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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들은 집안 관리에 매우 엄격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그동안 조상들이 힘서 쌓아 놓은 명성이나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집안 관리는 언제나 자신에 대한 가혹한 수신(修身)에서 출발하였으며, 사치를 금하고 모든 것을 절약하도록 하였는데, 조선시대 사람들이 남긴 가훈이나 유서 등을 통해 그들의 생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다음은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그의 아들 윤인미(尹仁美, 1607~1674)에게 준 가훈의 내용이다.

의복과 안장(鞍裝) 및 말(馬) 등 무릇 자신을 사치스럽게 치장하는 모든 낡은 습관을 바꾸고 폐단이 없도록 하라! 식사는 배고픔을 면하면 족하고, 옷은 몸을 가리면 충분하며, 말은 내가 직접 걷지 않을 정도로 허약하지 않으면 되고, 안장은 튼튼하면 그만이며, 그릇은 적절히 쓸 수 만 있으면 좋다.

부유하게 살던 조선시대 양반들 사이에서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안장에 잘 달리는 말을 타려 하며 울긋불긋 사치스러운 옷을 입으려는 충조가 크게 성행하였다. 그래서 윤선도는 가훈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후손들에게 절대로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풍류와 사치를 즐기다 보면 조상들이 힘써 모은 재산이 흩어지기 마련이었으며, 결국 전답과 가옥을 모두 팔고 다른 고장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고장으로 이사하게 되면 자연 피붙이들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다 보면 남남이 되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일은 종통(宗統)을 부정하고 제사를 끊어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조상이 물려준 토지와 노비 및 가산(家産)을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고 노력했다. 가난해져서 부득이하게 토지와 노비 등을 방매할 경우가 되더라도 피붙이에게 팔아서 다른 사람이 조상의 집에 살거나 조상의 땅을 갈아먹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경상도 안동에 살았던 이우양(李遇陽)이 1452년에 그의 자녀에게 재산을 분배하면서 당부한 말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자자손손에게 유서를 남기는 뜻은 다음과 같다. 내가 이웃집 자손을 보니 자기 조상이 고생하며 경영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전택(田宅)을 모두 팔아 치우고 다른 지방으로 이사하여 남이 그 집에 들어와 살고 그 토지를 경작하니, 이는 종통 (宗統)을 뒤엎고 제사를 끊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 상서롭지 못함이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중략- 바라건대 너희들은 무릇 내가 전하는 적지 않은 조사으이 토지와 노비 및 가재(家財) 등을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전달하여 잃지 않도록 하여라. 만일 가난해져서 이를 팔아먹게 되더라도 너희들의 동종족류(同宗族類)에게 팔고, 남이 내 집에 들어오고 내 토지를 갈며 내 재물을 사용하지 않게 한다면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

이우양이 후손에게 당부한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조상의 제사가 끊어지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불효 중에서도 이것이 가장 큰 죄목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실 재산 관리에 대해 관심을 쏟았던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 제사를 제대로 이어 가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전라도 부안현에 세거하던 부안김씨 김명열(金命說, 1613~?)이 자신의 후손에게 남긴 글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내가 일찍이 살펴보니, 다른 집안의 사위와 외손들이 제사를 서로 미루다가 빼먹는 경우가 많았다. 또 비록 제사를 지낸다고 해도 제물을 정결하게 마련하지 못하고 예(禮)를 정성과 경외(敬畏)의 마음 없이 행하니 글허게 제사를 받들 바에야 차라리 지내지 않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일찍이 이 일을 아버지께 아뢰어 정하고 또 우리 형제들이 충분히 논의하여 결정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제사를 결단코 사위나 외손의 집에 윤행시키지 말라. 그리고 이를 정식으로 삼아 대대로 준행(遵行)하도록 하라.

김명열의 당부에 의하면, 제사를 이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제물을 장만하는 정성과 제사를 받드는 경외심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성이 다른 외손이나 사위가 제사를 제대로 받들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김명열은 만일 친손(親孫)이 가난해서 제사를 받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절대로 이를 사위나 외손에게 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김명열이 생존했던 당시까지만 해도 종법(宗法)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친손과 외손들이 제사를 돌려 가며 지냈다.

김명열의 '전후문기(傳後文記)' 김명열이 1669년에 작성하여 그의 후손들에게 준 문서로, 그는 이 문서에서 자신의 후손들이 지켜야 할 재산 분배와 제사 봉행에 대한 일종의 지침을 내리고 있다. 조선 중기에 변화해 가는 재산 분배와 제사 봉행의 관행을 엿볼 수 있다./ⓒ한국학자료센터

가장(家長)이 가정의 모든 일을 주관하였지만, 실제로 집안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사내종과 계집종이었다. 사내종은 농사를 짓고 땔감을 마련하는 등 노동력이 필요한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서 처리하였다. 이에 비해 계집종은 물 긷고 빨래하는 일을 비롯하여 길쌈 등 가정의 소소한 일 등을 책임져야 했다. 이와 같이 사내종과 계집종이 집안의 모든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그들은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가장이 이들의 불만을 어떻게 해소시켜 주느냐에 따라서 집안의 성쇠(盛衰)가 달려 있었다. 충청도에 거주하던 이유태(李惟泰, 1607~1684)는 자신의 후손들에게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옷과 음식을 춥고 배고프지 않게 한 다음에 농사일이나 길쌈하는 일을 하도록 하며, 태만하고 게으름을 피우면 스스로 부지런히 일하도록 유도한다.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덜컥 매질부터 해서는 안 되고 먼저 잘 타일러 가르칠 것이며, 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세 가지 죄를 합하여 다스리는 것이 좋다. 만약 거칠게 성내고 형벌을 지나치게 하여 도리어 원망하고 배반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거나, 혹은 다치거나 죽게라도 한다면 그 후회가 미칠 바가 없을 것이다.

이유태는 노비들을 부릴 때 먼저 옷과 음식을 춥고 배고피지 않게 줄 것을 강조하고 있다. 노비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춥고 배고프면 자연히 일을 하지 못하기 대문에 옷을 따뜻하게 입혀 주고 배부르게 먹일 것을 당부했다. 잘못이 있더라도 곧바로 처벌하지 말고 타일러서 가르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두세 가지 죄를 아울러서 처벌하되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도록 권유하고 있다. 그는 모든 하인에게 한 달에 3일의 휴가를 주도록 당부하기도 하였다.

 

노비 중에서도 호노(戶奴) 혹은 수노(首奴)는 특별히 대우를 할 것을 당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호노는 집안에서 거느리는 모든 노비의 우두머리로, 상전을 대신해서 관아에 나아가 소송을 제기하고 토지와 노비를 매매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체면상 관아에 출입하거나 직접 나서서 상거래를 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호노가 이를 대신하였다. 또 관에 세금을 납부하고 환곡을 타거나 갚을 때에도 호노가 이를 도맡아서 처리하였다. 따라서 호노는 가노(家奴) 중에서 글자를 알고 사리 판단이 정확한 사내종으로 선정하였다. 위에서 소개한 윤선도는 볼길도와 해남 일대를 개간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에서 호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체엄했다. 그래서 그는 후손들에게 가훈을 내리면서 호노에 대해서도 특별히 언급하였던 것이다.

큰 힘을 들이는 일이 아닌, 기타 사소한 잡일과 통상적인 심부름은 오로지 집안의 다른 노비들에게 맡기고 호노를 부리지 말아서 그가 넉넉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하도록 해 주어라. 스스로 힘써 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 동네 사람들이 종종 부려먹는 일은 더욱 못하게 하라.

조선시대 양반들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집안 관리에 철저하였다. 재산과 제사를 관리할 때에는 언제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살피고 배려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사치를 멀리했으며, 편한 것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 등 집안 관리는 '자기 관리(修身))'로부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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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양반들은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은퇴한 후에는 대부분 지방으로 낙향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낙향한 후에도 양반가문으로서의 지체와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했다. 그들의 자손은 유명한 학자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고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로 진출해야 했다. 또 향교나 서원에 출입하며 그 지방의 양반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어야 했다. 친구들을 집으로 자주 초대하고, 방문한 친구들에게는 언제나 소흘함이 없도록 융숭히 대접해야 했다. 아울러 좋은 집안과 대대로 혼인을 맺어 혼맥(婚脈)도 형성해야 했다.

19세기 화가 '성협'의 '고기굽기'/ⓒ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중앙과 연결되는 두 가지 조건을 더 갖추어야 했다. 하나는 이른바 경화세족(京華世族, 서울의 양반으로 권력을 장악한 귀족화한 양반을 뜻함) 또는 명문세족(名門世族, 이름을 떨치고 세력이 있는 양반 집안)과의 교유가 있어야 했으며, 나머지 하나는 중앙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서리(書吏,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딸려 있던 하급 관리)들과 연망이 있어야 했다.

 

우선 지방 양반과 경화세족과의 교유의 예로 전라도 부안현에 세거하는 부안김씨의 예를 보면 이들은 조선시대에 무노가 급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 중의 하나인 반남박씨(潘南朴氏)와 교유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반남박씨와 부안김씨가 언제부터 교유를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박동량(朴東亮, 1569~1635)과 김홍원(金弘遠, 1571~1645)이 그 시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동량은 한때 부안현으로 유배당한 적이 있는데, 이때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김홍원이 귀양살이하는 그를 위로하면서 가까워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두 집안은 대대로 교유하였다. 박동량의 종손(從孫)인 박세모(朴世模), 박세견(朴世堅), 박세해(朴世諧) 등은 김홍원의 아들인 김명열과 절친하게 지냈다. 또 박세표의 아들인 박태관(朴泰觀)과 조카인 박태겸(朴泰謙) 등은 김번의 아들인 김수종(金守宗)과 매우 친근하게 지냈다.

 

서울에 사는 반남박씨와 부안에 거주하는 부안김씨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주 왕래하지는 못했지만 서신 교환 등을 통하여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고 또 선물 등을 주고받았다. 이들이 교환한 선물의 내용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지만, 김수종과 박태관 등이 주고받은 선물의 내용을 간찰에 기록된 것만을 근거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기록된 것 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김수종이 박태겸, 박태관과 주고받음 물품들

번호 일시 김수종이 보낸 물품 김수종이 받은 물품
01 1699/01 대복, 괴판, 담배 달력
02 1701/05
03 1703/07 복, 종이  
04 1703/12 물고기  
05 1704/11   달력, 먹
06 1705/01 괴판
07 1706/01 차양죽 해묵, 주재
08 1706/05 나락, 물고기, 푸른 대
09 1706/12   달력
10 1706/12 차양죽 달력
11 1708/08  
12 1708/08   붓, 먹
13 1709/03 망건  
14 1710/01 푸른대나무 달력
15 1710/12   달력, 붓
16 1711/12   달력
17 1712/08 물고기, 돈  
18 1713/04   붓, 먹
19 1713/11   달력
20 1714/01  
21 1714/02  
22 1714/02  
23 1715/03 벼, 대하
24 1715/08  
25 1716/01 돈, 대하 달력, 먹
26 1716/05 벼, 돈, 대하 아이 약, 붓
27 1716/10 나락, 물고기  
28 1716/11 달력
29 1717/05 망건, 천초, 참빗 부채, 먹, 붓
30 1718/01   아이 약
31 1718/11 생강  
32 1721/12 보리, 괴판  
33 1733/12   달력
34 미상   납제
35 미상 달력, 붓
36 미상   종이
37 미상 쌀, 콩, 말죽  

 

김수종이 박태겸이나 박태관에게 보낸 선물은 주로 대하와 전복 같은 어물, 망건과 참빗 등의 생활용품, 담배와 생강같은 기호품, 그리고 식량과 돈이었다. 이에 비해 박태겸이나 박태관이 김수종에게 보낸 물품은 붓이나 먹과 같은 문방구와 책력 등이었다.

 

주고받은 선물의 종류나 양만을 놓고 따져 보면 김수종이 박태겸이나 박태관에게 보낸 선물이 그들로부터 받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에서 김수종은 커다란 손해를 보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박태겸과 박태관은 과거의 실시시기, 국왕의 병세, 각종 사건과 고변 등을 비롯하여 국내외의 정세와 관련된 정보를 김수종에게 상세히 전달해 주었다. 그 결과 김수종은 비록 궁벽한 해안가에 살고 있어도 서울 소식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 그들은 김수종이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에는 이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고관의 청탁편지를 받아주거나, 감사나 현감이 그들의 지인일 경우에는 이들에게 직접 부탁하기도 했다.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김수종이 참봉으로 천거되었을 때에도 임명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것들이 배경이 되어 김수종은 부안지역에서 정보력 있고 권세 있는 양반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지방 양반과 서리와의 연망관계인 예로 현재는 경상도 봉화군 봉화읍에 있는 유곡마을은 예전에는 안동에 속하였던 곳이다. 그곳에는 세상에 '닥실권씨'로 널리 알려진 안동권씨들이 세거하고 있는데, 이들은 권벌(權橃, 1478~1548)의 후손들이다. 이 안동권씨는 조선 말기에 이조(吏曹)의 서리인 오상린(吳相麟)과 밀접한 연망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이 양반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서리를 '단골리(丹骨吏)'라고 불렀다. 권벌의 후손 중에 권호연(權好淵, 1824~ ?)이란 인물이 있는데, 그는 1859년 문과에 급제한 후 관례에 따라 삼관(三館, 조선시대 학술 문필 기관인 성균관-승문원-교서관의 통칭) 중의 하나인 승문원에 부정자로 배속되었다. 그 후 그는 인사철이 다가오자 정주(政注), 즉 승정원 주서(注書)로 임명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궁금해서 단골리였던 오상리에게 이를 알아보도록 지시하였다. 오상린이 이에 대해 수소문해 보니 이미 다른 사람이 내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고목(告目)을 권호연에게 보내어 그간의 사정을 간략히 보고하고 있다.

 

삼가 엎드려 아룁니다. 보내 주신 편지를 일거 보니 위로 됨이 큽니다. 지시하신 것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주(政注)에는 윤영신(尹榮信), 조병직(趙秉稷)이 확정되었으니 양해하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평사(評事)에는 박해철(朴海哲)로 정해졌으니 헤아리시라는 뜻으로 알립니다.

 

중앙의 서리들은 이와 같이 지방 양반에게 인사에 관련된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임명장을 작성해 주고 근무일수 계산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등 업무와 관련된 자문에 응했으며 서울에 있는 집과 노비 및 녹봉 등을 관리해 주기도 했다. 이에 반해 양반들은 서리에게 대가로 선물이나 돈을 주었다. 지방 양반과 중앙 서리의 끈끈한 관계를 매우 잘 드러내 주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선동력(夏扇冬曆)'이다. 여름에 지방 양반들이 서리들의 노고에 보답하려 부채를 만들어 보내고, 겨울에는 그 반대로 중앙 서리들이 책력을 구해서 지방 양반들에게 보내 주었다.

 

앞서 두 가지의 예와 같이 지방 양반과 중앙 사이에는 두 가지 연망이 있었다. 하나는 경화사족과의 연망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중앙 서리와의 연망이었다. 지방 양반들은 이와 같이 두 개의 연망을 형성하고 유지해야만 토반(土班)으로 몰락하지 않고 양반으로서의 지체와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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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삼형제/ⓒ울산매일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축복할 만한 일이며 온 가족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엄격하기 짝이 없던 유학자들도 아이, 그중에서도 특히 손자가 탄생했을 때에는 체면과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기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러한 사실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1796년 3월에 쓴 다음과 같은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초사흘에 관가의 하인이 돌아오면서 기쁜 소식을 가져왔더구나. "응애응애" 하는 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다. 인간의 즐거운 일이 이것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게다. 육순의 늙은이가 이제부터 엿을 물고 구슬을 희롱할 뿐 달리 무엇을 구하겠느냐?...

오늘이 바로 내 손자의 삼칠일이로구나. 이백여 명의 관속(官屬)들에게 아침에 국과 밥을 먹였더니 좋아하며 떠들썩하게 축하해 주더구나. 그제서야 나도 경술년에 순조(純祖) 임금께서 막 태어나셨을 때 산해진미로 기쁨에 넘쳐 즐거워하면서 억조창생을 고무케 하시던 성심(聖心)을 가늠하겠더라. 다 쓰지 못한다.


아이의 탄생을 전하는 편지를 읽고서 박지원이 "응애응애" 하고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편지에 가득하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가 아이의 탄생을 얼마만큼 기다려 왔고, 또 그것을 어느 정도 기뻐하고 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박지원은 얼마나 기뻤던지, 아이가 태어나 21일째 되던 삼칠일에 200여 명이나 되는 관속들에게 밥을 먹이고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박지원과 같이 아이의 탄생을 크게 축하해야 하는 경사로 여겼기 때문에 갓 태어난 손자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재산을 분배하는 일도 허다하였다.


?... 장손에게 명문(明文)을 성급(成給)해 주는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오늘은 네가 태어난 지 7일이 되어 너를 대립(大立)이라 이름 지으니 종사(宗祀)가 이로부터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에 내가 매우 기쁠 뿐만 아니라 이는 가문의 적지 않은 경사이다.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전래된 사내종 권막(權莫)의 다섯째 소생 계집종 끝지와 온계(溫溪) 집 앞 우물가의 밭[井田] 10마지기를 영영 별급(別給)한다. ...


위 문서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이황(李滉, 1501~1570)이 1559년 6월에 그의 맏조카 이완(李完)이 아들을 낳자 7일 만에 재산을 분배하면서 작성해 준 것이다. 이호아은 손자가 태어난 일이 가문의 경사라고 말하면서 손수 이름을 '대립'이라 지어주고, 말 그대로 문전옥답인 집 앞 우물가의 밭과 이를 경작할 수 있는 계집종을 특별히 분배해 주고 있다.

온 가족의 관심은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고 축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이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성장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박지원이 위의 손자를 얻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60세로, 경상도 안의현감에 재임 중이었다. 그는 마음 같아서는 곧장 서울로 달려가서 손자를 안아 보고 싶었을 것이나 그럴 수가 없었다. 관찰사나 국와의 허락 없이 임지(臨地)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자가 어떻게 생겼을지 더욱 궁금해지고, 또 누구를 닮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집으로부터 아이의 소식이 담긴 편지가 어서 오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나 오는 편지에는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잔뜩 화가 난 박지원은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손자의 용모에 대해 직접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다.


네 첫 번째 편지에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미목(眉目)이 밝고 수려하다 하고, 두 번째 편지에서는 점점 충실해져서 그 사람 꼴을 갖춤이 자못 초초(艸艸)하지 않다고 하더니, 종간(宗侃)의 편지에도 골상이 비범하다고 했더구나. 대저 이마는 넓고 솟았으며, 정수리는 평평하고 둥근지, 어째서 하나하나 적어 보이지 않는 게냐? 답답하구나.


박지원은 아이를 키우는 데 대해서도 일일이 관심을 기울이고 지시하였다. 어느 아이든지 조금 자라서 걸어다니게 되면 그때부터 말썽꾸러기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비록 어리지만 이때에 기본적인 성격이 형성되기 때문에 누가 어떻게 돌보느냐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차례 제사에 날씨가 아직 더워 방구들이 찌는 듯하니, 아이들도 조양(調養)하기가 몹시 어려운데, 하물며 모든 게 입에 들어갈 물건임에야 어떻겠느냐? 반드시 모름지기 경고(京橋)의 어린 계집종을 빌려 정성껏 바깥채에서 돌보게 하고, 안채 쪽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귀봉(貴奉)이의 술주정은 요즘은 심하지 않으냐? 그 사람은 술만 취하면 망령된 사람이다. 절대로 아이를 안게 해서는 안 된다.


날씨가 더운데다가 제사를 지내느라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 안이 찌는 듯할 것이니 아이를 기르는데 유의해야 하며, 또 모든 물건을 입에 넣을 나이이므로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기를 당부하고 있다. 또 계집종을 빌려 바깥채에서 아이를 돌보게 하고 안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며, 술주정이 심한 귀봉이에게 아이를 안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소한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박지원의 모습을 통하여 조선시대 양반들이 후손의 성장과 교육에 얼마나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생후 1년을 무사히 넘기면 돌잔치를 크게 열었다. 이때 온 가족이 모여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돌이 된 것을 축하하고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를 점치기도 하였다. '돌잡이'가 그것인데, 돌상 앞에 필묵, 옥환(玉環), 인장 등을 늘어놓고 아이가 무엇을 잡는지를 보아 장래 어떠한 인물이 될 것인가를 판단하였다. 아이가 필묵을 잡으면 문인이 되어 문명을 널리 떨칠 것이고, 옥환을 집으면 덕성을 갖춘 인물로 성장할 것이며, 인장을 만지면 관리가 되어 이름을 날릴 것이라 전망하였다. 아이가 무엇을 잡든지 아이에 대한 가족들의 기대가 반영된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김홍도, 초도호연(初度弧宴)/ⓒ국립중앙박물관

색동옷을 입은 아이가 돌잡이를 하는 모습 


조선시대에는 돌잔치에서 책을 써 주는 풍속이 있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아이가 덕성을 갖춘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정성을 담아 아들이나 손자에게 손수 책을 필사해 주었다. 또 돌잔치에 초대된 유명한 하객에게 한두 글자씩을 써 달라고 부탁해서 '천자문'을 제작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돌잔치는 한 아이가 태어나서 무사히 한 해를 넘긴 것을 축하하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이 아이와 유명한 하객이 일종의 연망(聯網)을 맺는 자리였는데, 이때 하객들이 한 글자씩 써서 만들어 준 '천자문'이 바로 그 증표였던 것이다.

실제로 아이에게 '효경(孝經)'이나 '동몽선습(童蒙先習)'과 같은 책을 제작해 주는 사례를 충청도 서산에 세거했던 경주김씨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김노응(金魯應), 1757~1824)은 아들 김도희(金道喜)가 1784년에 돌을 맞이하자 인륜에 밝은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직접 

'효경'을 써 주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아들 김도희가 이제는 아버지가 되어서 자신의 아들 김상준(金商濬)이 돌을 맞이하자 어린 나이부터 오륜을 엄중히 체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몽선습'을 써 주었다. 이는 그가 이 책의 끝에 쓴 다음과 같은 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내아이가 태어난 날에 책을 써서 내려 주는 것은 동방의 풍속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제 삼복더위를 당하여 '동몽선습' 한 책을 땀 흘려 가며 쓰노니, 네 아버지의 애태우는 마음을 생각하고 오륜(五倫)이 가장 엄중함을 체득하고 끊임없이 전진하여 그치지 말며 쉼 없이 부지런하여 더함이 있도록 하라.


돌에 별급문서를 작성해 주는 경우도 많았다. 전라도 부안현에 세거하던 부안김씨 김명열(金命說, 1613~?)은 60세가 다 되도록 친손자를 얻지 못하자 자손이 끊어질까 근심하였다. 그러던 중 둘째 아들 김문(金璊)이 마침 사내아이를 낳으니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어느덧 한 해를 무사히 넘겨 돌을 맞이하자 기뻐서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돌을 맞은 손자에게 써 준 아래의 별급문서에 자세히 쓰여 있다.


나이가 육십이 되었는데도 친손자를 얻지 못하여 슬하가 무료할 뿐만 아니라 후사가 끊어지지 않을까 항상 크게 근심하여 왔다. 막내아들 문(璊)이 비로소 아들을 낳아 이름을 수종(壽宗)이라 하였다. 태어난지 겨우 한 돌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눈썹이 뚜렷한데다 살결이 백옥(白玉)과 눈처럼 뽀얘서 사랑스러우며 용모가 준수하여 장차 크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만일 맏아들 번(璠)이 끝내 자식을 낳지 못하면 당연히 봉사손(奉祀孫)이 될 것이니 그 경사스럽고 다행함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 경사나 즐거움이 있을 때 특별히 재산을 분배하는 것은 관례이다. 다행히 이와 같이 손자를 얻었으니 어찌 별급이 없을 수 있겠는가.


'김수종 별급문기'

전라도 부안에 살던 김명열이 1672년에 손자 김수종의 돌을 맞이하여 약간의 재산을 나누어 주고서 작성한 문서이다. 손자를 얻은 기쁨이 절절히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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