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원성대왕 괘릉(掛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찬(伊湌, 신라 17관등 중 두 번째로 높은 관직으로 진골만 오를 수 있었다. 이척찬(伊尺飡) 혹은 이간(伊干), 일척간(一尺干), 이찬(夷粲)이라고도 한다.) 김주원(金周元)이 처음에 상재(上宰)가 되었고 원성왕(元聖王)은 각간(角干, 신라 17관등 중 첫 번째로 높은 관직으로 일명 이벌간(伊罰干),우벌찬(于伐飡),이벌찬(伊伐飡),각간(角干),각찬(角粲),서발한(舒發翰),서불한(舒弗邯)이라 하였다.)으로 상재의 다음 자리에 있었다. 원성왕은 꿈에 복두(幞頭, 두건의 일종으로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처음 만들었으며, 귀인이 쓰는 모자의 하나로 보면 된다.)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 12현의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꿈에서 깨어나 사람을 시켜 풀이하게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직책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집을 쓸 조짐입니다.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입니다."

 

원성왕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근심하여 문을 닫고는 나가지도 않았다. 이때 아찬(阿飡, 신라 17관등 중 6번째 관직으로 일명 아척간(阿尺干)·아찬(阿粲)이라고도 하였다.) 여삼(餘三 혹은 여산餘山이라고도 한다.)이 와서 뵙기를 청했다. 원성왕은 병 때문에 나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아찬이 다시 한 번 만나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했다.

 

아찬이 말했다.

"공께서 꺼리는 일이 무엇입니까?"

원성왕은 꿈을 풀이한 일을 자세히 말했다. 그러자 아찬이 일어나 절을 하면서 말했다.

"이는 바로 길몽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 저를 버리시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왕은 주의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고 풀이해 줄 것을 청했따. 아찬이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그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또한 12현의 가야금을 지닌 것은 12손(孫, 원성왕이 내물왕의 12세손이 된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의거)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권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왕이 말했다.

"위로는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아찬이 말했다.

"청컨대 몰래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를 지내십시오."

 

왕은 아찬의 말에 따랐다.

얼마 후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왕으로 삼아 궁궐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의 집은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시냇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즉위하자 대신의 무리들이 모두 따라와서 새로 즉위한 임금에게 절을 하고 축하했다. 이 사람이 바로 원성대왕(元聖大王, 재위 785~798)이다. 대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고 성은 김씨인데, 꿈의 응험이 맞았던 것이다.

 

김주원은 물러나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살았다. 왕이 등극했을 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자손을 불러 벼슬을 내렸다. 왕에게는 손자가 다섯이니 혜충태자(惠忠太子), 헌평태자(憲平太子), 예영잡간(禮英匝干), 대룡부인(大龍夫人), 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은 참으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기 때문에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를 지었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의 만파식적을 전해 받아 왕에게 전했다. 왕은 만파식적을 얻었기 때문에 하늘의 은혜를 받아 그 덕이 원대하게 밫났다. 정원(貞元, 당唐나라 덕종德宗 이적李適의 연호로 785~805년까지 사용) 2년 병인년(786년) 10월 11일, 일본의 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記'를 보면, 제55대 문덕왕文德王이 이에 해당되는 듯하다. 그 이외에는 문경이 없는데, 어떤 책에는 왕의 태자라고 하기도 한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했는데,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돌리고 금 50냥과 함께 사신을 보내 그 피리를 청했다. 왕이 사신에게 말했다.

 

"짐은 선대인 진평왕 대에는 있었다고 들었으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듬해 7월7일, 다시 사신을 보내 금 천 냥으로 만파식적을 청하며 말했다.

"과인이 신물(神物)을 보고 난 후 다시 돌려드리겠소."

 

왕은 역시 이전과 같은 대답으로 사양하고, 은 3,000냥을 사신에게 주어 금과 함께 돌려보냈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보관했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년(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다음 날 두 여자가 내정(內庭)에 나와 아뢰었다.

 

"저희들은 바로 동지(東池)와 청지(靑池, 청지는 바로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그 절의 기록에, 우물은 바로 동해의 용이 왕래하면서 설법을 듣는 곳이라 했다. 이 절은 바로 진평왕이 만든 것으로 500성중聖衆, 5층탑, 전민田民을 아울러 바쳤다고 한다.)의 두 용의 아내입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티베트계통의 당항黨項, 탕구트) 사람 두명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이 우물은 지금도 분황사에 남아 있다.)의 용 등 세 용을 저주하여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 속에 담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저희 남편을 비롯하여 나라를 지키는 용을 돌려주게 하십시오."

 

왕은 뒤쫓아 하양관(河陽館, 경상북도 영천 서쪽인 하양에 있어던 관사)에 이르러 직접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에게 명령했다.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의 용 세 마리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느냐? 만약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에 처하겠다."

 

그러자 하서국 사람은 물고기 세 마리를 꺼내 바쳤다. 세 곳에 놓아 주자 제각각 한 길씩이나 뛰어오르고 기뻐하며 사라졌다.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성스럽고 명철함에 감복했다.

 

어느 날 왕은 황룡사(皇龍寺, 어떤 책에는 화엄사華嚴寺 또는 금강사金剛寺라고 했는데, 절 이름과 경經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의 승려 지해(智海)를 궁궐로 청하여 50일 동안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게 했다. 사미(沙彌, 출가하여 정식 승려가 되기 전에 수련 중인 남자 승려) 묘정(妙正)은 항상 금광정(金光井, 대현법사大賢法師로 인해 얻은 이름이다.)에서 그릇을 씻었는데, 자라 한 마리가 샘 가운데에서 떴다 잠겼다 했다. 모정은 늘 먹다 남응ㄴ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놀곤 했다. 법연이 끝나 돌아가게 되자 사미가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며칠 동안 덕을 베풀어 주었는데 어떻게 갚겠느냐?"

 

며칠 후 자라는 작은 구슬 한를 토해 주었다. 사미는 그 구슬을 허리띠 끝에 매달았다.

 

이후부터 대왕은 사미를 보면 애지중지하여 내전으로 불러들여 항상 곁에 두었다. 이때 한 잡간(匝干, 신라 17관등 중 3위 관등)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역시 사미를 사랑하여 함께 데리고 가기를 청했다. 왕이 허락하여 잡간은 사미와 같이 당나라로 들어갔다.

 

당나라 황제 역시 사미를 보자 총애하고, 승상과 좌우 신하들이 모두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런데 관상을 보는 사람 하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사미를 살펴보건대, 길상(吉相)이 하나도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 존경과 신임을 받으니, 반드시 특별한 물건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니 사미의 허리띠 끝에서 작은 구슬이 나왔다.

황제가 말했다.

 

"짐에게는 여의주 네 개가 있었는데 지난해에 한 개를 잃어버렸다. 지금 이 구슬을 보니 바로 내가 잃어버린 것이다."

 

황제가 사미에게 묻자 사미는 그 일을 사실대로 아뢰었다. 황제가 말했다.

 

"구슬을 잃어버린 날과 사미가 구슬을 얻은 날이 같다."

 

그 구슬을 빼았고 사미를 쫓아냈는데 그 뒤로는 아무도 사미를 사랑하거나 신임하지 않았다.

 

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숭복사崇福寺다.)에 있는데(그의 능은 물이 차 있어 관을 땅에 묻지 못하고 걸어 놓았다고 하여 괘릉掛陵이라고 부른다.)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 또한 왕은 보은사(報恩寺)를 창건하고,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조부 훈입(訓入) 잡간을 추봉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증조부 의관(義官) 잡간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고조부 법선대아간(法宣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삼았는데, 현성대왕의 아버지가 곧 마질차(摩叱次) 잡간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함께 보기: 만파식적]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