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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경에 접어들면서 유럽사람들은 중세와 전혀 다른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중세를 대표하던 그레고리오 성가와 전혀 다른 음악이 등장하게 된 것은 갑작스런 사건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사회조직의 문제점들로 인해 사람들이 교회의 권위에 의심을 갖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1300년경에 등장한 새로운 예술, 아르스 노바 직전의 유럽은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십자군전쟁(1096~1456)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유럽 기독교인들의 성지인 예루살렘 순례금지를 빌미로 시작된 십자군전쟁은, 대외적으로는 성지탈환과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당시 유럽으로 정치적, 군사적 힘을 확장시켜가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었다. 성지탈환이라는 목표를 금세 달성하리라 믿고 시작된 십자군전쟁은 당초 예상과 달리 백년 이상 계속되었고 십자군전쟁에 참전한 상당수의 봉건 귀족들과 기사들은 정치적, 사회적 기반을 상실하면서 여러 지역으로 떠돌게 된다.

게다가 아비뇽 유수(1309~1377), 흑사병 창궐(1348~1350)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당시 사람들은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기사 가인들이 전해주는 십자군전쟁의 무용담, 연애이야기를 다루는 지방어의 세속노래, 인간적인 고뇌와 관점을 중심으로 서술한 단테(Alighieri Dante,1265~1321)의 '신곡'(1307)과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의 '데카메론'(1353) 같은 지방어 문학, 비잔틴 미술의 관습을 거부한 자연주의 화가 지오토(Giotto, 1267~1337)의 등장으로 인본주의의 기운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1300년대 예술은 발아하는 인본주의 정신을 표방하기 시작하고 음악에서도 이전의 교회음악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음악이 관심을 끌게 된다.




시인 겸 음악가였던 필립 드 비트리(Philip de Vitry, 1291~1361)가 1300년대 초반 파리의 음악과 문학의 새로운 기운과 특징을 논한 '아르스 노바'(1316~1318)라는 책의 제목에서 유래한 1300년대의 '새로운 음악'이 이전 시대와 구분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세속노래가 크게 유행하였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자연의 변화, 날씨, 사람들 사이의 관계(전쟁, 우정, 사랑)에 관심을 갖고 노래에 담아내기를 원했다. 그리고 음악가들은 기존의 음악 만들기 방식, 전통, 관습을 넘어서 자신들이 원하는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당시 교회가 허용하지 않던 파격적인 음악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당시 교회에서는 하느님의 3대 다른 인격, 즉 하느님, 예수님, 성령님의 동등함과 동일함을 강조하는 '삼위일체설' 때문에 3을 완전한 숫자로 생각했었다. 2라는 숫자는 삼위일체설의 3의 완전함에 으리지 못한 불완전한 숫자로 보았기 때문에, 음의 길이를 분할할 때 오늘날 사용하는 2분할체계 대신 3개 단위로 나누는 3분할체계만을 허용했다. 그러나 아르스 노바 시대의 음악가들은 신학적 교리에 따라 3분할 중심으로 발전되어 오던 중세의 리듬분할체계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세교회에서 3박자 계열의 3/4, 3/8만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스 노바의 음악가들은 2/4, 4/4, 4/2 같은 2(4)박자 계열의 음악을 만들었다. 또한 4, 5도 외에 3, 6도 음정을 듣기 좋은 소리로 생각하여 작품에서 3, 6 음정을 특별한 제약 없이 자유롭게 사용하기 시작한다.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 1304~1377)


아르스 노바를 대표하는 작곡가로는 프랑스의 마쇼(Guillaume de Machaut, 1304~1377)와 이탈리아의 란디니(Francesco Landini, 1335~1397)가 있다. 예배나 교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부르고 듣기에 아름답고 편한 음악을 만들려고 했던 아르스 노바 당시의 음악가들은 당시 교회의 시각에서는 매우 도전적이고 파격적인 시대의 반항아로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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