조祖
모母

증曾
조祖
부父

조祖
모母

조祖
부父

조祖
모母

조祖
부父

비妣(어머니)

고考(아버지)


그리고 여말선초에 음서(蔭敍)에서 가계(家系)를 확인하고, 사심관(事審官, 고려시대 지방에 연고가 있는 고관에게 자기의 고장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특수관직)을 임명할 때 연고지를 확인하며, 경재소(京在所, 지방 관청과 정부의 연락 기능을 담당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울에 설치한 출장소를 이르던 말)의 범위를 정하고, 근친혼 관계를 확인할 때 쓰였던 팔조호구(八祖戶口)는 조부모, 증조부모, 외조부모, 처부모의 사조를 조사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아버지 쪽으로 6대조까지 20명, 어머니 쪽으로 5대조까지 13명, 처 쪽으로 4대조까지 12명으로 도합 45명이 팔조호구의 범위였다. 이런 사회에서 혼인은 가문의 성쇠를 결정짓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음서의 혜택을 받는 경우에도 조선시대에는, 비록 고려시대와는 달리 친족의 범위가 좁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가문의 격기 힘을 발휘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여러 조건이 같은 신분끼리의 폐쇄적인 통혼권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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